메뉴 건너뛰기

close

내 공부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역사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점들이 있다. 왜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낸 국가 권력이 국민을, 나아가 인류를 짓밟았고, 그러려고 끊임없이 시도해왔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에 상처받은 역사의 동지들이 있다. 누구의 상처가 더 크고 끔찍한지 재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를 보듬고, 두 번 다시 같은 상처를 만들지 않는 것이 우선일 테다.

고통의 역사에도, 승리의 역사에도,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이름을 길이 남긴 인물도 있고, 촛불시민으로 기록될 광장의 사람들도 있다. 혁명적 승리를 쟁취한 사람도 있고,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져버렸던 사람도 있다. 이들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들을 알게 되면 역사는 생동감을 얻는다. 기자이자 저널리스트로 전세계를 누빈 오리아나 팔라치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책표지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책표지
ⓒ 행성B

관련사진보기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오리아나 팔라치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생전의 그녀는 자서전을 발표한 적이 없고, 자신에 관한 그 어떤 전기도 인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녀와 인연이 깊었던 출판사가 "언젠가 내 인생에 관해 누군가 쓴다면,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p4)라고 말한 그녀의 뜻을 존중하여, 기사, 칼럼, 에세이, 인터뷰, 일지, 메모 등 그녀가 남긴 모든 글의 자취를 좇고, 그 중 자신의 생애를 직접 기술한 내용만 실은 것이 이 책이다. 팔라치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으로 재구성된 자서전이며, 그녀의 인생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192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오리아나 팔라치는 일찍이 아버지를 도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정치 체제의 희생자였음이 자신의 육체적·정서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인생은 쉬운 모험이 아님을 자각하고 훈련하는 최고의 교육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어린 그녀는 전쟁을 겪으며 전쟁에는 반드시 불합리, 어리석음, 광기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정당 정기 집회에 참석하고, 아버지의 노동조합운동을 이해하며, 세상을 바꾸길 꿈꾸는 소녀로 성장한다. 고교 졸업시험 중 조국의 개념에 대한 그녀의 논술은 퍽 놀랍다. 그녀는 때에 따라 달라지는 조국의 개념보다는 자유의 개념에 관해 물었어야 한다고 당차게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유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서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다. 자유는 존엄을 의미하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을 거부하는 것이다. 감옥에서, 고문실에서,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장에서 조국 만세가 아니라 자유 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생명들이 그 자유를 기억하게 한다." (pp46-47)


팔라치는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중단하고, 열여섯 살에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 후 종군기자를 지원하고, 세 번이나 총상을 입으면서도 종횡무진 세계를 누비며 기자로서 활약한다. 그녀의 직업정신과 사명감은 눈부시다. 그로 인해 감화되는 것은 기자만의 특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영웅이다. 기자는 역사가이다. 기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역사를 쓰는 사관이다." (p212)


팔라치는 인터뷰 기자로서도 유명하다. 할리우드 스타는 물론 인디라 간디, 달라이 라마, 헨리 키신저 등 유명인을 만났고, 그 에피소드들은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특히 우주비행사들의 용기, 희생, 단련에 감탄하고, 그들을 영웅이라 불러 마지않는다. 그러나 곧, 진정한 영웅은 안전장비 없이 전쟁터로 돌격하고 이름도 없이 스러질 것을 택하는 베트콩이라고 말하며,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팔라치의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노예에 빗대며, 딸에게 자신과 같이 살지 말라고, 세상을 누비며 일하라고 말한다. 팔라치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지닌 페르시아의 왕비조차 그녀만의 탑에 갇혀 지루해 함을 보기도 하고, 남성과 달리 여성의 문제는 오직 여자라는 사실에서 나오기도 함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이 쓴 <하찮은 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르포르타주는 어디서든 여성은 하찮은 방식으로, 다시 말해 그릇된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자가 낙타로 취급되는 무슬림 국가와 같은 곳이든, 여자가 지나치게 대접받고 여성주의가 강한 미국이든, 일부는 낙타처럼 일부는 미국 여자처럼 사는 이탈리아든 상관없이 어디서든." (p77)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한 성공담보다 그녀의 삶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순간들이다. 그곳에 인간 오리아나 팔라치가 있다. 뜨겁게 사랑했으나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짙은 슬픔이 느껴지고, 그 사랑을 모독하는 자들을 향한 서슬 퍼런 분노는 나조차 두렵게 한다. 또한 병마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의 의지 앞에서는 숙연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면모에 찬탄을 보낼 수는 없다. "내 인생은 언제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p157)는 단언은 다소 독선적으로 보이고, 이슬람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이민은 테러리즘이 아니라 우리를 정복하고 말살하고 파괴하기 위한 수단"(p258)이라고 명명해 뜨악하기도 하다. 결혼의 속박을 거부하며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보이다가도,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고수한 것이 그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발산하는 빛은 물론 어두움마저 들여다볼 수 있어 행복하다. 깊은 영감과 감화를 주는 인물로서, 이 세상을 뜨겁게 살다간 한 여인으로서, 그녀에 대한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책 전면에 드러나는 그녀의 자유에 대한 신념, 무엇보다 뜨거운 삶에 대한 사랑. 나 역시 그 온도를 품고 살길 희망한다.

"나는 죽음을 증오한다. 나만큼 삶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삶을 즐기고 삶에 애착을 느낀다. 나는 태어난 것을 기뻐한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도 태어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p231)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희정 옮김, 행성B(행성비)(2018)


태그:#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