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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개막식에 참가자들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은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반대하고 있다.
▲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개막식에 참가자들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은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반대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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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동성애자 인권 개선을 위한 '2018 제19회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한편, 바로 옆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동성애자 반대 집회가 열렸다. 태극기과 성조기까지 휘날리는 가운데, 일부 보수파 기독교인들이 동성애 반대 구호를 외쳤다. 이들 중 일부는 서울광장을 빙 둘러 포위한 상태로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 스피커 선전전도 펼쳤다.

뜨거운 7월 태양 아래서 벌어진 이 풍경을 보노라면, 현대 사회에서 동성애자 인권에 가장 적대적인 집단이 일부 보수 기독교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하지만, 현대의 동성애자 차별구조를 창조한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그 '조물주'는 따로 있다.

정치적으로 남을 이끄는 사람보다 경제적으로 남을 이끄는 사람이 남의 가치관이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한테서 자기 가치관이나 사생활에 대한 간섭을 받은 경우보다는, 회사 사장이나 자기 집 가장한테 그런 간섭을 받아본 경험이 훨씬 많을 것이다.

가장은 물론이고 회사 고용주도 자기 직원의 가치관·사생활에 관심을 갖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직원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 가능성에 주시하는 경우도 있다. 직원이 특이한 삶을 살게 되면 그들을 통제하기 힘들어져 회사의 이윤 창출에 지장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를 품는 경우도 있다.

'일부일처제'라는 것의 탄생배경

퀴어 축제에 참가한 시민들.
 퀴어 축제에 참가한 시민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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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이제껏 역사 속의 경제적 지배층은 부하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의 성 문제에까지 관심을 표출했다. 그들은 성과 관련된 대중의 가치관이나 사생활에 주목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장기적 이윤창출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경제권력은 그들이 관심 표명 수준을 벗어나 성 문제를 통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 문제가 경제 권력의 통제를 받는다는 점은, 일부일처제의 등장 배경에 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분석에서도 나타난다. 계급제 출현 이후 남성의 재산을 상속할 후계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목적에서 일부일처제가 나왔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1884년에 나온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가족 내에서 남편의 지배와 부를 상속할 확실한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을 목표로 일처일처제가 나왔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략)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것으로, 특히 자연적으로 성장한 원시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에 기반한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

한 사람만에 대한 애정 감정 때문에 일부일처제가 나온 게 아니라 계급제에 기초한 사적 소유 때문에 이것이 나왔다는 지적이다.

일부일처제를 포함해, 각 시대의 경제적 지배층이 가장 선호하는 성의 구조는, 남성이 가장이 되고 여성이 보조자가 되며 두 부부의 아이가 미래의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미래의 노동자들을 안정적으로 출산할 수 있는 이런 구조를 경제적 지배층은 선호했다. 옛날 한국의 노비제건, 고대 유럽의 노예제건, 중세 유럽의 농노제건, 어느 시대나 지배층은 그런 구도를 선호했다.

그런데 동성 간의 사랑이 늘어나면 출산율이 떨어져 노동자의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게 경제적 지배층의 걱정이었다. 또 이성 간에도 생식과 무관한 성관계가 늘어나면, 이 역시 미래의 노동자를 줄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우려였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를 고용하기 어려워져 생산이 감소할 뿐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대우 수준을 높여야 하므로 이윤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이 특히 경계한 것은 출산과 무관한 성관계였다.

'소도미'를 아십니까

덕수궁 앞에서 열린 반대 집회.
 덕수궁 앞에서 열린 반대 집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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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집회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반대집회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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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무관한 성행위를 혐오하는 태도가 강했다는 점은 이런 성관계를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영국 미들섹스대학 역사학 교수인 노라 칼린(Norah Carlin)과 성소수자 전문가인 콜린 윌슨(Colin Wilson)의 공저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은 중세 유럽에서 유행한 소도미(sodomy)라는 용어에 관해 이렇게 풀이한다.

"소도미라는 말은 다양한 성적 죄악을 표현하는 데 사용됐다. 예를 들어, 9세기에 선교사였던 보니페이스는 근친상간, 혼음, 간통, 수녀와의 성관계 등은 모두 정액을 잘못 실어 나르는 부적절한 통로이기 때문에 소도미적 성욕이라고 규정했다."

이뿐 아니라 동성애를 비롯해 항문성교·구강성교·수간(동물과의 관계)도 소도미로 분류됐다. 중세 유럽의 경제적 지배층인 봉건 영주들이 근친상간·혼음·간통이나 수녀와의 성관계를 포함해 소도미 방식의 성행위를 경계한 것은 그것이 갖는 경제적 부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성관계가 늘어나면 아이들이 가정의 울타리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인 농노를 구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봉건 영주들이 교회와 연합해 소도미를 규제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식과 무관한 성관계를 규제하는 억압이 지배층 남성의 쾌락을 위해 살짝 유보된 사례도 적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중년 남성과 소년 남성의 동성애를 미화하는 풍조가 있었다. 성과 관련된 규범을 만드는 것은 남성 지배층이었으므로, 이들의 필요를 위해 허용 범위가 조정되는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반대 집회 참석자들.
 반대 집회 참석자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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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시대든 간에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기는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처럼 이에 대한 편견이 심한 적은 없었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가 소도미의 일부로 간주돼 금기시되긴 했지만, 동성애를 따로 독립시켜 규제하지는 않았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노라 칼린과 콜린 윌슨은 말한다.

19세기 말부터 동성애가 독립된 '죄목'이 된 것은 자본주의의 정착과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시대처럼 노동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자본가들은 정치권력의 법적·제도적 지원 하에 노동자들에게 중노동을 강요했다.

과거 유럽의 자본가들은 한국의 노비주나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보다 훨씬 더 가혹한 착취자였다. 이들은 공장 벽에 시계를 걸어놓고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저임금 때문에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노동을 당하다 보니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줄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 전반 영국에서 중산층 남성의 평균 수명은 50세를 넘은 데 반해, 맨체스터·베스널그린·리버풀에서 남성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각각 17세·16세·15세였다.

출산율 걱정한 자본가들이 생각한 방법

산업혁명 당시 자본가들은 지속적인 출산을 어떻게 유지시켜야 할까 고민했다.
 산업혁명 당시 자본가들은 지속적인 출산을 어떻게 유지시켜야 할까 고민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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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본가들은 이런 상태가 노동자의 지속적 출산을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지구상에서 노동자가 희귀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자본가 계급은 이런 현실을 걱정했다. 그들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채 몇 년도 일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면 자신의 이윤도 위협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위의 책

그래서 영국 자본가들이 벌인 일들이 많다. 노동자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물론이고, 여성 노동자의 보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여성 노동자들이 가족 건강과 출산에 바칠 시간을 주고자 1844년에는 이들의 노동시간도 제한했다. 또 노동자 가정의 숫자를 늘릴 목적으로 자위행위·혼외관계·성매매와 더불어 동성애를 금지하는 캠페인도 벌였다. 대중이 이런 성행위로 시간을 보내면 출산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노동계급 가족이 확립되면서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성행위도 형성됐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생아 출생률은 1850년과 1901년 사이에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가족의 가치를 벗어난 성과 성교(주로 성매매·자위행위·동성애)를 금지하는 캠페인 때문이었다."

영국은 자본주의를 지구상에 퍼트린 핵심 국가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따르는 규범 속에는 영국적인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영국 자본가들이 기독교와 지식인들을 앞세워 동성애 반대 캠페인을 확대하다 보니, 자본주의 세계의 여타 국가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19세기 말 이래로 세계 각국에 확산되는 요인이 됐다. 동성애자들이 역사상 최악의 편견에 시달리게 만든 요인도 됐다.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일부 보수파 기독교가 동성애자 인권 탄압의 주역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구조를 만든 장본인들은 200년 전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이들이다. 현대의 동성애 차별구조를 만든 '조물주'는 19세기 유럽의 자본가들이었다.


태그:#퀴어 축제,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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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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