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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조지아의 동부 지역인 카헤티주로 가고 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시그나기이다.    

산등성이 위에 붉은 지붕의 집들이 올망졸망 서 있는 시그나기 마을
▲ 시그나기 마을 풍경 산등성이 위에 붉은 지붕의 집들이 올망졸망 서 있는 시그나기 마을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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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보석, '사랑의 도시', '조지아의 진주' 등으로 불리는 시그나기는 조지아 동부 카헤티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트빌리시에서 약 110킬로미터 거리로 당일로 다녀오기에도 좋은 곳이다.

전철역 삼고리역에서 2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는 시그나기행 마르슈루트카(노선버스)가 있지만 나는 택시를 탔다. 버스 요금은 6라리(한화 약 2800원), 택시비는 40라리(한화 1만8500원)지만 가는 도중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내려서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을 요량으로 택시를 탔다. 나에게는 '길'도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시그나기 가는 길에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 시그나기 가는 길 시그나기 가는 길에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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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시베리아

카헤티주는 과거 카르틀리 카헤티 공국이 차지했던 지역으로 주로 카헤티인들과 산악지대의 투세티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카헤티 공국은 페르시아, 오스만 터키, 러시아 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카헤티공국이 독립적인 지위를 누린 것은 15세기 이후 잠시뿐이다. 1762년 텔라비를 수도로 정하고 인접한 조지아의 카트틀리 왕국과 통일하여 카르틀리 카헤티공국으로 통일되었다. 1801년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카헤티주 곳곳에 폐허가 된 요새와 수도원의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자세한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다.  

해발 700미터에 위치한 사가레조에는 곳곳에 폐허가 된 요새와 수도원이 남아 있다.
▲ 사가레조 마을 해발 700미터에 위치한 사가레조에는 곳곳에 폐허가 된 요새와 수도원이 남아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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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헤티주는 조지아의 시베리아로 불릴 정도로 교통이나 생활인프라가 낙후되었고 기후도 매우 건조하고 척박해서 최근까지도 여행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곳이다. 그럼에도 여행객들이 카헤티주를 찾는 것은 '와인' 때문이다. 카헤티주가 조지아 와인의 최대 산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카헤티 와인의 특별함 때문이다.

조지아 레드와인의 주요 품종인 '사페라비'임은 같지만, 그 특별함은 알라자니 계곡의 바람을 머금고 자란 포도와 전통적인 와인제조법에서 나온다. 킨즈마라울리, 알라베르디, 샤토 무크자니같은 유명 와이너리들이 모두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카헤티주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알라자니 계곡의 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와 전통와인제조법으로 만들어 카헤티 와인만의 '특별함'이 있다.
▲ 조지아 와인 카헤티주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알라자니 계곡의 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와 전통와인제조법으로 만들어 카헤티 와인만의 '특별함'이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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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도착하게 될 시그나기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762년 카르틀리 카헤티 왕인 에라클2세가 다게스탄 부족의 침략에 대비해 4.5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과 요새를 세웠으며, 이후 요새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 다음으로 길다는 시그나기 성벽을 몇 년에 걸쳐, 누가 쌓았는지 하는 점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사가레조'라는 기차역이 보였다. 기차 운행은 이미 오래전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폐역사만 덩그마니 남아 있는 것이다. 해발 700미터에 위치한 도시 사가레조는 과거 요새와 성 니노 수도원이 세워질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조지아의 수많은 쇠락하거나 사라진 도시 중의 하나일 뿐이다.  

시그나기 가는 길에 만난 조지아의 시골 마을은 대부분 쇠락하였다.
▲ 트빌리시에서 시그나기 가는 길 시그나기 가는 길에 만난 조지아의 시골 마을은 대부분 쇠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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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조지아의 시골 마을들은 가난해 보였다. 정비되지 않은 길과 오래된 집들, 빛바랜 낡은 간판, 텅 빈 상점들 그리고 생기 없고 무표정하게 담벼락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도시'를 연상시켰다.

"나는 와인 안 마셔요. 와인 별로 안 좋아해요."

뜬금없이 택시기사가 말했다.

"정말요? 난 조지아 남자들은 모두 와인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아뇨. 다 와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난 와인은 안 마셔요. 이따금 맥주만 조금씩 마셔요."


"저 사람들은 젊어서부터 와인이나 술을 많이 마셔서 저렇게 된 거예요."

그가 담벼락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술을 많이 마셔서, 늙어서 저렇게 건강도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요. 난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어려서부터 늘 주변에 술이 있고, 쉽게 술을 마실 수 있는 환경이라면 택시기사가 말한 부작용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의 말은 조금 의외였다. 조지아와 와인을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와인은 조지아의 대명사 아닌가. 와인이 싫다는 조지아 남자를 만났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그런데 정말로 의외였던 것은 술을 좋아하는 자국인을 경멸하는 듯한 택시기사의 태도였다. 그것은 어쩌면 가난과 게으름에 대한 경멸과 경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조지아 남자= 포도주 애호가'라는 나의 잘못된 등식은 깨져버렸다.

조지아 와인의 심장부

마을을 벗어나니 포도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로 양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시그나기, 크바렐리, 라꼬데히, 텔라비로 이어지는 조지아의 동부를 '와인루트'라 일컫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헤티주는 조지아의 최대 와인산지이다.
▲ 카헤티주의 포도밭 카헤티주는 조지아의 최대 와인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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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는 이제 막 심은 어린 포도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마침 포도밭에서 일을 하는 농부가 보였다. 트랙터처럼 생긴 엉성한 차량을 몰며 작업을 하던 농부는 우리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러면서 자기 사진 좀 찍어 달라며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또 다른 농부는 들판 한가운데 차를 세워 놓고 혼자서 밭을 갈고 있었다. 광활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농부의 모습은 한 잔의 포도주에 담기는 농부들의 땀과 노고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우리를 만난 농부는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시그나기 가는 길에 만난 조지아 농부 우리를 만난 농부는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며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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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자니 평원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부터 가을 조지아 들녘의 풍요로움을 예고하는 듯 했다. 짙은 보랏빛의 포도알들이 내뿜는 달짝지근한 포도향이 온 들녘에 가득 퍼지고, 포도송이를 따 담아내는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놀림과 분주한 발걸음, 잘 열린 포도를 보면서 환한 미소를 짓는 농부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이 되었다. 

조지아를 여행하다 보면 문득 '이 땅은 인간이 아닌 포도를 위한 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4월 조지아 들녘에 높이 떠 있는 태양은 인두처럼 뜨겁고,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채찍처럼 거칠다. 태양과 바람에 속절없이 노출된 농부의 얼굴은 뻣뻣하고 시커먼 동물의 거죽처럼 변해버리는 반면 포도나무들은 바람과 햇살을 맘껏 머금으며 자신의 향을 만들어간다. '와인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조지아인들은 '포도주를 담그는 일'을 신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무로 여긴다고 한다. 신화의 땅 조지아답게 이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신은 모든 민족들을 모아 놓고 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수프라(Supra, 조지아식 향연)를 즐기느라 조지아인들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던 신은 마침 신나게 수프라를 즐기던 조지아인들과 맞닥뜨렸다. 수프라에 동석하게 된 신은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을 위해 담겨 둔 마지막 땅을 조지아인들에게 주었다. 그 땅이 바로 조지아라는 것이다.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그린 조지아인의 수프라 장면
▲ 조지아인들의 수프라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그린 조지아인의 수프라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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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포도수확을 마친 농부가 제일 먼저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그 땅에서 나온 포도로 최상의 포도주를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것은 그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카헤티지역의 포도수확은 대체로 9월 말부터 시작된다. 시그나기는 10월 5일경, 그 후 며칠 간격으로 텔라비, 크바렐리 순으로 수확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때쯤이면 카헤티지역에서는 각종 '하베스트' 축제가 열린다.

성 니노가 잠들어 있는 보두베 사원
▲ 보두베 사원 성 니노가 잠들어 있는 보두베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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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한동안 꼬불꼬불 오르막길을 오르는가 싶더니 시그나기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택시기사가 포토존이라며 언덕 위에 차를 세웠다. 시그나기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등성이에 오밀조밀 붙어 있는 붉은색 지붕들이 마치 새집같았다. 옆에 보드베성당도 보였다. 산등성이 아래로는 드넓은 알라자니 평원과 순백의 설산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태그:#조지아여행, #시그나기, #카헤티여행, #조지아 와인산지 카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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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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