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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본다. [편집자말]
처음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건물과 건물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헷갈렸던 건물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di Santa Maria Novella)'과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Croce)'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성당을 왜 구분 못했을까 싶지만, 둘 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파사드가 당시에는 비슷해 보였다.

이 두 성당은 피렌체에서 매우 유명한 건축물이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피렌체의 서쪽에 있고, 산타 크로체 성당은 동쪽에 있다. 중앙대 손세관 교수는 도시 양 쪽에 있는 이 성당들이 피렌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종교적 핵을 중심으로 공간구조의 확산과 재편을 진행'하며 도시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두 성당은 비슷한 듯 다른 외형 만큼이나 역사적으로도 비슷하면서 다르게 기능해왔다.

두 성당의 시작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산타 크로체 성당 모두 13세기를 전후로 탁발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기존의 수도사들은 깊은 산속이나 오지에 있는 수도원에 기거했다. 이들은 수도원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각종 임대수입 등을 바탕으로 자급자족하며 바깥 세상과 담을 쌓고 수양에 몰두했다.

반면 탁발수도사들은 세상에 신의 가르침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전하기 위해 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탁발'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청빈의 의무를 서약했다. 탁발수도사들은 신도들이 바치는 헌물에 생계를 의존하며 때로는 직접 육체노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피렌체의 경제성장과 함께 탁발수도회에 들어오는 기부금이 풍족해지면서 청빈한 삶과 거리가 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대중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이런 탁발수도회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이 도미니코회와 프란체스코회였다. 도미니코회는 '도밍고 데 구스만(Domingo de Guzman)'의 가르침을 따르고, 프란체스코회는 성 프란체스코의 가르침을 따른다.

도밍고가 죽던 1221년 도미니코회는 '산타 마리아 델레 비네(Santa Maria delle Vigne, 비네는 포도밭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도시 외곽의 포도밭에 있었다)'라는 성당에 정착한다. 1278년 성당을 증축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왔다. 프란체스코회는 1226년 피렌체 동쪽 외곽에 산타 크로체 성당을 짓는다. 이후 1294년 더 큰 규모로 개축한다.

두 수도회 모두 청빈을 서약하고 대중의 삶과 함께 하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위치만큼이나 차이점도 있었다. 프란체스코회가 산타 크로체 성당의 개축을 진행하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보다 더 크게 지어달라고 주문했을 정도로 미묘한 경쟁심 또한 있었다.

피렌체의 동네 이름은 그 곳의 주요 성당에서 유래했다. 성당은 동네 주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때문에 각 성당 수도회의 성격에 따라 동네의 특징도 형성되었다.

도미니코회는 대중을 신의 가르침대로 이끌어줘야 하는 계몽의 대상으로 봤다. 그래서 설교자회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도회의 최초 설립 목적 중 하나가 이단들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수도사들은 매우 학구적이며 지적 탐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교회의 '두뇌' 로 불리며 중세 이단 심판관으로도 활약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근처에는 당시의 지식인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도미니코 수도사들은 여러 과학 연구에도 몰두했는데, 그 결과 독특한 향수 제조법을 개발한다. 이것이 성당 근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향수와 화장품 등을 주로 판매하는데, 배우 고현정씨 덕분에 이 곳의 수분크림이 한국에서 유명해졌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쇼핑 코스 중 하나이다.

반면, 프란체스코회는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도미니코회에 비해 교조적인 태도도 훨씬 덜했다. 이들은 인간이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 자체로 오류가 없다고 본다(인간의 무류성). 그래서 인간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때문에 산타 크로체 지역에는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이 모여들게 된다. 1378년 하층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위해 궐기한 '치옴피의 난'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산타 크로체의 수도사들은 당시 노동자들을 지지하며 축복해주기도 했다.

절대적 청빈을 사명으로 여기는 프란체스코회는 부패한 교황청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분노한 교황은 1318년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 4명을 화형시키고 1322년에는 수도회 자체를 이단으로 선포해 버린다. 이런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의 저항은 교회의 부정부패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나중에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장 아름다운 파사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쉴 새 없이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오는 피렌체 중앙역(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바로 앞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있다. 처음 피렌체에 왔을 때 기억이 선명하다. 기차역을 나오자마자 성당 종탑의 종소리가 청명한 6월 하늘 아래에 울려 퍼졌다. 이걸 듣고 '피렌체가 나를 환영해주는구나'라고 제멋대로 해석하며 들떴었다.

엘리트들이 모였던 동네여서 그런지 이 일대는 깔끔하고 아늑하게 정비되어 있다.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설계한 파사드는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자랑한다.

<이탈리아의 꽃, 피렌체>(중앙북스)를 쓴 리사 맥게리(LisaMcGarry)는 이 파사드를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사드라고 말한다. 미켈란젤로도 '나의 신부'라며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광장   곡선의 파사드가 아름답다.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광장 곡선의 파사드가 아름답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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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에 들어가면 마사초(Masaccio, 1401-1428)가 그린 유명한 프레스코화인 '성 삼위일체'가 있다. 원근법이 적용되어 실제와 같은 공간감을 준다. 그림의 아래 부분에는 해골이 누워있는데 '나의 어제는 그대의 오늘, 그리고 나의 오늘은 그대의 내일'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것인데,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예수의 부활로 극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장식된 여러 그림들은 이처럼 심오하고 철학적인 그림이 많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나의 어제는 그대의 오늘, 나의 오늘은 그대의 내일'
▲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나의 어제는 그대의 오늘, 나의 오늘은 그대의 내일'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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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 광장 역시 피렌체의 성당 중 유일하게 잔디밭으로 꾸며져 세련된 느낌을 준다. 광장 양쪽 끝에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이곳에서 펼쳐졌던 마차 경주의 이정표로 사용되었다.

피렌체에서는 운이 좋으면 예술품 복원작업을 구경할 수도 있다. 피렌체 곳곳에서 복원 작업이 이뤄지는데 일부 복원 현장은 관람객들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나도 두 번째 피렌체 여행 때 이 성당 안에서 전문가들이 예술품을 복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복원 작업 장면   아직도 복원 작업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복원 작업 장면 아직도 복원 작업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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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공동묘지, 산타 크로체 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근처에는 과거 로마 시절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이 있었다. 광장 앞의 도로와 주거지역의 형태에서 원형경기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원형 경기장의 흔적   과거 원형 경기장의 모습대로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빨간 색 사각형 안)
▲ 원형 경기장의 흔적 과거 원형 경기장의 모습대로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빨간 색 사각형 안)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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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의 파사드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와 달리 직선이고 뾰족하다. 이 파사드는 19세기에 완성되었는데 너무 현대적이고 볼품이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텨내야 했던 이 동네 노동자들의 의지처럼 느껴졌다. 성당 옆에 서 있는 단테의 강인하고 거대한 동상도 그런 느낌에 한 몫을 한다.

산타 크로체 성당과 광장   왼쪽에 단테의 동상이 보인다.
▲ 산타 크로체 성당과 광장 왼쪽에 단테의 동상이 보인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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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하층민들이 모여 살던 곳 답게 지대가 낮고 도시 정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아르노강이 범람할 때마다 큰 피해를 입었다. 1966년 기록적인 폭우 때도 피렌체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당시 폭우로 인한 피해는 아직까지도 복구 중이다. 2017년에 방문했을 때, 복구가 마무리된 수도원 일부와 예술품들이 일반인들에게 추가로 공개되었다.

과거 홍수 수위 표식   1966년 폭우 때 성당 높이의 절반 이상까지 물이 차올랐다.
▲ 과거 홍수 수위 표식 1966년 폭우 때 성당 높이의 절반 이상까지 물이 차올랐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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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그림들이 철학적이라면, 산타 크로체 성당의 그림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알아보기 쉽게 표현한 것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낮았던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것이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내가 피렌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동묘지'로 불린다. 단테,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천재들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단테와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나는 피렌체를 방문할 때 마다 이 두 무덤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단테는 르네상스 최초의 천재, 미켈란젤로는 마지막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란히 있는 무덤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르네상스의 시작과 끝이 한번에 나를 덮치는 듯하여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 돌아오지 못했고 이 곳은 빈 무덤이다. 진짜 무덤은 라벤나에 있다).

나란히 있는 단테와 미켈란젤로의 무덤   피렌체에 올 때마다 한참이나 이 무덤들을 바라본다.
▲ 나란히 있는 단테와 미켈란젤로의 무덤 피렌체에 올 때마다 한참이나 이 무덤들을 바라본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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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쪽 수도원으로 들어가면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음도 차분해진다. 수도원 가운데 있는 정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수도원에는 '스쿠올라 델 쿠오이오(Scuoladel Cuoio)'라는 가죽기술학교도 있다. 방문자들은 가죽 기술자들의 작업 모습을 구경하며 질 좋은 가죽제품을 바로 구입할 수도 있다. 질 좋은 수제품인 만큼 약간 비싸다.

지난해 이곳에서 처음으로 동양인 기술자를 보았다. 일본에서 가죽 공예를 배우기 위해 온 젊은 여성이었는데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몰두하는 모습이 참 근사해보였다.

이 학교는 고리(Gori)와 카시니(Casini)라는 가죽 장인 집안에서 2차 대전 이후 전쟁 고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보살피기 위해서 세웠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유명인들 뿐 아니라 이름없고 소외된 이들의 죽음과 삶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작업 중인 가죽기술자   좋은 가죽제품을 바로 구입할 수 있다. 질 좋은 수제품인 만큼 약간 비싸다.
▲ 작업 중인 가죽기술자 좋은 가죽제품을 바로 구입할 수 있다. 질 좋은 수제품인 만큼 약간 비싸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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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 광장은 다른 광장에 비해 투박하다. 별다른 조형물이나 장식없이 뻥 뚫려 있는데, 나는 이런 투박함과 개방감 때문에 이곳을 좋아한다. 과거 마상 창 시합이 이 광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매우 과격한 피렌체 전통 축구시합은 현재까지도 매년 6월 말에 열리고 있다(사실 축구라기 보다는 격투기에 가깝다).

도시의 어떤 건축물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두 성당도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주변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공간의 성격을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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