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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노트르담 성당과 빅토르위고

다음 날 아빠와 나는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긴 뒤 센강 한가운데 있는 시테섬(Île de la Cité)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시테섬까지는 차로 16분 거리다.

"시테는 파리의 발상지다."

우버 안에서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럼 한강의 여의도 같은 섬에서 시작된 거네요?"

그런 셈이었다. 물을 얻어야 하므로 대도시는 흔히 강을 끼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런던은 템스 강, 로마는 테베레 강, 뉴욕은 허드슨 강, 서울은 한강... 기원전 53년 로마군이 이 지역에 와보니 성정이 거칠고 포악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켈트족 계열의 파리시족(Parissii)이었는데, 파리라는 명칭은 바로 이 종족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고 한다.

"켈트족이라면 혹 영국 원주민 아니에요?"

"맞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밀려났지. 지도를 보면 시테섬 말고 하나가 더 있다."

시테섬 오른쪽에 생루이(Saint-Louis)란 아우섬이 하나 더 있었다. 원래는 시테섬이 파리의 전부였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생루이섬을 거쳐 센강 남쪽 곧 좌안이 조금씩 개척되기 시작했고, 그 뒤 센강 북쪽 곧 우안도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우버는 콩코르드다리로 센강을 건넌 다음 생제르맹 대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아르셰베셰 다리(Pont de l'Archevêché)를 타고 시테섬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왼쪽으로 차를 돌려세우니 바로 노트르담사원 앞이었다. 인근 메트로역은 '시테(Cité)'다.
 
정면에는 왼쪽부터 ‘성모마리아의 문’, ‘최후의 심판의 문’, ‘성녀 안나의 문'이 있다.
▲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  정면에는 왼쪽부터 ‘성모마리아의 문’, ‘최후의 심판의 문’, ‘성녀 안나의 문"이 있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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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웅성거리는 파르비광장(Place du Parvis) 건너편에 69미터 높이의 쌍탑이 보였고, 그 밑에 성당으로 들어가는 3개의 대형 문이 있었다. 왼쪽이 '성모마리아의 문(Portail de la Vierge)', 중앙이 '최후의 심판의 문(Portail du Jugement Dernier)', 오른쪽이 '성녀 안나의 문(Portail Sainte-Anne)'이다.

성녀 안나란 성모 마리아를 낳은 어머니의 이름이다. 어디선가 호소력 짙은 에디프 피아프의 샹송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De Paris)>이 들려오는 가운데 차에서 내린 나는 지나가던 학생에게 부탁해 아빠와 함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흔히 노트르담사원이라 하지만 정식명칭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이다. 노트르담이란 Our Lady, 곧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니까 우리말로는 '파리 성모 대성당'쯤 된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제우스신전이 있던 자리에 노트르담사원이 착공된 것은 1163년이었다. 당시 파리 인구는 고작 2만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세계 최대의 고딕 건물을 착공했다는 건 당대인들의 신앙심 때문이었을까?

첨탑이 무려 130미터나 된다. 높은 건물이 없던 중세적 환경에선 가히 놀랄 만한 높이였을 것이다. 7백 년 이상 된 건물이 지금도 저렇게 높이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는 그것이 재료 탓이라고 하셨다. 동양에선 나무를 썼기 때문에 불탄 경우가 많은데 서양은 재료가 돌이라서 보존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광장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 장소가 있었다. 무언가 해서 다가가보니 바닥에 프랑스 길들의 기준점이 되는 도로원표(Le point zéro)가 박혀 있었다.

"가운데 동판이 반짝반짝 빛나요."

"많이 밟아서 그런 거다. 동판을 밟으면 파리 땅을 다시 밟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니까."

"그럼 저도 밟아야죠."

내가 선뜻 동판을 밟자 아빠는 "넌 실천형이로구나" 하시며 이런 우스갯말을 들려주셨다. 전설을 믿든 안 믿든 나처럼 일단 밟고 보는 사람은 실천형이고, 전설을 의심하여 망설이는 사람은 주저형이며, 안 그런 척하며 은근슬쩍 밟는 사람은 내숭형이고, 밟고 팔짝팔짝 뛰는 사람은 파리에 온 게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유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도로원표는 프랑스 도로들의 기준점이 된다.
▲ Le Point Zero(도로원표)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도로원표는 프랑스 도로들의 기준점이 된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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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다가가니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입장료를 받는 줄이 아니라 보안검사를 받는 줄이었다.

"영화에 보면 노트르담 꼽추가 종을 치잖아요? 그 종은 어디 있어요?"

"뒤쪽 아닐까?"

나는 아빠와 함께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거기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기시간도 길지만 입장료도 10유로나 되었다. 아빠는 무릎이 아파 계단을 올라갈 자신이 없다고 하셨고, 나도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그냥 성당 내부만 보기로 했다.

간단한 보안검사를 받은 후 안으로 들어가니 성당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앙리 4세의 결혼식이나 나폴레옹 대관식이 거행되기에 어울릴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장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파리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역시 이 노트르담사원일 것 같았다.

"예수의 가시 면류관이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나도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하도 많은 얘기가 있으니 믿기 어렵다. 가령 진짜라고 주장되는 예수 십자가를 다 모으면 그 길이가 지구 한 바퀴도 넘는다더라."

그래도 나는 혹시나 해서 성당 안을 살피고 다녔으나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는지 따로 전시된 면류관은 보이지 않았다. 대혁명 시대에 일부 파괴되었던 사원의 수리와 복원작업을 병행했다는 기록을 읽은 일이 있어 그 점을 언급했더니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면 무슨 일이 없었겠느냐? 하지만 노트르담사원에 영원성을 부여한 건 그런 류의 복원작업이 아니었다."

"그럼 뭐였어요?"

같은 물건도 스토리가 붙으면 값이 더 나가는 법인데, 노트르담사원에 감동적인 스토리를 붙여 영원성을 부여한 것은 빅토로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rte-Dame de Paris)>이었다고 아빠는 지적하셨다.

[아빠의 이야기] 파리를 바꾼 돌다리

노트르담사원을 나온 우리는 시테 섬의 다른 유적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은 사원 옆에 있는 오뗄디외병원(Hôpital de l'Hôtel Dieu)이었다. 밖에서 보면 별 특색 없는 건물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서기 651년에 문을 연 파리 최초의 병원이었다. 놀라운 건 이 병원이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점에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의 하나다.

다음 블록으로 가자 건물 모양이 아무래도 감옥 같았던지 딸이 혹 감옥이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이다. 파리 고등법원의 부속감옥인 콩시에르쥬리(Conciergerie)였다. 이곳은 원래 카페왕조의 왕궁 일부였으나 14세기 후반 샤를 5세가 이곳에 왕실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왕을 호위하는 문지기(concierge)의 방을 콩시에르쥬리(conciergerie)라 했던 것인데, 그 후 건물 전체를 콩시에르쥬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 프랑스대혁명 후 국민공회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사형수 2780명을 가두면서 감옥으로 전환되었지만 명칭은 변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의 콩시에르쥬리로 남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당통, 로베스피에르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투옥되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지만.
 
원래 왕궁의 일부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후 감옥으로 전환된 곳이다.
▲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원래 왕궁의 일부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후 감옥으로 전환된 곳이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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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가자 무슨 궁전같이 생긴 건물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대법원, 고등법원, 검찰청, 변호사회 등 여러 주요 사법기관이 모여 있는 파리사법궁(Palais de Justice de Paris)이었다.
 
 대법원,고등법원,검찰청,변호사회 등 주요 사법기관이 모여있다.
▲ 파리사법궁  대법원,고등법원,검찰청,변호사회 등 주요 사법기관이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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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네 번째로 구경한 건물은 본래 프랑스 왕이 예배를 드리던 고딕양식의 생트샤펠(Sainte Chapelle)성당이었다.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장관이었다.
 
프랑스 왕이 예배드리던 고딕양식의 성당.
▲ 생트샤펠(Sainte Chapelle)성당 프랑스 왕이 예배드리던 고딕양식의 성당.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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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잇달아 답사한 감옥, 파리사법궁, 그리고 생트샤펠성당의 세 건물은 본래 프랑스 왕이 살던 시테궁(Palais de la Cité)의 일부였다. 대체로 13세기 초의 건물들이다. 그와 함께 아까 본 노트르담사원은 12세기, 오뗄디외병원은 7세기 건물이다. 물론 이 건축물들은 중간에 훼손되거나 파괴된 것을 후대에 보수·복원하거나 증축한 경우가 많아 원형 그대로라고 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구경을 다 하고 난 딸은 "그럼 우린 프랑스 중세시대를 통과한 거네요" 하고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소감이 어떠냐?"

"중세 때만 해도 왕궁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았던 것 같아요."

"맞아. 아직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거든. 하나 더 볼 게 있다."

딸을 데리고 시테섬 서쪽 끝으로 가는데 거리의 표지판을 발견한 딸이 "아, 퐁뇌프(Pont-Neuf)"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퐁뇌프는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중간 중간에 반원형의 벤치가 만들어져 있다.
▲ 퐁뇌프 퐁뇌프는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중간 중간에 반원형의 벤치가 만들어져 있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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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뇌프는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앙리 3세의 결정으로 1578년에 공사를 시작한 이 다리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도 볼품 있는 구조물도 아니었으나 <퐁뇌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Neuf)>이란 영화가 상영되고 난 뒤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다리다. 아담한 느낌을 주는 이 다리의 특징은 다리 중간 중간에 반원형의 벤치를 만들어놓았다는 점이다. 연인끼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좋게.

그런 점 때문이었는지 이 다리는 곧 파리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자 그들을 상대로 무언가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다리 좌우의 인도엔 행상, 곡예사, 만담꾼 외에 몸을 파는 여인들까지 모여들었다. 다리의 완공 시기와 그림 제작 시기에 상당한 시차가 있지만 아직 사회발전의 속도가 느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르누아르가 그린 '퐁뇌프'라는 작품을 보면 초기의 다리 풍경이 어떤 것이었나를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르누아르가 그린 ‘퐁뇌프’, 1872년작.
 르누아르가 그린 ‘퐁뇌프’, 1872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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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한쪽엔 이 다리를 개통한 앙리 4세의 기마동상이 세워져 있고, 또 한쪽엔 관광명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자물쇠들'이 빼꼭히 걸려 있기도 하다.

"퐁뇌프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인데, 왜 가장 오래된 다리를 새로운 다리라고 했을까?"

그러자 사진을 찍고 있던 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앙리 3세의 칙명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퐁뇌프가 최초의 돌다리였기 때문에 새로운 다리 곧 퐁뇌프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전에는 나무 다리뿐이었다. 여기서 무얼 알 수 있느냐 하면, 돌다리를 착공한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파리가 그렇게 감탄할 만한 도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설명을 듣고 난 딸이 말했다.

"그럼 16세기까지의 파리는 이 시테섬에 다 있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시간 어떠냐?"

"숙소 약속이 2시니까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돌아가는 길에 파리가 화려하게 변모하게 된 배경을 말해줄까도 생각했으나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엔 다음 행선지가 더 적합할 것 같아 말을 아끼기로 했다.

태그:#노트르담, #퐁뇌프, #파리여행, #파리역사,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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