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미국·202cm)과 케빈(프랑스·209cm)

앤더슨(미국·202cm)과 케빈(프랑스·209cm) ⓒ 국제배구연맹


한국 V리그가 세계 정상급 배구 리그는 아니다. 그러나 V리그에서 활약했던 외국인 선수가 국제대회나 유럽 리그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로 올라선 경우가 적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V리그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한 선수보다 퇴출·낙방 등 실패로 평가받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급 선수로 대반전을 이룬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V리그가 세계 배구 흐름과 동떨어진 채, 소위 외국인 선수 '몰빵 배구'가 주류를 이루면서 나타난 산물이기도 하다.

지난 9일 끝난 2018 남자배구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아래 네이션스 리그) 결승전에서 러시아가 '장신 군단'의 위력을 선보이며 프랑스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완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3-4위전에서는 미국이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 팀인 브라질을 3-0으로 꺾고 3위에 올랐다.

결선 라운드에 오른 4팀은 주전 선수가 총출동하면서 불꽃 튀는 대결을 펼쳤다. 배구팬들은 오랜만에 남자배구의 다이나믹한 경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국내 프로팀의 한 감독은 세계 최고의 남자배구 경연장을 보기 위해 직접 프랑스로 날아간 경우도 있다.

'V리그 평가' 비웃은 앤더슨과 케빈

국제배구연맹(FIVB)은 결승전 종료 직후 네이션스 리그에서 포지션별로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를 선정해 발표했다. 대회 MVP는 우승 팀 러시아의 주 공격수인 미하일로프(30세·202cm)가 수상했다.

포지션별로 베스트 라이트는 매튜 앤더슨(미국·205cm), 베스트 레프트는 테일러 샌더(미국·196cm)와 볼코프(러시아·201cm)가 선정됐다. 베스트 센터는 무세르스키(러시아·218cm), 케빈 레 룩스(프랑스·209cm)가 이름을 올렸다. 베스트 세터는 토니우티(프랑스·183cm), 베스트 리베로는 그레베니코프(프랑스·188cm)가 각각 수상했다.

매튜 앤더슨과 케빈 레 룩스. 단연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선수다. 한때 V리그 외국인 선수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두 선수는 V리그에서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앤더슨은 V리그에서 시즌 도중에 다른 외국인 선수로 교체되며 퇴출당한 바 있다. 케빈은 올해 5월 실시한 V리그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공개 선발 드래프트)에 참가했지만, 국내 어느 감독도 그를 지명하지 않았다. 결국 낙방했다. 퇴출보다 더 '굴욕'인 셈이다.

앤더슨, V리그 퇴출 이후 세계 최고 선수로 '승승장구'

그러나 두 선수는 V리그에서의 평가가 세계 정상급 선수로 가는 데 결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걸 실력으로 증명했다.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이 1승 14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최하위를 기록한 네이션스 리그에서 당당히 포지션별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됐다. 그것도 남자배구 세계 '빅 4'가 주전 선수를 총동원한 결승 라운드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받은 상이다.

앤더슨은 V리그를 거쳐 간 남녀 외국인 선수를 통틀어 단연 최고의 반전 케이스다. 그는 2008~2009시즌 현대캐피탈의 외국인 선수로 영입돼 V리그에 첫발을 내디뎠다.

첫 시즌에는 득점 부문 5위, 공격성공률 3위, 오픈공격 2위, 서브 3위로 준수한 활약을 했다. 팀도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 우승이 목표인 현대캐피탈 입장에서는 챔피언결정전에서 삼성화재에 패해 왕좌 등극이 좌절됐다.

문제는 다음 해인 2009~2010시즌이었다. 현대캐피탈의 부진이 계속되자 당시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은 시즌 도중에 앤더슨을 쿠바 출신의 노장 선수인 에르난데스(당시 40세·198cm)로 전격 교체를 단행했다. 사실상 퇴출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캐피탈은 극약 처방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삼성화재의 벽에 막혀 챔피언결정전 우승이 물거품됐다.

앤더슨 소속팀, 4년 연속 '트레블' 달성... '독보적' 세계 최고 클럽

시즌 도중 퇴출된 앤더슨은 해외 리그에서 놀라운 반전을 이뤄냈다. 다음 해인 2010~2011시즌에 세계 정상급 리그인 이탈리아 1부 리그에서 맹활약하며 도약을 시작했다. 2012~3013시즌에는 러시아 1부 리그 최강 팀인 제니트 카잔에 영입되면서 배구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앤더슨은 제니트 카잔에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엄청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제니트 카잔이 러시아 리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통틀어 '독보적 최강 팀'이 됐기 때문이다. 제니트 카잔은 2014~2015시즌부터 2017~2018시즌까지 4시즌 연속 러시아 리그, 러시아컵,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3관왕)을 달성했다.

제니트 카잔이 4년 연속 트레블을 달성한 것은 쿠바 출신의 세계 최고 레프트 공격수인 월프레도 레온(26세·201cm), 러시아 라이트 주 공격수인 미하일로프(30세·202cm), 수비력도 갖춰 레프트와 라이트가 모두 가능한 앤더슨(32세·205cm)으로 이어지는 세계 최강의 공격 '삼각편대' 덕분이다.

앤더슨은 미국 국가대표팀에서도 주 공격수로서 눈부신 활약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 올림픽 5위에 이어, 리우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4년 월드리그에서는 미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올해 네이션스 리그에서도 3위를 차지했다. 물론 미국 대표팀에 뛰어난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앤더슨은 팀의 중심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프랑스 '붙박이 주전 센터'... V리그에선 '퇴출과 낙방'

케빈은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주전 센터다. 그는 지난 2014~2015시즌에 현대캐피탈의 대체 외국인 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 당시 아가메즈가 부상으로 부진하자 교체를 단행하면서 시즌 도중에 영입된 것이다. 또한 원래 포지션인 센터가 아니라, 라이트 공격수로 뛰었다. 그러나 현대캐피탈은 정규리그 5위에 그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조차 실패했다.

현대캐피탈은 2015~2016시즌을 준비하면서 당시 선수였던 최태웅 감독을 파격적으로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오레올 카메호를 새로운 외국인 선수로 영입하면서 케빈은 V리그와 인연이 종료됐다.

V리그에서 재계약을 하지 못한 외국인 선수는 선수 본인이나 구단 입장에서도 실패작으로 평가받기 일쑤다.

그러나 케빈은 다음 해인 2015~2016시즌 터키 리그로 건너가 눈부신 할약을 했다. 소속 팀인 할크방크가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을 모두 제패하는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센터임에도 득점 부분 전체 2위를 기록했다.

V리그 몰빵 배구 시스템... 제2 앤더슨·케빈 계속된다

케빈은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도 붙박이 주전 센터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2015년 월드리그와 유럽선수권에서 프랑스가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가 세계 남자배구 '빅 4'로 우뚝 선 데는 은가페(28세·194cm) 등 다른 선수들도 뛰어났지만, 케빈도 중앙에서 톡톡히 일익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케빈은 올해 또다시 V리그에서 굴욕을 맞봐야 했다. 지난 5월에 실시한 남자배구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어느 구단도 그를 지명하지 않았다. 대부분 기존 외국인 선수와 재계약을 선택하면서 V리그 출입문이 좁아진 영향도 있었다.

케빈의 포지션이 센터라는 점도 큰 요인이었다. 외국인 선수가 매경기마다 높은 득점을 올려야 하는 V리그 풍토에서 주 공격수가 아닌 센터는 국내 프로팀 감독의 선호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일부 변화를 시도하는 팀도 있지만, V리그는 여전히 세계 배구 흐름과 동떨어진 '몰빵 배구'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 구단과 감독들이 팀 운영 전략을 의지를 가지고 변화시키지 않는 한 제2, 제3의 앤더슨과 케빈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국내 선수도 마찬가지이다. 제2의 김연경은 고사하고, 국제경쟁력 추락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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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V리그 외국인 김연경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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