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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청사를 떠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청사를 떠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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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벌인 일명 '사법농단' 사태는 단순히 상고법원을 무리하게 추진한 수뇌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당한 지시를 적극적으로 이행한 '협조자들'이 있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최근 이들 대부분을 내부 징계 절차에 넘겼다. 곧 검찰 수사 대상에도 오를 전망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며 검찰 수사에 대비 중인 걸로 알려졌다.

세 차례 걸친 사법부 자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적극적 협조자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행정처 떠난 후에도 아이디어 제안... '일방 지시' 아니었다

2015년 2월 26일, 법원행정처를 막 떠난 정다주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현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당시 기획조정실장)에게 이메일 한통을 보냈다. 아내 김아무개 판사 아이디를 빌려 여성 법관들의 익명 커뮤니티(이사야)에 올릴 글 초안이었다. 당시 기조실은 이 커뮤니티를 주시하고 있었다. '상고법원' '원세훈 선고' 등 민감한 게시글이 가감없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회원을 가장해 글을 올리는 건 정 판사 아이디어였다. 임 전 차장과 통화에서 이를 제안했고, '알아서 해보라'는 답이 오자 실행에 옮겼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가 저희 게시판 주위를 킁킁거리고 있어요"라며 민감한 글이 언론에 노출될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회원들의 반응을 모아 두 차례 더 보고서를 올렸다.

'자발적 보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7월에는 이번 사태에서 가장 낯 뜨거운 문건으로 꼽히는 '현안 관련 말씀자료'와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를 작성했다. 사법부가 박근혜 정권에게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걸 강조한 문건들이다. 두 문건은 비슷한 시기 기조실 심의관들이 협업해 작성 중이던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방안'이라는 보고서에도 인용된다.

시진국 기획제1심의관(현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부장판사)은 이 같은 심의관들의 보고서를 취합해 임 전 차장에게 전달한다. 임 실장은 이를 토대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라는 문건을 직접 작성했다.

임 전 차장이 작성한 최종본 성격의 이 보고서는 한층 공격적이다. 1차 보고서는 '사법부의 협력 사례로 대통령의 환심을 사겠다'는 정도였다. 이후 기조실 심의관들의 보고서가 취합 되고 임 정 차장의 손을 거친 후에는 '상고법원이 좌절되면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는 '압박 방안'까지 포함됐다. 최종본이 나오기까지 검토 보고서 분량은 1차 7쪽 → 2차 37쪽 → 3차 14쪽으로 변화한다. 기조실 심의관들이 일종의 '집단 지성'을 발휘한 것이다.

거짓 진술, 무단 삭제... 진실 은폐에도 협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법원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법원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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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조자들은 진실 은폐에도 적극적이었다. 행정처를 떠나서까지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던 정다주 판사는 사법부 자체 조사에서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공용컴퓨터 속 '2014년 정다주' 폴더의 하위 폴더인 '기조실'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이 발견됐지만 작성 사실을 부인했다. 관련 문건이 쏟아져 나온 3차 조사에서야 자신이 작성했다고 시인했다.

기조실에 재직하며 차성안 판사 뒷조사 문건 등을 작성한 김민수 심의관(현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부장판사)은 공용컴퓨터에서 파일 2만4500개를 무단 삭제했다. 법원행정처를 떠나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첫 출근하는 날 새벽이었다. 삭제 시점까지 고려하면 이런 행동은 더욱 석연치 않다. '기조실에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사표를 냈던 이탄희 판사가 행정처 만류 끝에 법원으로 복귀하기로 최종 결정된 때였다.

사법연수원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통합진보당 관련 사건의 심증을 확인한 심경 사법지원총괄심의관(현 변호사)은 통화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조사단은 이를 지시한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통화 상대방인 방창현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현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의 진술을 종합했을 때 심 총괄심의관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봤다.

아이디어 차원이었다? 비겁한 변명

KTX해고승무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5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구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다.
 KTX해고승무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5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구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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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조자들은 기조실 법관들만이 아니다. '법관 뒷조사 문건'은 인사총괄심의관실이 생산했다. 2016년 3월 임 차장이 김연학 인사총괄심의관(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에게 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대응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게 시작이었다.

노재호 인사제1심의관(현 서울고등법원 판사)과 방태경 인사제2심의관(현 서울서부지방법원 판사)은 핵심회원에게 해외연수 기회 등에서 불이익을 부과하는 방안을 담아 보고했다. 회원들을 '최초 주도' '후속 가입' '동조그룹'으로 분류한 '명단'까지 첨부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단죄한 사법부에도 이런 문건이 존재한다는 건 충격이었다. 작성자들 역시 부적절한 행위임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래도 인사부서에서 작성하는 보고서이니 인사 관련된 부분이 일부라도 기재돼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재했다"고 진술했다. 김연학 총괄심의관 역시 "단순 아이디어 차원"이었다며 실행 여부에서는 발을 뺐다. 그러나 반헌법적 발상을 공문서에 기재하고 공유한 일은 그런 말로 면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인사불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왜 하필 인사부서를 특정해 일을 맡긴걸까. 여기에 대한 해명은 궁색하다. 임 전 차장은 3차 조사에서 당시 "법관 정기 인사 업무가 완료돼 인사총괄심의관실에 시간상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작성자인 노 심의관 또한 같은 취지로 진술했다.

실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문건에 언급된 판사들의 선발성 인사와 해외 연수 지원 이력을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3차 조사단은 '인사 기밀'이라는 이유로 자료 제공을 거부당했다. 이 부분은 검찰이 가려야 할 영역으로 남았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관련자 하드디스크 이미징(복사) 작업을 진행 중이다. 동시에 대법원으로부터 먼저 넘겨받은 사법농단 문건 410개를 검토하며 여기에 언급된 현직 판사, 변호사 단체 등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검찰의 자료 분석이 끝나면 문건을 작성한 '협조자'들이 첫 번째 소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태그:#사법농단, #양승태,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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