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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의 계절이 왔다. 어렸을 땐 복숭아 맛을 잘 몰랐다. 포도나 수박만큼 달지도 않고 딸기나 귤처럼 확실한 향이 내겐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단단하고 아삭거리는 복숭아는 먹을 만했다. 하지만 팔꿈치까지 과즙이 줄줄 흐르는 말캉하고 흐물흐물한 복숭아는 먹고 나서 손과 얼굴을 씻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먹기 전부터 시큰둥했다. 물론 먹기 좋게 잘라 먹으면 좋았겠지만, 복숭아는 으레 한 손에 한 개씩 쥐고 먹었다.

그렇게 먹다보면 꼭 마주치는 게 있다. 복숭아에는 왜 그리 벌레가 많은지, 한껏 베어 물었다가 씨앗 주위에서 하얗고 통통한 애벌레가 삐죽 고개 내미는 걸 볼 때면 정말 기분이 별로였다. 때론 애벌레 몸통의 절반이 이미 내 입 안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복숭아는 원래 밤에 먹는 과일이야. 안 보이니까 그냥 모르고 먹게 되거든. 옛날부터 여름 나려면 벌레 한 바가지는 먹는 거랬어. 괜찮아."

옆에서 엄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엄마가 괜찮다니 나도 그러려니 하고 먹었지만 영 꺼림칙했다.

 복숭아통조림
 복숭아통조림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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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복숭아를 좋아하게 된 건 스무 살 넘은 대학시절, 어느 사건이 있고 난 이후부터다. 학과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나는 수업이 끝난 후 친한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웃고 떠드는 재미로 학교에 다녔다. 다들 가진 게 없으니 안주는 싸고 양 많은 게 최고. 그래야 막차 시간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 그날도 학교 앞 술집에서 고만고만한 안주를 시켜놓고 질펀한 수다를 한 판 떨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친구가 옆자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둘이 싸웠나? 안주도 안 먹고 나가네." 옆을 돌아보니 사람 없는 테이블에 노란 복숭아 통조림이 가득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뭐야, 간 거야?"
"그런가 봐. 남자애 둘이 술 마시다가 한 사람이 나갔는데, 지금 보니 나머지 한 명도 없네."

의자에 옷이나 가방 같은 짐도 남겨 둔 게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다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있었고 안주는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을 보인 터였다. 옆자리 복숭아가 반짝반짝 빛나듯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깝다. 우리나 주지." 친구의 한 마디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가져올까?" 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덥석 접시를 집어 우리 테이블로 가져왔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친구들에게 "깨끗해, 아~주 깨끗해. 먹자~"라고 말했다. 나의 객기에 친구들도 용기(?)가 났는지, 젓가락 네 쌍이 쏟아지듯 복숭아에 꽂혔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황도가 그날따라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우리는 증거를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순식간에 접시를 싹 비웠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친구가 몸을 숙이고 내 귀에 속삭였다. "야, 어떡해. 옆자리 애들 다시 왔어." 우리는 고개도 못 돌린 채 그들의 반응을 살피려 귀를 열 배는 크게 만들었다.

"사장님, 여기 아까 시킨 황도 아직 안 나왔어요?"
"아니, 갖다 놨는데..."

사장과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우리 테이블로 향했다. 사장은 단 번에 알았다. 우리 앞의 빈 접시가 바로 그 황도 접시라는 걸. 상황을 파악한 그는 어찌해야할지 몰라 당황한 초보 술꾼들 사이에서 보란 듯 노련하게 말했다. "아, 저 테이블이랑 착각했나보다. 얼른 다시 내 드릴게." 얼김에, 우리는 황도를 주문한 당당한 손님이 됐다.

그들은 안주를 시켜놓고 잠시 가게를 나갔다 들어온 거였다. 담배를 피웠을 수도 있고 통화를 했을 수도 있다. 그새를 못 참고 남의 안주에 손을 댄 게 너무나 창피했다. 사장의 배려 덕분에 옆 테이블과 얼굴 붉힐 일은 겨우 모면했지만 민망함은 나의 몫이었다. 가뜩이나 술로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움에 더욱 화끈거렸다. 다른 곳으로 자릴 옮겨야 하나, 아까보다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이야길 하고 있었다. 그때, 사장이 맥주 피처와 뜨끈뜨끈한 감자튀김을 양손에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 우리 안 시켰는데요?"
"옆 테이블에서 보냈어요. 아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장은 우리를 향해 눈을 찡끗 감아보였다. 우리는, 아 그쯤이야 괜찮다는 듯, 그들에게 너그러운 눈인사를 보냈다. 술자린 다시 이어졌다. 잠시 후 그들이 우리 테이블로 왔다. 그날 막차시간은 다른 날보다 훨씬 빨리 왔던 것 같다. 한동안 우리는 그 술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물론 옆 테이블의 그들과 함께. 그리고 나는 복숭아를 좋아하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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