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지난 일이 떠오르는 날이면, 수현은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잠에 들어야 한다.
 지난 일이 떠오르는 날이면, 수현은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잠에 들어야 한다.
ⓒ 이정진

관련사진보기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이전 기사]
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날 성추행한 선배가 말했다
② 성추행 당한 여성 교수는 왜 대학을 나와야 했나

'어두운 방'은 그녀의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몇 년이 지나도, 수연은 어둠으로 가득 찬 과실이 종종 떠오른다.

2013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쯤이었다. 수연(가명, 당시 21살)은 친한 동기 몇 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 다녔던 그녀는 동기들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

당시 가족 문제로 힘들었던 수연은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진 수연을 달래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그녀의 절친한 남자 동기 정훈(가명, 당시 21살)이었다. 정훈은 늦었다며 친구들을 먼저 집에 보냈다. 술에 많이 취한 수연을 자기가 보살피겠다고 했다.

정훈은 그녀를 과실로 데려갔다. 수연은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기숙사와 과실은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기숙사에 사는 자신을 왜 과실로 데려가는지 몰랐지만, 그녀는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그가 타야 하는 대중교통의 막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자신을 과실에 두고 갈 줄 알았지만, 정훈은 집에 가지 않았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던 수연은 과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비몽사몽 간에, 정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편하지 않아? 편하게 바지 좀 벗고 있어."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수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때는 정훈이 한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기절하듯 잠들었던 수연은 이상한 기운에 눈을 떴다. 덩치가 산만 한 정훈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이미 정훈은 수연의 바지를 벗기고 윗옷 안에 손을 넣고 있었다. 과실에는 수연과 정훈, 둘뿐이었다.

무서웠다. 이미 자신의 옷은 반 이상 벗겨진 상태였다. 수연은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당시 수연과 정훈은 친한 친구 사이였을 뿐이었다. 수연은 남자친구가 있었고, 정훈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고 수연에게 털어놓았었다.

'내가 여기서 깨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순간, 조잘조잘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과실 문이 열렸다.

정훈은 잽싸게 자신의 과점퍼로 수연의 하반신을 가렸다. 여자, 남자 후배 무리가 들어왔다. 정훈은 수연이 자고 있으니 나가라고 후배들에게 말했다. 후배들이 나간 후, 정훈은 수연의 옷을 대충 추스르고 옆 소파에 앉아 잠들었다.

"기억하지 말자, 말자, 말자..."

완전히 잠에서 깬 새벽 어스름, 그녀는 정훈 몰래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 안에 들어와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잘못이야, 내가 왜 술을 먹었지? 내가 왜 취해서 잠들었지?'

수연은 자책했다. 술을 많이 먹은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어젯밤 일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정훈을 계속해서 학교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내일 아침 수업에서도 그를 마주해야 했다. 신고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의 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고민 끝에 수연은 먼저 정훈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믿었다.

다음날, 수업이 시작되기 5분 전에 정훈이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연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 틈을 타 정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훈 : "어제 기억나?"
수연 : "너는?"
정훈 : "어제 너 엄청나게 취했었어. 취해서 과실 소파에서 뻗어서 잤잖아."
수연 : "너는?"
정훈 : "난 옆에 소파에서 잤잖아."

정훈은 아무렇지 않게 수연을 대했다.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수연의 머릿속을 채웠다.

'지금 내가 어제 일을 기억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정훈을 보니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기억을 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되겠다. 기억하지 말자, 말자, 말자.'

수연은 끊임없이 그날의 일을 잊으려 노력했다.


성폭력 사건 당시에는 사건마다 피해자의 상태가 다르다. 사건 직후 많은 피해자들은 마치 몸과 마음이 마비된 듯 느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돈스러워 한다. 어떤 피해자는 극심한 심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성폭행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한다. - 김미리혜, 성폭력의 심리적 후유증, 정신건강정책 포럼5, 2011, 12, p41

 피해자 수연의 2018년 4월 16일 인터뷰 사진
 피해자 수연의 2018년 4월 16일 인터뷰 사진
ⓒ 이정진

관련사진보기


'순결 이데올로기'는 피해자를 옭아맸다

하지만 수연은 쉽게 잊어버리지 못했다.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사귀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그녀는 매일 이불을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자신의 몸을 만진 정훈이 다른 곳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두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정훈을 묶어두고 싶었다.

수연은 정훈을 피해 다녔다. 그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해도 과제를 핑계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정훈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수연의 힘든 가정사를 다 알 정도로 절친했던 정훈은 그녀가 힘들 때마다 위로해줬다.

어느 날, 정훈이 수연에게 고백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수연은 혼란에 빠졌다. 자포자기의 심정과 자기 합리화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내가 얘를 좋아하면, 얘랑 사귀면, 성추행을 당한 건 아니지 않나?'

"진짜 부끄러운데.. 제가 (당시에) 되게 순수했어요. 내 몸을 본 남자랑은 사귀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야 내가 더럽지 않고, 나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는 너무 부끄러워서 친구들한테도 말 못 해요." 2018년 4월 16일 피해자 인터뷰 中

21살이었던 수연에겐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있었다. 지금도 수연은 가장 후회스러운 선택으로 가해자와 연인이었던 순간을 회고한다.

정훈의 고백을 받아준 후, 수연은 어차피 사귀기로 마음먹었으니 그의 성추행을 잊어버리자고 되뇌었다. 그날의 기억을 하게 되면, 정훈과 사귄 자신의 선택 또한 이상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훈과 사귀는 중에도 가끔씩 그날 일들이 떠올랐다. 남자친구가 된 정훈이 밖에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 두려웠다.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면 어떡하지?'

수연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굳힌 날, 수연은 그 날의 기억을 토로했다.

"나 사실 그날 일 다 기억해"

정훈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수연이 기억하지 못했을 거로 생각한 정훈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추행을 신고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모른 척했지만 정훈도 다 알고 있었다.

피해자는 치유되지 못했다

수연은 고민 끝에 학교에서 운영하는 상담센터를 찾아갔다. 일단 자신이 살아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담사 : "어떤 것 때문에 오셨어요?"
수연 :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았어요."


'힘들어요.' 수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동기가 제 옷을 벗기고 몸을 만졌어요'라는 말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사건 이후 수연은 쫓기듯 졸업을 마쳤다. 그동안 준비 중이던 임용고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1년을 쉬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순간들을 지우는 게 우선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16년이 돼서야 수연은 조금씩 평범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가해자와 완벽하게 떨어져 지낼 수 있다는 점에 심리적인 안정을 찾았다.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을 이유도, 그의 얼굴을 봐야 하는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5년 전 사건은 너무나 쉽게 되살아났다. 종종 모이는 동기들은 전말을 모르고 정훈의 이름을 꺼냈다.

"정훈이 걘 요즘 뭐해?"

그런 날이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려고 불을 끄면 깜깜한 과실이 떠올랐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정훈이 자신을 만졌던 순서까지 기억났다. 그때마다 수연은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잠에 든다.

 수연이 즐겨드는 가방 사진. 가방에는 "IF NOT ME, WHO? IF NOT NOW, WHEN?"이 적혀있다.
 수연이 즐겨드는 가방 사진. 가방에는 "IF NOT ME, WHO? IF NOT NOW, WHEN?"이 적혀있다.
ⓒ 이정진

관련사진보기


수많은 대학 성폭력이 증발해버린다

대학 내 성폭력의 상당수는 묻힌다.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 저지르고, 가벼운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고발하기도 어렵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학과 내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성폭력 가해자는 친구 39.1%, 선배 22.3%, 교수·강사 8.2% 순으로 나타났다. 이 중 성희롱에 대해 42.1%가 그냥 넘어간다고 답했고 10.8%만이 전문상담기관에 의논한다고 답했다.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유로는 피해사실 노출이 싫어서가 26.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 교육부 2015년 '대학생의 성 인식 및 성폭력 실태조사'

대학 생활은 씨족사회나 마찬가지다. 서로의 얼굴을 알고 매일 마주치며 인사를 나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멀리하기 쉽지 않다. 자신의 고백으로 인해 친밀한 관계가 분열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대신 피해자는 '선배니까', '친구니까', '실수였으니까' 등의 이유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참고 넘어간다.


슈워츠의 이론에 따르면 대학교는 '준비된 가해자-보호 장치 부재-적절한 피해자' 공식이 적용되는 공간이다. 성폭력을 지지하는 감수성, 대학의 빈약한 조치, 피해자의 자책감이 '강간을 지지하는 문화'를 만든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대학은 성폭력에 취약한 공간이다. - 나윤경, 노주희, 대학 내 성폭력 가해자 연구, 여성학논집, 2013, p7

이제 수연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안다. 더는 자책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당당하고 가해자가 부끄러워하는 사회를 꿈꿔요. 미투 운동이 조금만 더 일찍 시작됐다면, 저도 고발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수연에게 미투 운동의 의미는 남다르다.

"지목당하지 않은 가해자들도 평생 미투 운동을 두려워하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33 4화 연재 기사로 올라간 바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건국대학생. 정의로운 사회를 꿈 꿉니다. 더보기

시민기자 가입하기

© 2018 OhmyNews오탈자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