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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용 글쓰기는 어떤 효능이 있을까?
▲ 글쓰기의 효능 시험용 글쓰기는 어떤 효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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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용 글쓰기는 어떤 효능이 있을까

글쓰기의 여러 유형 중에서, '논술'이라는 것이 있다. 출제자가 '논제'라는 형태로 무엇인가를 응시자에게 묻고, 응시자는 그 요구사항에 맞춰 자기 나름대로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글쓰기다. 쉽게 말하면 시험용 글쓰기다.

프랑스에서는 바칼로레아, 독일에서는 아비투어라고 불리는 대입 시험이 가장 대표적인 글쓰기 시험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대입과 편입 시험의 한 유형으로 '논술'이 존재한다. PD나 기자를 선발하는 속칭 언론 고시에도 논술 형태의 글쓰기 시험이 일부 있다.

이제는 누구나 '논술'이라는 두 글자만 봐도 '사교육의 주범'이라는 개념이 프레이밍 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논술 시험은 속칭 '모두 까기 인형'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논술 시험 자체의 본질적인 기능만큼은 긍정하는 편이다.

논술식의 글쓰기 시험은 다소 강제적인 상황 하에, 응시자가 출제자의 질문에 의무적으로 답해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출제자가 지적으로 매우 정직한 사람이고 문제 또한 유의미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면, 글쓴이 본인의 생각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은 당해 연도의 바칼로레아 논제가 미디어에 발표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논제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나눈다. 그만큼 바칼로레아의 문제가 사회 구성원들의 공론거리로서 가치가 있다는 뜻일 테다.

사실 대입 제도에 대한 국민감정상 논술 시험이 꽤 저평가된 측면이 있어서 그렇지, 우리나라 대입·편입 논술 문제들 중에서도 몇몇 대학들의 그것은 내가 보기에 꽤 지적으로 수준이 높은 편이다(물론 그렇지 못한 대학들이 과반인 것도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올바름을 생각할 때 빠질 수 있는 늪

예를 들어 대입·편입 논술 및 언론 고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서 '실업급여 문제'가 있다. 아마 이 글을 보던 사람 중에는 코웃음을 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실업급여 문제가 뭐가 어렵다고. 시사나 이슈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어도 누구나 알 법한 쟁점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논제가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참고로 이 논제는 대학교나 취직 시험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문제제기 양식(format)이다.

"A국은 실업자들에게 최소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실업급여를 보장한다. 또한 실업급여를 받은 자들에게는 수급 이후부터 1년 간 직업훈련도 실시하며, 실업자들을 채용하는 고용주에게는 소정의 보조금을 지급해주기도 한다. A국이 실시하는 실업급여 정책의 한계를 논하고, 개선책을 서술하시오."

실제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이 논제를 풀게 하면 대다수는 당황한다. 왜냐하면 실업급여라는 것은 직업 경쟁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구제하는 제도이고 따라서 그 취지가 매우 훌륭한데, 논제는 이에 대해 '비판' 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논제의 실업급여 정책은 실업자들의 재취업을 위해 직업훈련이나 보조금 등의 유인동기까지 마련하고 있다. 누가 봐도 선량해 보이는 이 제도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까야'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두고 '마냥 좋아 보이는 것들에 독이 서려있을 때'라고 부른다. 글쓰기 시험에서 출제자들이 즐겨 쓰는 트릭이고, 앞서 말했듯이 글쓰기 시험이 응시자의 지적 스펙트럼을 측정하는 기준이라 여길 만한 이유다.

이러한 유형의 문제는 흔히 사람들이 올바른 가치를 추구할 때 자칫 그 방향성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올바름의 사각지대'를 어떻게 용케 피할 수 있는지 응시자가 멋있게 제시해주기를 출제자는 요청한다.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만일까?
▲ 실업/실직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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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따져보는 연습

조금 매정하지만 잠깐 '팩트 폭력'을 해보자. 실업은 사회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일부는 개인의 탓이라고 볼 수 있는 실업 문제에, 전 국민이 십시일반 한 공적자금 즉 세금을 투입한다는 것이 마냥 100% 공정한 일일까. 이는 어쩌면 유능하거나 성실한 이들, 아니면 적어도 정상범주 이상의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 손해를 야기하는 국가행위다.

더하여 이러한 문제도 있다. 만약 심각한 상해를 입거나 불구가 되어서 실업을 한 자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다시 직업훈련을 받기도 곤란하고, 재취업될 가능성도 높지 않다(단지 한정된 기간만큼 실업급여만 수령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적인 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되는 실업급여의 유인동기 정책들이 정작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약자·소수자들을 소외시키는 꼴이다.

마지막으로 사고의 틀을 조금 더 확장해보자. 혹시 실업급여를 받는 '맛'에 길들여져 실업과 취업을 밥 먹듯 반복하는 이들이 양산된다면 이러한 무임승차자들은 또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노동 의욕을 높이려던 실업급여 정책이 역설적으로 구성원들의 근로 욕구를 하향평준화하는 모순 현상이 발생할 여지도 많다.

오해하지 말자. 실업급여는 분명 현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제도로서 바람직한 경제 정책이다. 나 역시도 이에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듯이, 실업급여와 관련되었다고 해서 그 자금을 운용하는 방식이 모두 선하다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제도를 창설한 취지가 바람직해도 그 제도가 항상 취지에 맞는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실업급여를 들었지만, 이렇듯 글쓰기 시험 중에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충만한 논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사각지대를 경계하도록 만들어준다. 살다보면 얼핏 보기에는 마냥 좋은 것 같고, 훌륭한 것 같은 일들이 많다. 그러나 요모조모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것들 안에서도 그늘이 있을 수 있고, 부작용이 우려되는 구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18학년도 연세대 대입 수시
▲ 현행 대입 논술 문제 '18학년도 연세대 대입 수시
ⓒ 연세대학교 입학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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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을 적시하게 만드는 글 교육도 있어야

난 글쓰기의 효능을 믿는다. 그리고 글쓰기의 장르마다 각각 다른 효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가끔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글쓰기의 장르를 조금 편애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특히 요즘에는 시대 분위기상 워낙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보니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말만 골라 담은 감성 글들이 인기가 좋은 것 같다. 읽은 후에 가슴이 훈훈해져서 살맛나는 글들 말이다.

물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마따나 타인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글들도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음식도 편식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듯이, 글쓰기 장르도 편애하면 사고의 균형 감각이 무너진다. 밝고 따뜻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춥고 음습한 곳도 있다. 세상만사의 이치가 그렇다. 그래서 아프지만 현실을 알려주는 글쓰기도 있어야 한다. 픽션이나 부드러운 논픽션만큼, 냉철하고 냉엄한 논픽션도 존중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물론 현행 중등 교육의 수준과 괴리되는 글쓰기 입시는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어차피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되면 좋든 싫든 세상살이의 '팩력성'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레포트‧논문‧취업자소서‧작문‧논술 등등 감성보다는 현실 논리를 요구하는 글쓰기 시험들까지 꾸역꾸역 기적적으로 해치워내야 한다.

이처럼 인간사회에 글과 말이 존재하는 한 논리적인 글쓰기는 피할 수 없을 터,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현행 대입 논술 시험의 난이도는 조금 조정하되 논픽션 종류의 글쓰기 교육을 중등 교과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적시하는 일, 그 또한 글쓰기의 역할 중 하나여야 한다.


태그:#글쓰기시험, #글쓰기, #시험용글쓰기, #논술, #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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