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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라, 제목이 흥미롭다. 세상 모든 것에는 각기 나름의 역사가 있다.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펜은 그것이 어떻게 변화발전하며 오늘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역사가 있고, 그 펜으로 글을 쓰고 있는 종이에도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추상적 개념이긴 하지만 '역사'에도 역사가 있지 않을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만나게 된 책이 유시민의 신작 <역사의 역사>이다.

그런데 제대로 낚였다. 제목과 달리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추상적 개념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의 이력을 찾아나서는 내용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이야기하는 문자 텍스트를 역사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인간과 사회의 과거에 대해 문자 텍스트로 서술하는 내용과 방법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제목이 내용을 포괄하지 못하며 다소간 혼란을 불러오는 대목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정확하게는 '역사 서술의 역사'라고 해야겠지만, 편의상 간단하게 '역사의 역사'로 하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과 소설작법이 다르듯이 '역사'와 '역사 서술'은 개념과 포괄성에서 엄연히 다르다. 그런 점에서 제목과 내용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낚인 것 같은 찜찜함도 잠시, 저자 특유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며 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저자는 지난 2500년 동안 수많은 역사가들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경청할만한 견해를 제시했음에도 흔쾌히 동의할 만한 대답이 없었다는 점에서 질문을 바꾸어 보았다고 한다.

즉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람들은 역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로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거나 지금도 대중의 시선을 끌고 있는 역사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2500년 전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부터 이 시대 가장 핫한 역사가인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16명의 역사가와 그들이 남긴 18권의 역사서를 살펴보고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통해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도움 될 실마리를 찾아보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가 문학이라거나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또한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데 있음을 이 역사서들을 읽으며 절감했다고 한다.

저자는 <역사의 역사>를 패키지 여행에 비유한다.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을 들여 중요하고 이름난 공간들을 볼 수 있는 패키지여행처럼 이 책도 그런 점에서는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자유여행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과 깊은 의미는 없을지라도 패키지여행만이 갖는 장점이 있는 것처럼 <역사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패키지여행이 끝난 후 정말 마음에 들었던 곳은 자유여행으로 다시 찾아가고 싶듯이 이 책에 소개된 역사서 중 일부 책들은 깊이 있게 집중해서 읽어보고 싶다. 이미 읽었던 책들이라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것이 저자 유시민의 필력이 아닐까. <역사의 역사>를 덮자마자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꺼내 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썰의 명수, 최초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전원책 변호사(왼쪽)와 유시민 작가. 사진은 2016년 총선 당시 'JTBC 뉴스룸 인사이드' 방송 화면
 전원책 변호사(왼쪽)와 유시민 작가. 사진은 2016년 총선 당시 'JTBC 뉴스룸 인사이드' 방송 화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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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 썰의 명수라면 JTBC의 토크쇼 '썰戰'으로 인증 받은 저자 유시민이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썰의 명수는 헤로도토스였다고 한다. 그리스어 원전 <역사>를 번역한 천병희 교수는 서문에서 헤로도토스를 '최초의 역사가인 동시에 최초의 이야기꾼'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헤로도토스가 최초의 역사가일 수는 있지만 최초의 이야기꾼일 리는 만무하다고 일축한다.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독립한 문명 어디에나 이야기가 있었고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장편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는 실존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호메로스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트로이 전쟁의 역사를 소재로 삼아 갖가지 영웅담을 전승했던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꾼의 집합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주도한 공으로 그리스 세계의 맹주가 된 아테네에서 시민들은 흥미진진한 마라톤 평원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이야기를 기꺼이 돈을 내고 들었으리라고 추측한다.

헤로도토스가 '유료 역사 토크쇼'로 한몫을 잡았을지도 모를 그 이야기를 문자로 쓴 책이 바로 <역사>이다. <역사>에는 강연을 녹취한 듯 구어체 문장이 많다. 하지만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와는 달리 <역사>가 사서(史書)로 인정받는 이유는 헤로도토스가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하려고 분투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는 저잣거리의 한낱 이야기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이야기꾼 가운데 역사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한 문서고 깨기의 달인 랑케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전공하고 기록으로 밥을 먹고 사는 내내 유령처럼 따라붙는 역사가가 있으니 바로 19세기 실증주의 역사가인 레오폴트 랑케다. 랑케는 기록학에 입문하는 순간 만나게 되어 있다. '있었던 그대로의(Wie es eigentlich gewesen) 역사'를 표방하며 사료비판과 문헌고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서는 기록의 보존과 관리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랑케를 '문서고 깨기의 달인'이라 표현한다. '도장 깨기'를 이어가는 무협소설 주인공처럼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국가 권력자들의 호의에 힘입어 랑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큰 특권을 누리며 유럽 주요 도시의 문서보관소 문을 열었고 거기서 찾아낸 문헌 자료를 활용해 유럽의 왕조와 민족과 교회와 교황의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중이 정신생활에 참여하고 지식이 무한 팽창하며 공적 분야에 참여가 활발한 것은 우리의 시대를 특징짓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국민주권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세계사의 경향으로 보는 사람은 괘종이 무엇을 쳤는지 모릅니다. 국민주권을 위한 노력에는 아주 많은 파괴적 경향이 결합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우세를 확보했더라면 문화와 기독교 세계를 위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군주제도 현실의 근거를 다시금 확보하게 됩니다. 군주제는 마치 거대한 홍수처럼 범람하는 파괴적인 원리를 절멸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34쪽)


우리 세기의 지도적 경향이 무엇이냐는 막시밀리안 2세의 질문에 대한 랑케의 대답이다. 랑케는 평생 과거를 들여다보았지만 현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현재를 직시하지 못했기에 미래를 옳게 예측할 수도 없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괘종이 무엇을 쳤는지 알지 못한 사람은 공화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군주정을 옹호한 바로 랑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저자는 랑케가 배울 점도 많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에도 좋은 역사가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역사가는 해부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과학수사대 요원과 법의학자가 시신을 다루는 자세로 역사의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신을 해부해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신의 상태를 보고 사망 원인과 시간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망자의 직업과 생활환경, 생전의 건강 상태와 습관까지 추론해내야 하며, 유류품이 담고 있는 정보를 연결해 그 사람의 인생행로를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랑케는 역사의 사실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도서관 깊은 곳에 잠겨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역사는 사람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관한, 사람이 개인이나 집단으로 이룬 성공과 실패에 얽힌 이야기로 이 주제만큼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은 분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저자는 역사가들이 왜 역사를 썼는지, 무엇의 역사를 서술했는지, 왜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했는지를 알고 싶었다고 한다.

많은 역사서를 살펴본 결과 '사실을 토대로 과거를 이야기하는 문자 텍스트'로서의 역사 그 자체는 '발전'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역사의 연구>가 <사기>보다 더 훌륭한 역사라 할 수 없고, <사피엔스>가 <역사서설>보다 발전한 역사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 책들은 모두 훌륭하고, 다만 서로 다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발전'이라고 하는 몇 가지 역사 서술 환경과 내용과 관점과 방법의 변화는 힘 있는 서사로 구현할 때만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들을 만나 본 소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 이제 패키지 여행을 마치고 자유여행을 떠날 순간이다.

덧붙이는 글 | <역사의 역사>, 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 2018년 6월,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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