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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는 미디어나 생활 속에서 궁금한 성이야기를 프리랜서 성교육 강사 심에스더씨에게 묻고 답하는 연재입니다. [편집자말]
"엄마 우리 반이 요즘 난리가 났어!"
"왜 무슨 일이야?"
"요즘 애들이 서로 고백하느라고."


진이(가명)는 5학년이다. 얼마 전에 급식실에서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고백하는 걸 다 들었다고 하더니, 이게 반에서 유행처럼 번진 모양이다. 고작해야 역할놀이 정도 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고학년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엄마, 그런데 걔(여자아이)가 먼저 고백했어."
"뭐 여자가 먼저 고백하면 안 되나? 엄마도 아빠한테 먼저 고백했어!"
"으, 응? 진짜야?"


 고백 하면, 왜 꼭 이런 장면을 떠올릴까.
 고백 하면, 왜 꼭 이런 장면을 떠올릴까.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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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그 남자'는 소개팅을 하고 애프터가 없었다. 대신 아침마다 문자를 날렸다. 좋은 아침이라는 둥, 좋은 하루 보내라는 둥. 가끔은 드라마 속 명대사도 보내왔다. 뭐 하자는 건가, 그랬다. 

그러길 두달 여. 9월에 처음 만났으니, 11월 중순쯤 되었을까. 문자만 주고 받던 우리가 드디어 만났다. 내 노트북이 고장나서. 내 푸념을 듣던 그 남자가 한번 봐주겠다고 한 거다(우리는 한동네에 살았다).

그렇게 두 달 만에 노트북 때문에 한번 더 보고, 가볍게 '캔커피'를 마신 뒤 헤어졌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만났다. 그러고도 '그 남자'가 "사귀자"는 말을 안 하는 거다. 뭐지? 친구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추측이지만,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나를 재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거다.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내 마음이 '그 남자'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의 말을 기다리고만 있기 답답했다. 이런 밀당이 싫었다. '내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닌데, 누가 먼저 말하면 어때?' 그래서 내가 말했다.

"지금 우리 사이는 뭔 거야? 사귀는 거 안 할 거면, 그냥 그 대학원생 만날 거다."

그랬더니, '그 남자' 하는 말.

"내가 해봐서 아는데, 공대 대학원생 별로야."

그날로 우리는 사귄 지 1일이 됐다. 그리고 2년 후 '그 남자'는 남편이 됐다. 이런 이야길 애들에게 해줬다. 그런데 애들이 놀리기 시작한다. 여자가 먼저 고백했다고! 아니 이게 놀림받을 일인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고백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즐겨봤던 동화, 드라마, 만화 미디어 속에서 대부분 고백은 남자가 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일 수밖에.

- 심샘... 저 좀 억울해요. "엄마, 멋있다"는 말 들을 줄 알았는데...  
"이런 재미난 연애스토리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기자님의 멋진 고백도 '그 남자'의 유치하지만 사랑스러운 대답도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걸요. 그런데도 '여자가 먼저' 고백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 놀림 거리가 되다니 억울하실 만해요. 캬캬. 고백을 받는 쪽이 좀 더 우쭐우쭐한 추억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누가 고백해야 한다는 법칙이나 공식은 없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전설처럼 들려오는 '고백공식'이 있는 거 같아요!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누군가와 연애나 사랑 이야기를 나눌 때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다', '남자가 고백을 해야 그 관계가 오래 간다',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하면 평생 마음 고생한다'와 같은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었던 적 다들 한번쯤 있지 않나요?

- 맞아요. 그래서 속마음과 달리 행동하는 경우도 많죠. 아이들도 은연 중에 깃든 고정된 성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많은 가치관과 고정관념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휙휙 바뀐다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도 여전히 있지요. 말씀하신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어요. 아차, 성역할이라는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 '여자다움', '남자다움' 그런 거 말하는 건 아닌가요?
"네, 맞아요. 성역할이란 '여성'이나 '남성'과 같은 '성별'에 따라 사회 문화적으로 요구되어지고 요구하는 외모, 태도, 행동 등이라고 설명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여성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야 한다, 아이를 꼭 낳아 엄마가 되어야 한다, 앞에 나서서 리더가 되기보다 뒤에서 잘 도와야 한다, 성적인 욕구를 너무 드러내면 안 된다' 등을, 남성에게는 '말을 적게 하고 과묵해야 한다',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경제를 다 책임져야 한다', '힘쓰는 일은 모두 남성이 해야한다' 등 같은 거죠.

이런 고정관념은 알게 모르게 말과 행동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전달되고 때로는 강요되기도 해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 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모습'인지 알 수 있답니다.

여성도 다른 사람을 무뚝뚝하게 대할 수 있고, 자신이 가진 성적인 욕구를 드러낼 수 있고, 남성도 슬프면 울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힘과 의지에 따라 무거운 걸 들지 못할 수 있어요. 이렇게 모습, 성격, 감정, 할 수 있는 일 등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얼마든지 먼저 좋아하고 고백할 수 있어요. 있어야 하구요. 이런 부분을 성별에 따라 결정하고 고정시켜 놓은 후 거기에서 벗어나면 '여성스럽지 못하고 남성답지 못하다', '여자행동, 남자행동' 등의 말로 평가하고 구분한다면 나답게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울 거 같아요.

특히 어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고정관념에 빨리 노출되고 가감없이 흡수하기 때문에 자기 성별에 따른 고정된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기 쉬워요. 즉 우리 어른들의 노력이 정말정말 필요한 부분이죠."

 이런 모습은 너무 흔하다.
 이런 모습은 너무 흔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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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하시면서 경험한 것들 중에 이런 고정된 성역할 사례는 없었나요?
"마침 기자님 이야기와 딱 맞는 사례가 있었어요. 얼마 전 청소년들과 연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여자친구 엄마가 기자님처럼 아빠에게 멋지게 고백을 해서 결혼까지 하게 되셨다고 해요. 그런데 엄마가 고백을 먼저 해서 그런지 아빠가 엄마를 쉽게 생각하고 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평소 서운함이 많이 쌓인 엄마가 그 여자친구(딸)에게 '너는 절대 남자에게 먼저 고백하지 말고, 고백 받으면 연애해라'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물었어요. 그 여자친구는 '누가 고백하느냐가 중요한 거 같지 않다고 생각은 하는데, 여자인 자기가 먼저 고백하면 엄마처럼 속상한 일이 많이 생길 거 같아 솔직히 두렵다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친구가 장난스레 "진짜 남자라면 먼저 고백해야죠"라고 말까지 해서, 한바탕 웃으면서 정리됐지만... 여성은 꼭 수동적으로 고백을 받아야만 하고, 남성은 능동적으로 고백을 해야만 정상적이고 안전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마음이 복잡했어요.

제가 청소년 대상으로 강의할 때 종종 이상형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기도 하는데요. 남자친구들은 이상형으로 '주변 어른들께 잘하고 말투가 부드러운 여자', '남자에게 힘이 되어 주는 여자', '얼굴과 몸매 관리를 잘 하는 여자', '주변에 남자가 많지 않은 여자' 등을 꼽았어요. 여자친구들은 '허세 부리지 않고 말이 통하는 남자', '나만 바라보는 성실한 남자', '능력 있는 남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 등을 가장 많이 이야기 했어요."

- 아, 세상에...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듣고 싶었던 이상형 이야기는 하나도 없네요!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좀 우울하네요.   
"남자친구들과 여자친구들의 이상형이 참 다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두 쪽 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특히 남자 친구들이 여자 친구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단호하고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기자님 말대로 우리 윗세대나 우리 때와 비교해 본다면 어떤가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 않나요? 지금 2018년을 사는 10대 청소년들이 가지는 연애 고민과 추구하는 이상형들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온 고정관념의 결과물은 아닌지 고민해 보면 좋겠어요."

- 부모들이 특히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들에 아이들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데도 많은 영향을 받아요. 아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사회가 가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실수없이 완벽하기는 어렵지만 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거창하게 말고 작더라도 해볼 만한 것부터 시작해봐요.

가령, 우리가 하는 말에서 '여자 애가 왜, 남자 애가 왜-'와 같은 표현을 빼 보는 건 어떨까요? 또 행동이나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남자니까 이렇게 해야 하고, 여자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등 성별을 기준으로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내 아이의 성향, 스타일, 개성에 따라 조언을 하거나 같이 의논하는 열린 태도를 가지고 계속해서 시도해 본다면 참 좋을 거 같아요."

- 저도 가끔 "여자 애가 왜 이렇게 씻기 싫어하니?"라는 말을 하는데, 의도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을 때가 있어요. 
"저도 그래요. 사실 씻기 귀찮은 게 남자, 여자 문제는 아니잖아요. ^^ 사실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타인과 스스로가 정해놓은 기준 속에서 나답게 살기 어려울 때가 많잖아요. 수많은 고정관념이 있다지만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고백을 먼저 해야만 하고 고백을 받아야만 하는 이런 부자연스럽고 답답한 '연애공식'부터 바꿔나가 보자구요.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편견없이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을 긍정할 수 있도록요. 누가 먼저 말하든 마음을 나눈다는 건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서로가 공유하는 일이니까요. 아, 말하다 보니 연애하고 싶다."

- 어머, 심샘... 어느 방송에서 썸타는 남녀가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까?" 해서 제 마음도 설렜는데... 저만 연애하고 싶은 마음 드는 게 아니었네요. ^^ 샘... 그냥 우리 당장 만나요. ㅠ.ㅠ
"그럴까요? 으핫핫. 사랑과 고백과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 타파까지, 오늘도 많은 이야기를 했네요. 우리가 여자라서 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그 자체로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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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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