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0년을 통틀어 요즘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간다. 가뜩이나 가릴 것 없는 먹성이 무슨 이유에선지 지난겨울부터 갑자기 더 좋아져 눈만 뜨면 먹을 걸 찾아 두리번거린다. 덕분에 작년 이맘때보다 3킬로그램이 늘었다.

작고 말랐던 몸집에 이만큼 살이 쪘으면 티 나지 않을 리 없건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살 좀 쪄라"라거나 심지어 "점점 더 마르는 것 같다"는 이야길 한다. 상대의 외모를 이토록 쉽게 지적하고 조언까지 덧붙이는 오지랖에 대한 불편함은 잠시 뒤로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내 살은 왜 하필 배 쪽에만 우선 배치되느냐는 것이다.

늘어난 3킬로그램이 새로 생긴 뼈나 내장일 리는 없고 대부분 지방과 약간의 근육일 텐데, 이 중 500그램 정도만이라도 양쪽 볼에 붙었다면 사람들은 내 몸무게가 늘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볼은 홀쭉하고 배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왜 이러는 걸까. 흔한 말로, 나이 때문일까?

물론 나이도 영향이 있다. 나도 20대엔 볼이 꽤 통통했다. 내 몸에서 아직 성장호르몬이 웬만큼 분비되던 때였다. 성장호르몬은 지방을 팔다리에 고루 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성장호르몬은 20대부터 서서히 분비량이 감소하기 시작해 60대가 되면 20대의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뱃살이 느는 이유다.

하지만 아직 '왜 하필 배인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배에 지방이 몰리는 이유는 진화와 관련이 있다. 내 몸 안에 빙하기에 적응하도록 진화한 인류의 유전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유전 때문이다

아마 먼 미래 인류의 체형은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팔다리는 더욱 길어질 것이다.
 아마 먼 미래 인류의 체형은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팔다리는 더욱 길어질 것이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살았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자면 인류는 크기가 어중간하고 사냥에 유리한 뾰족한 이빨이나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 상대를 제압하거나 폭발적인 힘을 낼만한 근육과 순발력도 부족하다. 아무리 봐도 신체적으론 영 무능한 편이다. 나약한 인류가 빠르게 도망가는 동물을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그 동물이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날며칠이고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운 지역에서 이렇게 오래 달렸다간 탈진해 죽기 십상이다. 특히 몸이 털로 덮여 있다면 온종일 뛰고 또 뛰는 동안 심하게 올라간 체온을 식힐 방법이 없다. 인류는 몸의 털을 없애고 대신 땀샘을 늘렸다. 몸에서 나온 땀 1그램이 수증기로 증발하려면 600칼로리의 열이 필요하다. 내가 흘린 1그램의 땀이 몸 안에 있는 600칼로리만큼의 열을 안고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땀을 흘리는 것은 체온을 내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이뿐만 아니다. 인류는 팔다리를 길게 만들어 땀샘이 들어설 수 있는 표면적을 넓혔다. 그 결과 인류는 물만 충분히 마실 수 있다면 어지간히 더운 곳에서도 적응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인류는 식량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몸 안에 지방을 비축해둔다. 지방은 열이 바깥으로 발산되는 것을 막고 열을 몸 안에 가둔다. 만일 지방층이 내장이나 근육을 덮는다면 더위를 쉽게 떨치기 어렵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체온 조절에 그리 영향을 주지 않는 장소에 지방을 저장했다. 바로 엉덩이 쪽이다.

그런데 아프리카 지역에 살던 인류 중 일부가 새로운 땅을 찾아 북쪽으로 이주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적도지방에는 없는 '뚜렷한 사계절'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빙하기까지 지구를 덮쳤다. 더위에 적응해 온 인류가 이번엔 추위를 견뎌야 했다. 길었던 팔다리는 짧아졌고 대신 상체가 커졌다. 땀을 잘 내보내지 않게 되었고 땀샘의 수도 줄었다.

북쪽으로 온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혹독한 추위에 내장기관의 온도가 떨어져 몸에 이상이 오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는 것이었다. 엉덩이 부근에 쌓아두었던 지방을 배로 옮겨 추위로부터 내장기관을 보호해야 했다. 이 방법은 효과가 탁월했고, 배에 지방을 쌓아두는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사는 이들이 살이 찔 때 배부터 나오는 이유는 추위에 적응해 온 인류의 유전자 때문이다.

내 몸  유전자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덕분에 뱃살이 말도 못 하게 늘었다. 요즘은 내복을 입을 수 있고 두툼한 점퍼도 많으니 내장 보호에 그리 전념하지 않아도 된다고 유전자에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긴, 지금처럼 온난화가 계속되고 식량이 넘쳐나 비만한 인류가 많아진다면, 굳이 몸속에 양분을 저장할 필요가 없어진다. 아마 먼 미래 인류의 체형은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팔다리는 더욱 길어질 것이다. 바비인형의 몸매를 저절로 갖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겨울만 되면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사계절이 뚜렷한 동북아시아에서 2018년을 보내고 있다. 생전 처음 '살찔 걱정'을 하게 된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으리라 믿으며, 올여름 만큼은 맛있는 것 먹는 여유를 누리고 싶다. 허리가 편안한 여름옷을 사둬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했습니다.



태그:#뱃살, #유전자, #과학에세이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