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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저의 습작소설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근래의 일이었지요. 아이는 평소에도 제가 써놓은 것을 종종 읽고 짧은 코멘트를 던지곤 했답니다. 이번에도 아이는 금세 읽더니 한 마디 던졌습니다.

"엄마. 소설 속 인물을 불행하게 한다면, 과연 작가로서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세요."

덜컥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습니다. 비슷한 코멘트를 전에 다른 사람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편의 습작을 쓰면서, 저는 세월호나 가습기 살균제 참사 희생자와 같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이야기, 자살하거나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꽤 자주 썼기 때문입니다.

왜 그 소설가는 '속죄'를 썼나

책 표지 <속죄> 표지
▲ 책 표지 <속죄>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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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수상작가이자, 영국 문학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이언 매큐언. 그의 최고의 걸작이라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속죄>를 읽었을 때, 바로 이러한 작가의 자격과 권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한 인터뷰에서 <속죄>를 쓴 의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을 다루고자 했다고 말입니다. 그에게 문학은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매개체입니다. 초보 예비 작가로서 저 역시 문학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 싶지요. 그러나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매큐언의 이 소설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소설가의 그러한 고민을 진중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1948년에 잉글랜드 햄프셔 주 엘더셧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사병에서 장교로 진급하지요. 매큐언은 아버지 발령지를 따라 리비아,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12살이 되어 잉글랜드로 돌아오고, 나중에 대학원에서는 문학 공부를 합니다.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해본 적이 없는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뿌리 뽑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계급적으로도 직업군인의 아들이어서 주류 사관학교 출신 가족에 비해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옥스브리지' 같은 전통 명문이 아닌 대학에 다녀 좌파 성향의 비전통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1975년부터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할 때는 소아 성애, 살인, 근친상간과 같은 소재를 많이 다뤄서 '엽기 이언( Ian Mcabre )'이란 별명도 얻습니다. 이후 1988년부터의 중기에는 문학적 성공을 거두고 <암스테르담>(1999)으로 맨 부커 상을 받지요. <속죄>(2001) 역시 이 시기 작품입니다. 후기부터 현재까지는 계속 성공 가도를 달리며, 정치적 색채가 있는 작품들도 쓰고 있습니다.

<속죄>의 구성은 특별합니다. 1부~3부, 그리고 '1999년 런던'이라는 4부가 있습니다.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메타 픽션의 형식을 갖습니다. 매큐언이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고 영향받은 것을 드러내 주듯이 중간중간 의식의 흐름 기법이 쓰이고요.

1부에서는 1930년대에 신흥 부자 가문인 탈리스 저택을 배경으로, 13살의 어린 브리오니가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어떤 사건들을 일으키는지 보여줍니다. 2부에서는 2차 세계 대전 중 전장으로 강제 파병된 로비의 시선으로 됭케르크 퇴각 장면과 함께 전쟁의 반인륜적이고 비극적인 참상이 그려집니다.

3부는 속죄를 위해 대학을 가는 대신 간호학교에 가서 간호사가 되는 브리오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다음 마치 부록이나 후기처럼 짧게 이어지는 '1999년 런던'에서는 77세의 노인이 된 브리오니가 앞서 1부~3부의 이야기가 사실은 소설가인 자신이 쓴 속죄의 서사임을 밝힙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소설 속에서 브리오니는 허황되고 무절제한 상상력으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릅니다. 상류층 집안의 브리오니는 가정부의 아들인 로비와 자기 언니 세실리아가 연애를 할 리가 없다는 '계급적' 무의식을 바탕으로, 연인들의 실랑이를 오해하고, 그 오해가 사실이라고 믿고 확신에 찬 거짓말을 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이 감정이입을 했다면

영화 <어톤먼트>에서 분수대 장면  소설 <속죄>에서 분수대 장면은 아주 중요하다. 어린 소녀 브리오니가 분수대에 있는 두 연인의 실랑이를 오해하며 비극이 시작된다. 소설 <속죄>를 바탕으로 영화 <어톤먼트>가 만들어졌다.
▲ 영화 <어톤먼트>에서 분수대 장면 소설 <속죄>에서 분수대 장면은 아주 중요하다. 어린 소녀 브리오니가 분수대에 있는 두 연인의 실랑이를 오해하며 비극이 시작된다. 소설 <속죄>를 바탕으로 영화 <어톤먼트>가 만들어졌다.
ⓒ UPI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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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짓말이 두 연인의 비극을 초래합니다. 매큐언은 브리오니와 자신을 중첩시키고, 동일시합니다. 그러니까, 브리오니의 평생에 걸친 속죄의 노력은 다름 아닌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왜 작가가 속죄를 해야 하냐고요?

매큐언은 어린 브리오니를 통하여, 예술적 상상력이 내재하는 윤리적 위험성을 환기시킵니다. 브리오니는 평생을 통해 이를 극복해나가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1999년 런던'을 보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작가의 지위에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에 대해 질문합니다. 소설가는 세상의 진실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세상의 폭력과 비극은 왜 생겨나는가? 매큐언은 그런 질문을 치열하게 던지고, 소설을 통해 대답을 찾고자 합니다.

그는 '공감'이야말로 이러한 윤리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9.11 테러 당시 매큐언의 사설은 유명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 감정이입의 본질이다. 이것이 공감의 기제이다. … 만일 비행기 납치범들이 그들 자신을 승객들의 생각과 감정 속에 상상해 넣을 수 있었다면 아마 계획을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희생자의 마음 속에 일단 들어가면 잔혹해지기란 어렵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인간성의 핵에 자리한다. 그것은 공감의 본질이며 윤리의 시작이다. (이언 매큐언 Guardian (2001년 9월 5일)


브리오니와 매큐언은 자주 오버랩됩니다. 그것은 브리오니와 매큐언 둘 다 소설가이기 때문이고, 속죄와 진실의 여정을 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매큐언은 소설의 2부인 됭케르크 퇴각 장면을 쓰기 위하여, 방대한 자료를 읽고 참고하며 진실을 드러내려 노력했습니다. 브리오니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로비의 입장이 되어, 그의 목소리를 되살려서 진실을 전달하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을 쓰며 브리오니는 자기 삶에서 결여된 것이 결국 자기 '인생의 뼈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브리오니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면서도, 진실을 고백할 용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중편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중편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뼈대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뼈대, 그녀 인생의 뼈대였다.' (이언 매큐언 <속죄> 중에서)


<속죄>는 매혹적인 소설입니다. 작가의 진중한 성찰이 녹아 있지만, 무엇보다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 책을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렵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여러분은 한 작가의 진실을 향한 치열한 여정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 스스로도 안타까움과 회한의 감정으로 브리오니와 함께, 여러분 '인생의 뼈대'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실 겁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무심코,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 진실을 왜곡하는 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행동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요. <속죄>을 읽은 여러분은 타인에게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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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고 여행하는 삶을 삽니다. 책이나 영화, 연극을 텍스트 삼아 일상의 삶을 읽어내고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북클럽 문학의숲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