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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면군이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수은 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지 올해로 30년이 됩니다. 그의 죽음은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고, 또한 섬유제조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 230명이 이황화탄소에 중독돼 사망한 원진레이온 투쟁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지금, 그 사건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살고 싶어... 병 다 나으면... 서울 떠나... 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

이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았다. 신문이 전하는 소년 노동자의 마지막 순간이 그러했다. 온도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 수은 중독에 걸렸다고 했다. 신나에도 중독됐다고 했다. 1988년 7월 2일, 형에게 위와 같은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그때 나이 불과 열 다섯 살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 나이는 열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지난 25일 인천 송내역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형, 문근면씨는 30년 전 그 날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신생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신고를 미루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었다. 호적상 1968년 출생한 것으로 돼 있지만, 자신도 역시 실제 나이는 두 살 더 많다고 했다. 그에게 당시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물었다.

- 동생 분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데요.
"예, 맞아요. 애가 빨리 시골 가고 싶다고. 왜냐하면 이제 하도 아프고 그러니까. 그때 그래서 제가 운동화를 하나 새 걸 사줬어요. '빨리 낫는 게 일'이라고, '송면아, 빨리 나서 시골 가자'고. 달래느라고 그랬죠. (송면이가) 집에 많이 가고 싶어했어요."

"형이 점심 시켜주고 식당 나갈 때 얼마나 맘이 아팠는지..."

1988년 7월 2일, 문송면 군은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수은 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88년 7월 2일, 문송면 군은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수은 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 일과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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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곳은 충남 서산군 원북면 양산리(현재는 태안군 소재)였다. 형은 "한적한 시골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라고 했다. "저희가 소작농이다 보니까"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시골에서 누구나 다 그러하듯, 부모님 일손 돕고, 소 풀 뜯기고, 바로 위 누나와 함께 동생들 씻겨주고 업어주고 그렇게 컸다"고 했다. 그렇기에 다섯 살 터울 동생에게 형은 언제나 든든한 존재였던 것 같다.

"형아 만나보고 온 지도 벌써 3일 째가 넘어가는군. 형이 나한테 잘해줘서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야. 형이 점심을 시켜주고 식당에서 나갈 때 얼마나 맘이 아프고 울고 싶었는지 밥이 제대로 안 먹히더군." - 고 문송면군이 아프기 전 형 문근면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공부도 곧잘 잘하던 형이었다. 반에서 10등 안에는 들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장학금도 받았다고 했다. 부모님은 공무원이 되길 원했지만 "어차피 가정 형편도 그렇고 빨리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한다. 스무 살 나이에 서울 와서 잡은 직장이 한국요업개발, 생산 부서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고 있는 형이 사준 점심 식사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는 동생을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 만약 동생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착실하게 잘 살고 있을 거 같아요. 바지런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남의 집 일손 부족하다고 하면 과수원 과일 따러 다니고, 미꾸라지도 잡아다 팔고, 교회 여름 성경 학교 이런 곳도 다니고, 친구들과 봉사도 하러 다니고, 애가 굉장히 성실하고 착실해. 말도 잘 듣고 그런 동생이었죠."

그런 동생이었기에 형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생은 교장 선생님 추천을 받아 영등포공고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참 팍팍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형제는 서로에게 더욱 더 소중한 울타리이자 안식처였다.

1988년 1월 어느 일요일

문송면 군의 형 문근면씨가 1988년 각계에 제출한 자필 진정서.
 문송면 군의 형 문근면씨가 1988년 각계에 제출한 자필 진정서.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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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누님이 1987년 10월에 서울 구로동으로 이사를 왔고, 송면이가 12월에 입사했고, 그랬으니까 일요일에는 누나 집에 놀러갔어요. 그럼 저도 얼굴 보고, 누나도 얼굴 보고, 그렇게 한 번씩 모여 같이 밥도 먹고 얘기하고 그랬죠. 그러다 다음 해 1월 초였나 봐요. 애가 누나 집에 왔는데, 몸이 안 좋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감기 몸살인 줄 알았죠. 으슬으슬 쑤신다고 하고 열 나고 그러니까."

동생이 협성계공이란 회사에 들어간 것이 1987년 12월 5일이었으니 불과 한 달 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구로동 개인 병원에 가봐도, 한약방에 가서 침을 맞아도 동생은 낫지 않았다. 그만큼 걱정은 커졌다. 형은 동생에게 휴직을 하도록 했다. 회사에서는 회사에서 다치지 않았다는 각서를 요구했다고 한다. 1988년 2월 8일, 휴직계를 제출했다. 누나와 형은 아픈 동생을 데리고 고향 집으로 간다.

"구정(설날) 전전날 내려갔어요. 송면이는 계속 아프다고 해서 방에 뉘여 놓고 우리는 명절 준비하느라, 어머니는 시장 가시고 그랬는데, 구정 전날 애가 방에서 눈이 뒤집어지고 경기를 하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애를 데리고 읍내 병원에 갔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큰 병원에 가야겠다고만 하는 거예요. 명절 3일 동안을 그냥 병원에서 처방도 없이 있다가 고대 구로병원으로 가게 된 거죠."

하지만 답답하고 안타깝기는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명도 나오지 않았고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동생의 고통 또한 커져만 갔다. 그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가족에게 "애가 귀신이 들렸다는 둥, 굿을 해보라는 둥"의 말 또한 크게 다가왔다. "중환자실 들락날락하면서 감당 못할 정도로 병원비 또한 많이 나왔던 상황"이었다.

- 그때 고향 집 소까지 판 것으로 아는데요. 실제 굿은 못 했겠네요.
"했어요. 시골 선산 묘소에 점쟁이가 부적을 묻었던 거 같아요."

- 돈은요?
"빌려서 했죠."

회사는 협박했고 나라는 외면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인 28일 문근면씨가 그동안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기록과 동생과 주고받았던 편지 등을 촬영해 보내왔다. 사진은 당시 가톨릭대학 산업의학 연구소의 문송면군 혈액 및 소변 검사 결과.
 인터뷰가 끝난 뒤인 28일 문근면씨가 그동안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기록과 동생과 주고받았던 편지 등을 촬영해 보내왔다. 사진은 당시 가톨릭대학 산업의학 연구소의 문송면군 혈액 및 소변 검사 결과.
ⓒ 문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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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밤, 송면군의 형 근면씨는 그동안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기록들을 일부 촬영해 보내왔다. 그중에는 "충남 태안 입원비 10만원", "이송비, 태안 → 서울(2900, 2명) → 병원(택시 3000원)", "고려대학 부속병원 입원비 80만원"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는 메모가 포함돼 있었다. 상단에는 이런 메모도 있었다. 꾼 돈 180, 소 판 돈 50. 당시 그의 답답한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답답함을 일부나마 풀어준 사람이 의사 박희순씨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선택한 서울대 병원"에서 "처음으로 동생이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본 동생의 주치의였다.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했다고 하자, 그는 "가톨릭병원 의학연구소로 동생의 피와 소변을 갖다 줘보라"고 권했다.

결과는 끔찍했다. 소변 검사에서 작게는 75.5㎍/l, 많게는 297.6㎍/l의 수은이 검출됐다. 동생 핏속에서도 수은이 돌고 있었다. 주치의는 산재 치료를 권했다.

갓 스물을 넘긴 형에게는 이 또한 낯선 용어임에 분명했다. 그런 형에게 박희순 의사는 당시 진보적 의료인들이 만든 산재 전문병원 구로의원 김은혜 상담실장을 소개해준다. 인터뷰에서 문씨는 "그때는 나도 어려서 직업병이란 것 자체를 몰랐다, 김은혜 선생의 설명을 듣고서야 산업재해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직장에서 병을 얻으면 그 회사에서 들어놓은 산재보험으로 치료해주기 때문에 치료비 걱정 없이 환자가 치료받을 수 있는 게 산재보험이다, 그렇게 설명해주셨어요."

명료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일을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골에 찾아와서 어머니한테 예전에 농약도 뿌리고 했을 테니 농약 중독이지 무슨 수은 중독이겠냐"고 엄포를 놓았다고 했다. "평생 먹고 살 돈을 뜯어내려고 의사와 짜고 치는 짓"이라는 등 "별 협박을 다 했다"고 했다. 1988년 당시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가 내놓은 활동보고서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노동부에 가보니 서울대는 산재 지정 병원이 아니라 하여 협성 지정 병원인 한강 성심병원에 옮겨서 진단서 받아오라고 요구. 당시 서울대 진단 입원비 등이 90여만원이라 옮길 수가 없으니 치료비 보증만이라도 서주면 병원을 옮기겠다고 애원했으나 '당신네 사정 아니냐'며 거절."

매몰차기는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노동부 서울남부지방 사무소는 형이 들고간 산재 신청서를 세 차례나 퇴짜를 놓았다. 회사에서 먼저 인정해줘야 한다, 산재 병원이 아닌 서울대 병원 진단으로는 안된다는 것이 그 이유들이었다. 가족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 형은 뛸 수밖에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시료를 들고 뛰어다녔다"고 했고 "법률구조공단 등 뭐, 여튼 많이 쫓아다녔다"고 했다. 직장에 휴직계를 냈고, 계속 연장이 안 돼, 그 마저도 그만뒀다고 했다.

스스로 생니까지 뽑게 만든 고통... 아들의 죽음을 몰랐던 아버지

서울에 오기 전 고 문송면 군 모습.
 서울에 오기 전 고 문송면 군 모습.
ⓒ 문근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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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기상한 편. 상태는 계속 안 좋다. 소·대변은 다 싼다. 점심 먹이고 노동 사무소 가서 신청서 가지고서 누이네 가서 라면 먹고 병원에 오니 5시. 저녁 먹임. 상태가 왜 이리 안 좋은지. 새벽 2시에 토하고 쓰러지고 일어서지도 못하는군. 새벽에 잠깐 2시간 눈 좀 붙임." - 문근면씨가 쓴 1988년 6월 30일 일기 중에서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당시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 있던 박석운 선생(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의 제안 덕분이었다. 그 제안은 신문에 내자는 것이었고, 그 해 5월 11일 <동아일보>를 통해 "온도계 공장 근무 15세 소년, 두 달만에 수은 중독"이란 제목의 기사가 처음으로 나간다. 5월 15일 <한겨레> 역시 창간호를 통해 "그 많은 수은이 그의 핏속을 돌고 있었던 것"이라고 알렸다.

보도가 잇따르자 회사의 협박이 주춤했다. 동생을 외면했던 국가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6월 20일, 형은 마침내 산재요양승인서를 받아들었다. 동생의 몸에 이상이 생긴 지 다섯 달이나 지난 후였다. 그 무렵 동생은 자신의 몸을 자꾸 밟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막 몸이 저리다고, 쑤시니까, 밟아 달래, 계속. 매일 밟아 달래."

극심한 고통으로 생니를 스스로 뽑기도 했다고 했다.

"애가 너무 아프니까, 엄청 고통받았어요. 밥도 못 먹고 하니까 애가 막 마를 대로 말라가요. 한번은 밖에 나갔다 돌아왔더니 이빨이 두 개인가 세 개가 없더라고요. '야, 너 왜 그러니?' 하니까 '이빨 뽑아버렸다'고, '왜?' 그러니까, 그냥 뽑았대. 너무 아프니까,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치다가 뽑아버린 거야. 이빨을. 충치가 하나도 없던 애인데. 고통은 고통대로 다 맛보고 간 거예요. 도시라고 딱 올라와서, 지 꿈, 뭘 해보고 싶었는데..."

30년 후, 형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제... 세월도 많이 흐르고, 감정도 조금씩 무뎌지긴 하는데, 또 이렇게 얘기 나오면 아직도 울컥 울컥해요."

1988년 7월 2일 새벽 2시 35분, 동생이 형 그리고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흘렀을까. 아버지도 송면이 곁으로 갔다. 송면이가 '거기'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송면이 쓰러지고 아버지가 충격을 크게 받으셨어요. 왜냐하면 송면이를 굉장히 예뻐했거든. 그때 우리 시골집 방이 세 개였는데, 엄마랑 잘 사람은 엄마 쪽으로, 아빠랑 잘 사람은 아빠 쪽으로, 그러면 꼭 송면이는 아버지랑 잔다고, 아버지가 제일 예뻐했지. 1989년 뇌종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송면이 죽은 거 모르고 돌아가셨어요. 더 충격받으실까 봐. 가족들이 못 알렸어요. 자꾸 송면이를 찾으셔서, '송면이, 지금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있다'고, '서울 대학병원에 잘 있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었죠."

- 어머니께서는?
"지금 시골에 계세요. 올해 여든 둘이시고... 약으로 사시죠."

"내가 무시당한 것보다 안타까운 건..."

인터뷰가 끝난 뒤인 28일 문근면씨가 그동안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기록과 동생과 주고받았던 편지 등을 촬영해 보내왔다. 사진은 문근면씨가 1986년 12월 22일 동생 문송면군에게 보냈던 크리스마스 카드. "87년을 맞이하여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학교 가길 바라며, 건강해라"는 형의 바람은 그로부터 1년 여 만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인 28일 문근면씨가 그동안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기록과 동생과 주고받았던 편지 등을 촬영해 보내왔다. 사진은 문근면씨가 1986년 12월 22일 동생 문송면군에게 보냈던 크리스마스 카드. "87년을 맞이하여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학교 가길 바라며, 건강해라"는 형의 바람은 그로부터 1년 여 만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 문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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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신문을 보면 산재 처리만 빨랐어도 동생이 살 수 있었다고 하셨던데.
"그랬다고 해도 과연 우리 송면이 제대로 치료해줬을까, 과연 우리 송면이가 고통 안 받게 할 수 있었을까, 30년이 지난 오늘이라고 치료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의문이에요. 그렇지만, 그래도 가족 입장에서는 한없이 답답하던 상태니까, 더 일찍 산재 지정되고 병명 딱 나왔으면, 그럼 그나마 거기(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정말 막막했으니까."

- 그때, 가장 화가 났던 건 무엇이었는지.
"노동부에서 있는 자 편을 들더라고요. 또 회사를 찾아가면, 가진 사람들이 무시하고, 어리다고 무시하고, 지금 같으면 갑질이지. 그럴 때마다 굉장히 화도 많이 났고 그랬죠. 얼마 전이었는데, 그쪽(회사 근처) 지나가다 보니 간판하고 외형 다 그대로 있더라고요. 아직도 존재하고 있구나. 감정이 또 굉장히... 하지만 주변 분들 도움이 없었다면 그런 결과(산재 인정)를 받아내지 못했을 거잖아요. 제가 무시당한 것보다 안타까운 건요. 송면이가 제대로 치료 못 받고 고통 다 받고 갔다는 게, 그게 가장 안타까워요. 갈 때 가더라도..."

형은 여전히 미안한 듯했다. 끝으로 바라는 바를 물었다.

"어차피 없고 가난한 자가 3D(노동)해야 하는 거고, 그걸 우리나라 사람들도 요즘 잘 안 하려고 하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서 하는데, 그럼 우리나라까지 와서 먹고살려고 하는 그 사람들이 또 착취당하는 현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럼 과연, 그 사람들은 어디 하소연할 것이며, 그걸 또 누가 존중해 줄 것인지...

노동자를 착취하지 말고 이윤 추구를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건강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더 그랬으면... 뭐든지 기본이 중요하잖아요. 미연에 방지하는 게 중요하지, 사고 터진 다음에, 직업병 걸린 다음에 아무리 뭘 해주려고 해도 그건 이미 늦은 거죠. 안전 교육, 작업 환경, 이런 거에 더 많이 신경써 줬으면 좋겠어요."

"평상에 모여 밥 같이 먹었던 그때가..."

녹음을 멈췄다. 하지만 형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수첩에 옮겨 적었다.

"우리 송면이 편지 가끔씩 읽어보면 마음이 먹먹해요. 한번은 송면이가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갈 때가 됐는데, 돈 있으면 혹시 좀 보태줄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던 그 편지가 있더라고요. 굉장히 맘이... 서울에서 라면 먹고 출근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아프고 했지만, 빨리 돈 벌어서 동생이랑 살고 싶었는데...

어렵게 살았지만 그때가 좋았어요. 미꾸라지 잡으러 다니고, 부모님 도와드리고, 저녁엔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모여 밥 같이 먹었던 그때가. 없이 살아도 다 건강했으니까."


태그:#문송면, #원진레이온, #박희순, #김은혜, #박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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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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