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의 줄거리는 종수(유아인)와 해미(전종서), 그리고 벤(스티븐 연)이라는 세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셋의 관계는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이해받기 쉬운 관계도 아니다. 젊음을 제외하면 공통분모가 거의 남지 않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계급에 속해 판이한 인생관을 구축한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가지만 서로에게 마치 흉터 같은 '버닝'을 남긴다.

종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종수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작가 지망생이다. 현실에서 그는 아버지의 소와 친구 해미의 고양이에게 잊지 않고 밥을 주는 책임감의 소유자이다. 평이한 성격 때문인지 그는 세련되고 정확한 문법을 구사한 탄원문 같은 것에 재능을 드러내지만, 사실 종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택배를 나르던 그는 어느날 고향 친구인 해미를 만나고 덤으로 벤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교제하기 시작한다. 둘은 종수에게 호기심을 주입시키는 듯하지만, 현실에서 도저히 어떻게 배출할지 몰랐던 종수의 열망은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타오르기 시작한다.

처음 해미를 만나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성관계 도중 종수는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을 본다. 빛이 여러 모로 희망이나 구원 따위를 상징하듯 종수는 해미와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이 무언가를 희망하기 시작한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시기에 종수는 행복하다. 아버지는 구치소에 갇혀있고 글쓰기는 전혀 진전이 없지만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소똥을 치우며 미래를 꿈꾼다.

해미와의 재회를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지만 해미는 보란 듯 다른 남자(벤)와 함께 등장한다. 동석한 술자리에서 셋은 술에 취해버리며, 심지어 그녀는 벤과 자리를 뜬다. 이날부터 종수는 상황이 본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예감하지만 의외로 덤덤하게 이 삼각관계를 유지해 간다.

그들의 만남 대부분이 종수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영화는 해미와 벤의 사정을 담지 않는다. 종수의 아버지는 흔한 대사 하나 없다. 모든 것은 종수의 판단력 및 상상력에 달려 있고, 둘 중 하나에도 특기가 없는 '평범한' 청년 종수는 현실과 초현실이 마구 뒤섞인 스크린 위를 부유한다. 과거, 즉 종수가 나고 자란 파주에서 모든 것은 실재한다. 종수의 기억이 그리하고, 소, 대남방송, 재판 등 모조리 만지고 듣고 볼 수 있는 뚜렷한 것들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종수에게 의미가 없다.

반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미래의 모든 것들은 종수를 혼란에 빠뜨린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해미와 벤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모를 우물, 해미의 고양이, 타버린 비닐하우스가 그러하다. 말 없이 걸려온 전화는 덤이다. 미래가 종수의 가슴을 뛰게 한다. 종수는 작가가 되고 싶고 영화 안에서 작가적 관점을 갖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이 미스터리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해미와 종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당장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하는 말이 서민이지 거지나 다를 바 없는 둘은 몹시 다르다.

해미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삶을 일관하지만, 정작 젊음과 대상화된 이미지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나레이터 모델이다. 본인의 이상 속에서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카드빚을 내거나 주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등 자기 파괴를 일삼는다. 아름다운 '대마초 장면'의 이면에는, 대낮부터 대마초나 술 따위의 힘을 빌어 거침없이 옷을 벗고 아무데서나 잠 드는 해미가 있다. 그는 본인의 현실을 바꿀 수 없는 무력하고 비주체적 인물이다. 해미는 '리틀 헝거'에 갇힌 '그레이트 헝거'다.

그러나 해미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무당, 즉 샤먼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해 받을 수도, 이해하려 해봤자 부질없지만 이 세계에 분명 존재하는 단상이다. 종교나 샤머니즘은 따위는 일상부터 경제, 정치판 구석구석 어디든 있다. '리틀 헝거'가 충족되어야 '그레이트 헝거'가 가능하다는 중력같은 현실은 해미에게 의미가 없다. 카드빚을 낸 댓가를 해미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보유한 감수성, 즉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순수함은, 21세기 이성적 세계의 끝물을 달리는 종수에게 각별하다. 영적체험에 샤먼의 동반은 필수적인 것이다. 벤이라는 상류층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해미는 자연스러운 교제를 통해 종수의 삶에 벤을 끌어 들인다.

해미에게 종수는 뜻밖의 대상이다. 스스로의 인격조차 존중할 수 없어서 카드빚을 지는 무책임한 해미는, 종수 안에 내재된 진지함에 감동한다.

종수는 비어있는 해미 집에서 그 누구보다 상냥하게 고양이를 부르고 찾는다. 종수에게는 평화롭고 정다운 심성이 있다.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하는 해미는 종수를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벤은 전한다.

종수는 해미를 상실한다. 열린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는 해미와 달리, 자의식과 기준이 앞서는 종수가 해미의 인격을 수차례 모독한 까닭이다. 이후 해미가 말한 '우물'의 실존 여부는 종수가 해미라는 미스터리를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 정작 종수는 본인이 수십 년을 보낸 마을의 우물을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해미에게 못생겼다 말해 상처를 준 일조차 잊어버렸다. 그런 그가 해미에게 올바른 기억을 요구한다. 애초에 해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종수와 섹스를 하며 '유일한 친구'라 불렀다. 종수는 그것을 거부하며 도리어 해미를 '창녀'에 빗댄다. 진지한 종수에게 행위나 시간 따위가 중요하다면, 해미에게는 부유하는 느낌과 표현이 우선이다. 해미는 메타포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메타포 안에서 사는 존재다.

벤과 종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초창기의 벤은 속내를 감추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자기 직업조차 공개하지 않고 일련의 무표정을 유지하는 벤의 껍데기는 부와 권력의 냄새가 난다. 파스타 하나를 삶으면서도 고상한 말 하나는 던져야 하는 현학적인 인물이기도 하고, 처음 만난 종수 앞에서 모친에게 비아냥거린다. 영화라는 게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종수가 크게 반응하지 않은 모든 장면에서 벤은 유별나게 독특하고 한마디로 '재수가 없다'. 그러나 영화 속 벤이 유별나게 미스테리한 이유는 종수에 대한 강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애초에 벤이 편한 대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안락한 동년배들, 즉 그의 작은 서클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든 소모할 수 있는 해미 같은 인물이다. 해미의 순수는 벤 입장에서 쉽고 편리하다. 그는 벤이 '왜 자신을 만나는지', 관계의 미래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추궁하지 않는다. 벤 입장에서 관계를 위한 정신적 물직적 투자는 최소화가 된다. 이 '해미들'은 본인의 서클 앞에서 서커스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것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쏟아져 나오는 하품이나 그 하품이 무례하다는 것도 깨닫지도 못하는 듯하다. 

종수는 벤에게 다소 불편하지만 독특한 인물이다. 종수에게는 집요하게 추궁하고 강한 자아, 인텔리의 과도한 진지함 혹은 야망 같은 것이 탑재되어 있다. 그런 동시에 여러모로 궁핍하기 짝이 없다. 즉 종수는 '그레이트 헝거'에 갇힌 '리틀 헝거'다. 이런 젊음은 개발도상국을 지나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인데, 부모 세대보다 부유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살 만하고 철저하게 교육받아 기성세대가 경제에 이바지했다면 이제 다음 단계를 가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벤을 바라보는 종수의 얼굴은 무게와 공허를 동시에 담고 있고, 벤 역시 이런 종수에게 향하는 관심을 숨길 수가 없다. 그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종수의 글쓰기에 화두를 던지거나 은밀히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도 한다. 종수가 좋아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책까지 사다가 절반 이상 읽은 장면도 나온다.

벤은 비닐하우스 방화를 통해 간간히 쾌감을 얻는다고 고백한다. 그의 고백에는 '한국은 이렇다 저렇다'라는 힐난 조의 생각이 탑재되어 있지만, 벤에게 미국에 거주할 의사는 없는 것 같다. 벤의 '금수저'는 다 무너져가는 종수의 파주집에서든, 멋진 서래마을 주택에서든, 미국에서든 동일하고 강력한 보호막을 제공한다. 이는 가령 트럼프 당선 따위를 꿈에도 몰랐던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건강한 젊은이들에 내재된 의식과 비슷해 보인다. 당장 그 구역만 벗어나도 판이하게 열리는 다양한 각도의 세계관에 무지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다'는 벤의 독백은 동시성을 갈망하지만 탈출할 수 없는 정신적 감옥과도 같다.

종수는 벤에게 완벽히 몰입하여 제대로 된 식사도 잊고 편의점 빵을 뜯으며 그를 쫒아 각지를 누비고 다닌다. 영화 초반 손수 마늘까지 다져서 된장찌개를 만들던 소박한 종수는 사라져 간다. 그는 생계형 노동을 내팽개치고 암소도 팔아버리고 아버지의 재판도 외면한다. 밤마다 집나간 어머니의 옷을 태우던 어린시절 꿈은 활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로 바뀐다. 벤이 말한 '가슴 속 베이스'를 종수가 느끼기 시작하자 종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벤은 '우연히' 종수를 스쳐가지만 종수의 삶에 영구적 변화를 남긴다. 아버지의 서사인 군사 정권처럼 지긋지긋한 것들로 가득찬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벤과 해미와 대마초를 피운다. 같은 공간이자 과거를 상징했지만 당장 날벼락처럼 떨어진 생생한 경험에 대마초까지 더해져 종수는 흥분한다. 지금껏 종수에게 파주가 지루했던 까닭은, 과거의 세대가 자기 책임일 아닐 뿐더러 주체적 개선이 불가능한 무엇이기 떄문일지 모른다. 종수는 벤이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를 거의 확신하며, 그것을 해미와 동일시 하고 고향 땅을 누빈다. 벤을 통해 파주는 갑갑한 과거에서 푸르스름하고 묘한 미스테리물이 되버린다.  기간이나 밀도와도 전혀 관계 없이 운명론적 성격을 띄는 이러한 관계의 힘이 영화 전반을 아우른다. 종수가 달리면 새떼가 하늘을 뒤덮는다는 식의 전개가 일종의 논리적 설명을 거부하는 개연성을 띄고 있다.  

죽음과 버닝(burning)

영화의 제목은 '버닝'이다. 말그대로 태운다는 것인데, 이는 훼손이나 변형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훼손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은 본형을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러나 무언가를 태운다는 것은 재로 돌아감, 즉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증거인멸이자 과거청산인 것이다. 즉 '버닝'은 죽음과 청산을 의미하고, 재탄생이 가능한 서사가 아닐까. 종수는 해미와 벤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마침내 스스로의 글을 쓰게 된다는 부활의 뉘앙스가 있다.  

종수에게는 육친의 트라우마가 있다. 아버지는 분노조절 장애와 지나친 자존심으로 인생에 실패했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버지이기 때문에 종수는 아버지의 자존심과 본인의 자존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자존감'이 스스로를 존중하는 능력이라면, '자존심'은 남들로부터 얻는 자기존중이다. 전자는 주체성을 띄고 후자는 구걸한다. 스스로에게 주어야 할 마땅한 애정과 믿음이 증발할 때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남들한테서 그것을 얻고자 한다. 고통과 외면을 밥먹듯 마주하는 가령 최소득층들이나 학대받은 사람들이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종수는 틀림없이 굴욕적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고, 가난이나 학대 같은 것에 얽매여 모든 새로운 경험에 강한 방어기제를 구축 했을 것이다. 벤과 해미가 종수의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둘은 종수의 내면의 또 다른 의식을 깨운다. 종수의 '베이스'를 울렸던 음모론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리틀 헝거'의 분노였던 것이다. 억눌리고 소극적이던 종수는 자기 내부의 모순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는 영화는 없다. 그 순간 내용물은 단순해진다. 현실이란 상대적이며 관점도 없고 모두에게 오직 나의 현실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후반은 기이할 정도로 종수의 시각에 갇혀있고, 흡사 종수가 가상현실의 캐릭터로 배회하는 느낌을 준다. 형사라도 된 것처럼 벤을 추적하는 종수의 수사력은 형편없고, 괴물같은 트럭을 타고 온갖 흔적을 남기지만 개의치 않는다. 자신 안의 어두움에 잠식된 종수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해미의 실종은 벤은 고사하고 그의 가족에게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비슷하게 소외된 종수에게 그 모습은 자기 일처럼 큰 상처였을 것이다. 해미의 가족 앞에서도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도 지긋지긋한 모욕감을 또다시 느꼈을 때 종수가 짓는 어이없는 웃음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매일 걸려오던 전화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도 아니었고, 해미는 떠났으며 결국 자기를 기다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종수는 깨닫는다.

사실 영화 시작부터 이미 존재하던 종수의 통증은 내부의 모순과 극대화 되는데, 결정적 사건이 벤의 주차장에서 벌어진다. 누구 고양이인지 모를 이 고양이는 해미가 지어준 이름(보일)을 듣자마자 종수에게 기적처럼 달려든다. 평이해 보이는 이 장면에는 음악조차 없지만 살아있는 생명과의 연계성을 통해 종수의 자기확신은 고요함 속에 배가 된다. 이런 종류의 확신은 미래를 설계할 일종의 자기 최면과도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는 망상이고 누구에게는 기회다. 이제 종수에게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종수든 해미든 벤이든 동시대 젊은이라는 점은 매한가지다. 경쟁과 대립의 구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 연대의식은 끊임없이 충돌하며 문화와 양식을 생산한다. '젊음'이라는 단어를 재차 강조하던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젊음이 수반하는 유연성과 감수성을 표현한다. 각본은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태우다>에 기반하지만, 영화는 그 단편소설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버닝>은 한국 청년들에게 눈앞에 떨어진 현실 그 자체로 다가오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속 역설을 날 것으로 담았다. 기적 같던 '촛불혁명' 이후 젊음의 민낯이기도 하다.

종수는 사회적 분노와 자존감에 휩쓸려 아버지 같은 존재로 성장할지 모르고, 해미는 종수의 어머니처럼 몇십 년 후에도 빚쟁이로 떠돌게 될지 모른다. 벤 역시 용산참사와 유사한 사회적 비극을 유발하는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젊고 서로를 만났다. 관객 입장에서는 상상할 뿐이다.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운명이 알고 있고, 역설적으로 운명은 믿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BURNING 버닝 이창동 유아인 전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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