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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갈등하고 불화하는 '위기의 주부' 이야기입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번뇌를 글로 풀어보며 나의 언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편집자말]
 '지금 네 모습은 네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사진은 KBS 2TV 드라마 <고백부부> 갈무리)
 '지금 네 모습은 네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사진은 KBS 2TV 드라마 <고백부부> 갈무리)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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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놀자는 아이를 울리면서까지 방 불을 끄고 이불 위에 눕혔다. 나도 기절 직전이었다. 그러나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가 들리면 피곤했던 몸에 기운 충전되며 벌떡 일어나곤 했다.

잠이 부족해 힘들어하면서도 잠들기 아까웠다. '나만의 시간', 그게 뭐라고. 글 한 줄이라도 끄적거리고 읽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지워지는 자아를 그렇게라도 간신히 유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아이가 더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종종 나는 '내가 지워지는 암담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분명 아이에게 젖 물리는 이 사람도 나인데, 한 마리 짐승의 어미처럼 왠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원할 때 책 읽고 맛 느끼며 음식 먹고 몰입해서 일하고 원하면 떠나던 삶은 어디로 갔는지. 거뭇한 내 얼굴을 마주할 때면 '자아'란 놈은 환영처럼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지금 네 모습은 네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30년 넘게 '뭐든지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들었고, 인생을 의지대로 끌고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물론 마음대로 안 된다. 그렇다고 '신의 뜻' 혹은 '가문의 뜻' 대로 살진 않지 않은가. '운명'을 개척해야 하며 '숙명' 따위 개나 줘버리는 시대 아닌가. 하고 싶은 일도, 욕심도 많았던 나에게 인생의 모든 기획이 송두리째 무너짐을 겪어가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상황은 최초로 닥친 '대.재.앙'이었다. 왜 나는 이토록 절망했을까. 그걸 알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여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 모성 

알다시피 여성이 사회적으로 '개인'이자 '시민'으로 인정받은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근대 사회가 도래하며 가문, 종교,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탄생한 '개인'은 오랫동안 남성들의 것이었다. 개인도 시민도 못 된 여성들에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가문 중심' 공동체의 삶을 깨뜨리고 핵가족이라는 파편을 만들었다. 점점이 박힌 가족이란 최소 단위는 험난한 세상에서 일하고 돌아온 식구들의 따듯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했다. 누군가 바깥세상에서 일하는 대신 누군가는 가혹함을 보듬고 치유해야 했다. 여성이 '주부'로 호명되었다.

아이들을 산업사회의 요구에 맞춘 노동자와 시민이 되도록 양육할 필요도 생겼다. 먹이고 입히기만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한 아이를 경쟁력 있는 인력으로 만들어가는 섬세하고 중차대한 일을 아무에게나 시킬 수는 없는 법. 전처럼 유모에게 맡기거나 먼 친척 집에 보내거나 거리를 싸돌아다니게 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었다.

누가 아이들을 '전담마크' 할 것인가. 뱃속에서부터 아이를 기르고 자기 몸으로 낳은 사람, 생물학적으로 가장 가까워 보이는 사람, '엄마'가 호출된다. 여성에게 가정을 돌보는 '주부'이자 자식을 집중양육 할 의무를 짊어질 '엄마'라는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바로 '성 역할'의 탄생이다.

이때부터 '자궁'을 가진 여성이야말로 아이 키우는데 적임자이며, 아이들은 어머니를 가장 필요로 한다는 논리가 탄탄히 구축되었다. 사회학, 철학, 심리학, 예술이 총동원되어 어머니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으니, 그 이름 위대하고 숭고하며 거룩한 '모성애'여라.

"난소는 여성의 체계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여성의 신의, 헌신, 끊임없는 각성과 선견지명 등 존경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정신의 속성과 기질.. 이 모든 것은 난소에 기원을 두고 있다.(닥터 블리스, 1970)" - <모성애의 발명> 82쪽


남성 시민들은 자유와 평등을 울부짖으며 태생적, 신분적 구속을 벗어던졌지만 여성들에겐 '본성'이라는 명분하에 '모성과 양육의 구속'을 채웠다. 하지만 많은 연구가 말하듯 자식을 위해 내 몸 희생하고 헌신을 자처하는 '모성애'는 결코 여성의 몸에 새겨진 인자가 아니다. 아무런 감정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의 양육을 넘어선 깊은 애정과 헌신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키워나가는 것으로, 아빠들의 '부성' 역시 마찬가지로 배양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만이 양육과 돌봄의 적임자라는 '모성 신화'가 전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 공장의 노동에 몰입할 수 있도록, 또 누군가 훈육된 노동자로 양성될 수 있도록 '모성'이 '무상'으로 돌봄을 수행해야만 자본주의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상적 어머니' 모델은 전 계층으로 확대되었고 육아의 중심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 조각 나의 인생  

 아이에게 맞춰진 일상은 왠지 '나의 일상'이 아닌 것만 같고 아이를 위해 '주부로 근무'하는 건 나의 '경력'이 아니게만 느껴지는 건 내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성이서가 아니었다. (사진은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스틸컷)
 아이에게 맞춰진 일상은 왠지 '나의 일상'이 아닌 것만 같고 아이를 위해 '주부로 근무'하는 건 나의 '경력'이 아니게만 느껴지는 건 내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성이어서가 아니었다. (사진은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스틸컷)
ⓒ 필라멘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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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도 고등교육의 기회가 폭넓게 주어지면서 각성이 일어났다. 근대교육은 (남성 시민들만큼) 여성들을 '계몽'했고 여성들의 자아는 깨어났으며 개인이 된 여성들은 사유를 시작했다. 사유는 자기 위치를 질문하게 하고, 의문을 품게 한다. 왜 결혼을 해야 하는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왜 일을 하지 못하는가. 이제껏 감히 하지 못한 질문을 한다. 이제부터 여성들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타인의 위한 삶'이란 엄마 역할과 '한 조각 나의 인생'과의 투쟁이.

위에서 언급한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의 <모성애의 발명>은 모성애가 근대 이후 산업현장과 분리된 가족제도 안에서 아동의 발달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작업이라고 지적한다. 내가 놀란 대목은 그 지점뿐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원한 '나만의 시간', 머리 쥐어뜯으며 괴로워한 '자아의 상실'마저도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이었다.

큰 고민 없이 가문이나 종교, 사회적 통념을 따르며 살던 시대가 끝나고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되어버린 시대가 준 대가.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자 하는 고달프고 외로운 분투'는 체제의 결과였다.

"(근대 산업사회가 진행되며) 인생은 더 이상 놀라운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개인의 소유물이다. 나아가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야 할 과제, 개인적인 기획이 된다." - <모성애의 발명>


그래서 아이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면서도 사회에서 도태될까 걱정하고,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면서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어 발버둥 치는 걸까. 아이에게 맞춰진 일상은 왠지 '나의 일상'이 아닌 것만 같고 아이를 위해 '주부로 근무'하는 건 나의 '경력'이 아니게만 느껴지는 건 내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성이어서가 아니었다.

예민하다거나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목표를 가지고 실행을 옮기며 시행착오를 수정하고 다양한 기회를 유람하며 인생을 기획하던 '개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여성 이전에 '근대적 인간'이 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근대 교육을 받으며 '한 조각 나의 인생'을 쟁취했을까? 아니었다. 양육에서의 엄마 역할을 무한대로 강조하는 '발달심리학'과 여성의 사회참여와 인권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대(서구에서 1960년대 이후)가 겹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성들이 직업을 갖고 사회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한편에선 여성들이 사회로 나가면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냈다. '모성애'라는 건 여성도 남성과 같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후의 구속이었다.

'모성애를 통한 죄책감 심어주기'는 여성의 사회진출만큼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가뭄>의 저자인 애너벨 크랩은 미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2006년 연구 결과, 전일제 근무를 하는 엄마들이 1976년 전업주부 엄마들보다 아이와 일대일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죄책감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모성애와 자기계발은 양립 가능할까  

"타인을 위한 삶은 몰아적인 사고와 행동을 요구한다. (반면) 근대 사회의 감추어진 교육 계획에는 목적 의식적으로 인생행로를 설계하고 기회를 폭넓게 이용하며 장애물을 예측하여 피하는 것이 포함된다." - <모성애의 발명>


한 아이를 온전히 키우려면 일정 기간 헌신해야 한다. 예측불가능 속으로 투신해야 한다. 아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이 추구해온 목표와 목적, 과정을 어김없이 헝클어버리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계획대로 진행시키려면 누군가가 대신해야 한다. 다른 가족에게 맡기거나, 돈을 주고 외주 인력을 사거나, 아니면 한 개인의 인생을 구겨버리지 않을 만한 시스템이 있거나.

 tvN 드라마 <미생> 중 한 장면
 tvN 드라마 <미생> 중 한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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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자면 많은 여성들의 비혼/비출산 선택은 '합리성'을 추구해온 근대 교육의 성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자신의 인생을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가 명백한 걸림돌이 되고 가능성을 현저히 제한"함이 너무도 분명한데도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합리적이며 이성적 사고를 훈련받아온 모든 근대의 후손들에게 출산과 육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택이다. 모르니까 하거나 눈 질끈 감고 하는 거지 따지다 보면 못한다.

어찌 이런 일에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냐고 묻는다면, 이 세상 모든 영역에서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왜 여성에게만 출산과 육아에 있어선 계산하지 말라고 말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이 시대 엄마가 된 여성들에겐 '모성애'와 '인생 계발'이라는 두 가지 의무가 주어졌다. 자기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선해가는 깨어있는 개인이 돼야 하는 동시에 아이의 인생을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엄마여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을까?

모성애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 자신을 지우라 강요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기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계발하라고 한다. 그리고 변화한 시대의 육아서들은 두 가지가 합치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단, 네가 죽도록 노력한다면.' 이건 희망일까, 기만일까.

'생각하고 의심하는 근대의 개인'인 나는 그 안에서 갈등하고 분열한다. 육아조차 자기계발로 포섭되는 시대에 우린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답이 없는 미궁 속에서 오늘도 헤맨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와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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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