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민수

배우 조민수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한국영화에서 조민수의 위치는 독특하면서 독보적이다.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30년을 훌쩍 넘긴 경력 안에서 그는 폭이 큰 변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도회적이고 도도했던 모습에서 때론 억척스러운 아내로, 현실감 넘치는 엄마에서 때론 매정한 중년 여성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 개봉한 영화 <마녀>에선 그 어떤 관계성도 없는 극악의 인물이 됐다. <신세계> <대호>의 박훈정 감독의 부름을 받은 조민수는 극 중 '닥터 백' 역을 맡았다. 저명한 유전공학자이자 정체불명의 기업을 위해 일하는 인물로 유전자 조작을 이용한 인간병기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초라는 인장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장면, 캐릭터가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그는 <마녀>를 소개했다. 마치 게임을 하듯 살인을 즐기는 아이들, '마녀 아가씨'라는 별명처럼 최고의 병기로 태어났지만 기억을 잃고 평범한 가정으로 숨어들어간 자윤(김다미)이 모두 닥터 백의 손에서 탄생했다. 어찌 보면 악의 원인처럼 보이는 닥터 백은 동시에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머지는 조작된 병기들이었으니 말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박훈정 감독님에게 혹시 게리 올드만? 아니면 <인디펜더스 데이>에 나오는 그 박사를 모티브로 했는지 물었는데 아니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이름은 밝힐 수 없는 실존하는 두 여성(본래 닥터 백은 남성 캐릭터였다가 각색 과정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 - 기자 말)을 얘기하셨다. 그 두 사람이 섞인 캐릭터가 닥터 백이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캐릭터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극악한 여성을 보이고 싶다더라.

이 여자의 가족은 있을까?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며, 사람의 피를 매우 자연스럽게 대하는 사람이다. 또 회사를 위해선 몸을 굽힐 줄 아는 비겁한 사회성도 있는 사람이었다. (피칠갑 된 아이들 사이를 걷는) 첫 신이 중요했다. 감정적으로 흥분한 게 아닌 마치 일상처럼 담담하게 걸었다. 감독님이 좋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톤을 맞춰 나갔다."


<마녀>를 두고 조민수는 세간의 평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만큼 애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 평이 나올 수 있지만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선 볼 수 없던 신선한 작품인 건 분명하다"며 그는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나서는 건 맞지만 여성영화는 아니다. 박훈정 감독이 예전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였고, 그의 색깔이 잘 담긴 영화"로 정의했다.

인간의 본성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마녀>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쉽게 나올 수 없는 캐릭터임을 알기에 그는 현장에서 대역을 쓰거나 마네킹을 써도 될 장면에서까지 스스로 연기하기를 고집했다. 닥터 백이 거친 액션을 소화하진 않지만 총상을 입는 장면에서 사실상 프레임 밖에서 벌어지지만 현장에서 직접 그 연기를 소화했다는 후문이다. "스치는 장면이라도 관객 분들은 다 알아차린다"며 "남은 쉽게 죽이면서도 자신이 다치면 씩씩 거리는 그 모습이 닥터 백의 인간적 면모였다"고 설명했다.

살인병기로 태어난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탄생시킨 닥터 백은 과연 악인가. 영화에선 여러 작은 반전 요소를 넣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질문한다. 박훈정 감독 역시 "성선설, 성악설 등 여러 철학적 이론이 있는데 <마녀>를 통해 그 부분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조민수의 생각은 어떨까.

"철저하게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고 본다. 자라면서 악을 학습하고 악이 침범하는 것 같다. 뇌가 말랑말랑한 아이들을 보면 모든 걸 잘 학습하잖나. 흔히 나은 정 기른 정 얘기하는데 기른 정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자윤의 아빠 대사 중에 '예쁘다 예쁘다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게 있다. 그 말에 인간 본성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본다. 닥터 백의 본성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능력자, 상급자에게 잘 보이려 하다가 그게 이어지면 스스로 그걸 즐기게 되잖나.

감독님과 닥터 백에 대해 얘기할 때 유년 시절 사랑받지 못한 인물로 잡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지. 필요에 의해서만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러다 자윤이라는 좋은 물건을 만들게 됐다. 아마 예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윤에게 할 수 있는 표현은 박수치며 '최고야!'하는 게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후에 닥터 백 캐릭터가 (내게) 붙기 시작하더라." 


<마녀>를 보면 자윤 자체가 마녀 소녀라는 별명을 갖고 있긴 하지만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진짜 마녀가 누구인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과연 진짜 마녀는 누굴까? 조민수의 닥터 백과 함께 이 질문을 안고 영화를 봐도 좋을 것이다.

조급증을 버리다

 배우 조민수

배우 조민수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데뷔 33년차. 앞서 언급한 대로 드라마에선 다양한 역할로 변신을 꾀했지만 영화에선 필모그래피가 많진 않다. <관능의 법칙>(2014)년 이후 4년 만에 <마녀>를 만나게 됐고, <관능의 법칙> 전작 역시 4년 전인 <피에타>였으니 말이다. 몇몇 인터뷰에서 "80년대 (유행햇던) 에로영화를 찍기 싫었다"며 "그때 충무로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작품 수가 적을지언정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필모그래피를 갖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대중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조급증이 들기 쉽다. 어려서부터 제가 버려야 할 게 바로 조급증이었다. 답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요즘 뭐 해요 잘 지내요 물으면 '되게 잘 지내요'라고 답하곤 했다. 매번 조급증을 반복하면서 고민도 했다. 그러다 이렇게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기자 분이 제 출연작을 읊어주시는데 속으로 '난 참 복 받은 사람이구나' 느꼈다. 영화계에서 사장되지 않고 나름 계속 작품을 잘 찍어왔구나 생각한 것이지.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제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을 때, 거기에 대한 기대치를 깨지 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민수는 이런 배우야' 이런 말에 '그래 앞으로 몇 작품을 할지는 모르지만 연기를 하다가 흉하게 마무리 하진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연기자로서 연기만 잘 해왔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이른 바 꾼들에게 칭찬받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김종수(영화 <1987>에 출연) 선배랑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그냥 되는대로 일했으면 지금쯤 건물 하나는 샀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고. 선배는 '건물을 바라보며 갔으면 그 건물에 묻혀버렸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말에 아, 나답게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무슨 소신 있게 산 것도 아니고, 단지 연기를 잘하고 싶은 연기자였을 뿐이다. 이게 답이더라. 그러니까 뭔가 부족해보이면 자꾸 노력해서 채우려는 것이지."

어떤 소명


 배우 조민수

배우 조민수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회사에 취직해야만 했던 그였다.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우연히 한 전자제품 광고모델로 발탁됐고 조민수는 10만 원을 받았다. "직장인 초봉이 10만 원이던 때였다"며 "이후 영화 <청 블루스케치>라는 작품이 들어왔고, 광고를 찍으려면 연기를 해야 하는구나 싶었다"며 연기자로서 정체성을 다지기 시작했을 때를 언급했다. 바로 그가 지금까지 계속 연기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아무 것도 몰랐다가 사람들이 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민한 거지. 그리고 그 이름에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이고. (다른 진로는 생각 안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별 생각 다 했지! 아는 동생이 운영하던 카페에 찾아가서 서빙이라도 한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 동대문 시장에 있는 다른 동생에게 가서 옷 도매 일 좀 배워보겠다고 했는데 역시 안 된다고 그랬다. 어느 새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것(연기)밖에 없게 됐더라. 그만큼 공간이 좁아져 있던 것이지. 제 또래 배우들이 다들 고민했던 지점이다. 그래서 연기를 더 열심히 잘 해야지 결심한 것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만큼 실제 생활 반경이 좁아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다만 조민수는 "그럴수록 더욱 일과 일상을 잘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일상을 잘 지내는 것 이상으로 조민수가 현재까지 영화계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이 있다. 인디포럼 등 독립영화제 행사를 진행하거나 용산 참사를 다룬 <공동정범> 같은 영화의 좌석 200여석을 직접 구매해 관객과 나누는 등 그는 독립예술영화계에선 행동하는 영화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을 언급하니 오히려 그는 신중해 하는 모습이었다. 조민수는 "제가 한 건 아무 것도 없어서 창피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고, 오히려 제가 그 분들에게 받은 게 더 많다"며 말을 아꼈다.

"어떤 부귀나 명성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업계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그는 나지막이 드러냈다. 인기 정도에 따라 빠르게 소모시키고 다른 대체재를 찾는 최근의 흐름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제가 걸은 길, 후배들이 제 뒤통수를 보고 올 거잖나. 잘 해나가야지" 마치 다짐처럼 뱉은 말이 기자와 배우 조민수 사이에 약속처럼 남았다. 


조민수 마녀 박훈정 김다미 최우식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