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축구인들은 "국내 팬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2002 한-일 월드컵 신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안방에서 지켜보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익숙해진 나머지, K리그의 현실은 외면한 채 큰 기대와 요구를 일삼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월드컵만 되면, 평소 축구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들마저 '최소 16강'을 외친다고 믿는다.

그럴 수도 있다. 팬들의 수준은 정말 높아졌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진출 덕에 시작된 EPL 중계가 어느덧 13년째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와 이탈리아 세리에A, 독일 분데스리가 등도 실시간으로 챙겨왔다. 주중에 치러지는 UEFA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도 밤잠을 설쳐가며 즐겨왔다.

 지난 2009년 5월 5일 영국 런던의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아스널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첫번째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지난 2009년 5월 5일 영국 런던의 에미리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아스널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첫번째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 EPA/ 연합뉴스


전문가와 팬 사이의 경계도 차츰 허물어졌다. 이제는 웬만한 축구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팬들도 수두룩하다. 대학 졸업장만큼이나 중요한 토익 점수와 영어 실력 덕분에 해외 축구 사이트를 이용하는 팬들도 다수다. 국내 전문가들이 해설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정보를 앞세운다면, 금세 드러나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나 SNS가 떠들썩해진다. 팬들의 수준만큼은 세계 최정상급 못지않은 대한민국이다.

한국 축구팬들의 눈높이는 정녕 현실 너머에 있나

팬들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이전보다 향상됐음을 포함한다. 팬들은 이제 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1년치 예산이 얼마이고, 현실적인 목표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인지한다. 모든 팀이 우승을 목표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팀에 맞는 스타일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대략이나마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국가대표팀도 다르지 않다. 한국 팬들은 대한민국 축구의 현실이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전처럼 마냥 '월드컵 16강 진출'을 부르짖지 않는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선 우즈베키스탄의 부족했던 1골이 한국을 본선행으로 이끌었고,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선 이란이 한국의 러시아행을 도왔다는 것을 안다.

이번 대회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낮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꺾고 본선에 오른 스웨덴, 1994 미국 월드컵부터 6회 연속 조별리그 통과에 성공한 멕시코, 설명이 필요 없는 '디펜딩 챔피언' 독일과 한 조에 속해 '16강 진출은 힘겹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굳이 본선 상대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대회 준비 과정이 16강 진출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본선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나온 '어차피 3패'란 외침은 팬들의 시각이 이상보다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었다. 스웨덴전과 멕시코전에 대한 예측과 경기 후 반응은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팬들의 능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일부 축구관계자들은 팬들의 반응을 두고 '언제부터 우리에게 16강이 당연했느냐'는 발언을 했고, 이에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일부 축구인들의 서운한 목소리에 동의할 수가 없다. '팬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진 탓에 선수들의 부담이 극에 달하고,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외려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인지한 팬들 덕에 부담 없이 싸울 수 있고, 최선을 다한다면 박수까지 받을 수 있는 시대다.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린 것은 팬뿐만이 아니었다. '역대 최상의 조'라는 평가를 받은 2014 브라질 월드컵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를 등에 업고 출범한 홍명보호는 대회를 시작하기 전에 16강을 자신하는 분위기를 내보였다. 특히 알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했다. 마치 '우리의 전력이라면, 알제리쯤은 당연한 1승 상대'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첫 경기에서 러시아를 잡고, 벨기에와 조 1위 싸움을 벌이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팬들 사이에서 나온 게 아니라 홍명보호와 축구인이 주도하는 모양새였다.

대회 당시 팬들의 비판이 극에 달한 이유 중 하나는 안일한 준비 때문이었다. 대표팀은 기본적인 예방접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사전 캠프지(미국 마이애미)와 베이스캠프(브라질 이구아수), 1차전(vs. 러시아)이 열리는 브라질 쿠이아바까지의 이동 거리 및 전혀 다른 날씨는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 실패를 불러왔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2차전 한국과 알제리의 경기가 열린 23일 오전(한국시간) 포르투알레그리의 베이라히우 주경기장에서 손흥민 등 선수들이 2대4로 완패한 후 허탈해하고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2차전 한국과 알제리의 경기가 열린 지난 2014년 6월 23일 오전(한국시간) 포르투알레그리의 베이라히우 주경기장에서 손흥민 등 선수들이 2-4로 완패한 후 허탈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력 분석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전에서는 승점이라도 따냈지만, 알제리전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전반에만 스코어가 0-3이었다. 대표팀은 상대 진영으로 중앙선을 넘어서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상대팀의 기세에 완전히 눌렸다. 철저한 준비 없이 그라운드에 들어선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이런 점에 실망했고, 화를 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 팬들은 여론에 따라 기대치를 높였던 것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전력을 극대화하지 못한 과정을 보며 훨씬 더 분노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러시아로 향한 과정은 지난번과 달랐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독일전이 남아있지만, 현재까지의 과정과 결과 모두 '3전 전패' 예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월드컵 기간만 되면 너도나도 축구팬? 진정 돌아볼 것은...

그들은 이야기한다. "국내 리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으면서, 월드컵 기간만 되면 너도나도 축구팬이 되어 16강을 외친다"고 말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K리그가 월드컵 때 보이는 절반의 열기만 가져올 수 있어도 지금보다 큰 흥행을 얻고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를 축구팬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K리그는 하나의 상품이다. 구단과 선수는 돈으로 얽혀있다. 팬들도 돈과 시간을 들여 경기장을 찾고, 응원을 보낸다. 그러자면 우선 경기가 재밌어야 한다. 관중들이 또다시 경기장을 찾을 수 있도록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다른 종목이나 리그와 차별화된 특별한 재미를 K리그에서 찾기가 힘들다. 몇 팀을 제외하면, 승점에만 집착하는 모습뿐이다. 말이 좋아 '중원 싸움이 치열한' 거지, 냉정하게 보면 '우당탕 부딪히다가' 경기가 끝난다. 프로 선수임에도 안정적인 볼 터치와 정확한 킥을 자랑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월드컵이 끝나면 축구를 외면하는 팬들의 잘못일까. 그들이 K리그를 찾으면, 언젠가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알렉산드레 파투, 악셀 비첼과 같은 수준의 선수를 K리그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서도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라운드가 가득 차면, EPL 못잖은 속도와 공격 축구가 넘쳐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재미있는 축구를 구현할 지도자와 선수가 넘쳐나는가.

붉은 물결 이룬 응원 인파 23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전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 붉은 물결 이룬 응원 인파 지난 2014년 6월 23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전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 이희훈


미안한 얘기지만, 월드컵 때라도 이 정도 성원을 보내는 팬들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축구의 현실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다. '그들만의 리그'란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K리그 현장을 찾는 팬이 있다. 국가대표 경기라면 발 벗고 나서는 붉은 악마가 있다. 성원을 아끼지 않는 이들에 서운한 소리를 내뱉을 때가 아니다. 쓴소리에 담긴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성찰의 자세가 필요하다. 팬의 쓴소리에 반박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일부 팬들이 선수의 SNS에서 막말을 일삼고, 심지어 선수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는 분명 잘못됐다. 그것은 비판이 아닌 폭력이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 축구팬은 그 정도로 수준이 낮지는 않다. 한국 축구가 실패를 반복하는 원인이 무엇이며,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디부터 바뀌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바뀌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월드컵이면 성원을 보내는 게 우리 국민이다.

팬들의 눈높이는 현실 너머에 있지 않다. 외려 한국 축구의 미래를 결정지을 이들의 눈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팬들의 눈높이를 되짚는 게 아니라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축구계의 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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