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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명숙은 페미니즘 운동의 맨 앞에서 가부장제와 맞서 싸우던 전사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군대 가산점 논란'이나 '페니스'로 상징되는 남성의 폭력적인 성 차별에 반론을 제기하며 싸움의 전방에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호주제 폐지 이후 한동안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다소 의외인 <여신을 찾아서>(판미동)라는 책으로 그녀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전위적인 페미니스트가 여신학자가 되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과 전위적인 사상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던 이들이 평화활동가, 생명평화 전파자, 혹은 영성 운동가가 된 것을 보면 변절이나 현실 도피 혹은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불편한 생각이 먼저 앞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랬다.

하지만 곧 얄팍하고 가벼운 나의 판단과 생각의 틀이 깨졌다. 그녀는 그녀가 꿈꿔온 세상을 위한 운동을 접은 것이 아니었다. 운동이 지향해야 할 근본 뿌리를 발견해 방향을 재설정하고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내기를 하던 북풍과 해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그 때문이다. 전사였던 그녀가 발견한 여신과 여신영성, 여성성이 갖는 부드러움, 따뜻함, 생명 잉태와 보살핌이 생명을 살리고 지속시킨다는 것을 깨달은 페미니스트의 전환적 삶의 선택이 바로 '여신'이었다.

김신명숙은 내면의 절실한 요구에 따라 한 단계 더 진화된 방법으로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함께 하는 세상을 향한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찾은 방법이 독자로서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종교적 색체나 의례에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양성 성향 중 억압되고, 굴절되고, 폄훼되었던 여성성을 되살려내는 것이, 생명을 살려내고 아름답게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운동가가 겪었듯 저자 또한 풀리지 않는 인간 존재 의미와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을 놓고 좌절과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페미니스트 여성학자인 저자가 엄마로, 딸로 살면서 충족할 수 없던 내면의 갈구를 여신영성과 여신문화를 통해 발견하고 채워나가는 과정이 <여신을 찾아서>에 진솔하게 담겨 있다.

여신을 찾아서 인류 최초의 신은 여자였다.
▲ 여신을 찾아서 인류 최초의 신은 여자였다.
ⓒ 판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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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2005년 후반 유니온 신학대학원 현경 교수가 건넨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를 통해 두 가지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았고 그것이 바로 여신이라고 고백한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여신으로 수렴되는구나. 여신을 만나기 위해 굽이굽이 삶의 단계들. 고비들을 지나왔구나. 나도 모르게 일어나 여신을 껴안고 함께 춤추었다. 그때까지 내 삶의 두 주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와 페미니즘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지나온 과정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여신은 그 둘을 아우르는 온전한 존재였고, 내 삶은 이제 온전성을 향한 질적으로 다른 단계를 마주한 것이다. - 25쪽

책은 크게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여신문화 유적 순례기'다. 첫 번째는 크레타 순례를 통해 접한 여신 문화 흔적과 개인적 체험을 담아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 전역, 강원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는 여신 문화의 흔적을 소개한다.

책에는 자궁의 상징인 동굴, 우물, 산,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마름모와 역삼각형,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하는 나선 무늬, 물을 상징하는 물결 무늬,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소머리 등 많은 상징과 남성중심 사회가 강등시킨 여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고, 키워내고,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을 이어온 모든 곳에 자리한 것이 여성성이며 여신문화다. 인류 최초의 신이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생명이 여성의 자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명의 씨를 받아 키워내는 여성의 자궁, 생명을 지속시키는 물, 땅, 해와 달, 나무와 풀, 그 모든 것에 깃든 에너지를 여성성으로 보며 여신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것이 평화, 생명, 나눔, 보살핌, 치유가 여신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까닭이다.

5세기경 만들어진 토우 여신상 몸통은 첨성대와 유사하다. 몸통 가운데 뚫린 구멍은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상징한다고 한다. 저자는 선덕대왕 때 지은 첨성대 역시 자궁의 상징인 우물이자 여성의 몸을 본 딴 여신상이며 농사를 위해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라는 무척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우물인 첨성대는 스스로가 큰 자궁이다. 맨 위 정자석은 성산일출봉처럼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하늘로 뚫린 구멍, 즉 하늘 자궁이다. 가운데 창구는 여체의 자궁이니 지상의 자궁이다. 결국 창구 안의 어두운 공간은 자궁 속의 자궁이자 하늘 자궁과 지상의 자궁이 만나 감응하는 곳이다. 그러니 그 힘으로 탄생시키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 못할 일도 없다. 그곳은 신성성이 최고로 증폭된, 하늘과 땅이 아우르는 지고의 지성소다. 신라와 가야인들은 그 지고의 성소에서 건국 왕들을 탄생시켰다. – 465쪽
 
검파형 구멍이 뚫리고 둥근 알 모양을 한 제기 받침, 알 모양의 둥근 구슬이 달린 황금 허리띠 등은 여신의 대리자인 여제가 왕권을 신탁하고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한다. 고대 여신은 하늘과 땅, 인간에게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장할 권한을 지닌 초월적 존재이자 생명과 치유의 에너지를 나눠주는 절대자이자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하늘 자궁에 땅 자궁, 물 자궁, 인간과 뭇 생명체의 자궁 등 천지의 자궁들을 품고 있는 검파형은 한마디로 우주 대여신을 표상한다. 단순한 지모신이 아닌 것이다. 검파형 여신상 내부에 구획된 공간들은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을 것이다. 검파형 여신상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나면 문득 깨닫게 된다. 마고할미, 설문대할망, 개양할미 같은 우리 여신들이 왜 그렇게 거대한 몸집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서술성모가 왜 하늘의 백마이자 우물의 계룡이면서 동시에 계림 숲이었는지 한눈에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467쪽

저자는 여신영성이나 여신문화 탐구는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여성성인 생명존중, 치유, 보살핌은 지구별에 함께하는 모든 생명이 공생하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성성은 모든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살만큼 살아보니 어머니로 생명을 낳고 기르고 보살피는 일이 갖는 의미를 깨우치게 됐다'는 저자의 고백은 찢기고 좌절하며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 온 모든 이들이 깨우친 진실이 아닐까. 자궁에서 나와 자궁과 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생명이 순환하는 길이기에.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생명의 가치, 돌봄의 가치를 존중하는 일, 여성성을 극대화 하고 여신의 현신인 어머니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녀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고 남성들도 함께하는 것이 저자가 제안하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해법이다.

이제야 알겠다. 하찮은 일로 무시당해 온 여성의 일, 그 숱한 보살핌의 행위들, 밥해서 먹이고 씻기고 아플 때 돌보고 텃밭을 가꾸는 일들이 얼마나 신성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왜 이제는 남성들도 그 일을 배워야 하는지를. - 554쪽

덧붙이는 글 | 여신을 찾아서/ 김신명숙/ 판미동/ 19,500



여신을 찾아서

김신명숙 지음, 판미동(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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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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