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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모 방송국의 아침 생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담당 피디가 여성이었는데, 하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 작가, 현명한 작가는 말이야, 부장님이 오시면 팔짱도 끼고 '부장님 오셨어요?' 하고 살갑게 인사도 하고 그러는 거야. 그 전 작가는 그런 걸 잘했는데 정 작가는 안 되네."

그냥 평범하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게 잘못이었나 보다. 한 번은 남자 동료가 내 뒷담화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따지고 드니까 결혼을 못했지. 남자들은 기 센 여자 안 좋아해."

잘못은 그쪽이 했는데 어째서 내가 업무와 상관없는 결혼 여부로 비난당하는 걸까. 그보다 애초에 그쪽이 일을 제대로 했으면 따지고 드는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언제나 나긋나긋한 여성 스태프의 역할이 요구되었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비난받곤 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남자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고, 여자들은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살살 달래가며 남자를 조정하는 여자가 지혜로운 여자라는 조언들. 이런 말들에 늘 숨이 막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인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 조이스박 에세이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 스마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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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에세이집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의 부제는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이다. 보는 순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여성 멘토들의 책을 읽었지만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를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 <빨간 모자>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 작가는 모든 동화를 '본질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라 소개한다.

옛 이야기는 거울처럼 듣는 사람들을 비춰낸다. 같은 이야기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권선징악의 이야기만 읽어내는 사람도 있고, 이야기 속 숨겨져 있는 섹슈얼리티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조이스박 작가는 마치 무녀가 신을 불러내듯이 동화속 여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삶 속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 숨겨진 상징과 비밀을 길어낸다. 그래서 작가가 길어낸 이야기 속에는 작가 자신의 소개대로 '유색인종,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피부양자가 딸린 비혼자'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인어공주의 이름을 불렀다. 무섭고 두려우나 너무도 궁금한 삶의 영역에 호기심으로 발을 들일 때마다 갚은 숲속 할머니 집에 가는 빨간모자의 이름을 불렀다. 기가 세면 사랑받지 못하니 따지지도 말고 목소리도 높이지 말라는 소리들 들을 때마다 두꺼비와 뱀을 뱉어내는 못난 딸을 떠올렸다. 나를 지우고 인내와 눈물로 주어진 역할들을 견뎌야 했을 때는 쐐기풀 옷을 뜨는 공주를 떠올렸다. (중략) 매번 그녀들과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불어와야 하는 새로운 삶의 모퉁이를 자주 접하게 되는 바람에, 늘 그녀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소환해서 내가 가는 길의 작은 등불로 삼았다. (프롤로그에서)


그래서 그녀가 들려주는 동화 속에는 외국에서 삶을 살며 유색인종으로 느꼈던 감정들, 여성의 삶,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 대한민국에서 피부양자가 딸린 비혼자가 살아가며 겪는 일들이 녹아있다. 물론 모든 내면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들은 그녀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모든 '소외된 자들' 말이다.

꽃 같은 말을 거부하며

동화 <다이아몬드와 두꺼비> 속 착한 딸은 입을 열 때마다 꽃과 보석을 뱉고, 나쁜 딸은 입을 열 때마다 두꺼비와 뱀이 튀어나왔다. 작가는 옛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우리가 사는 현실로 불러낸다.

동화속의 꽃 같은 말을 하는 딸은 왕자의 마음에 들어 공주가 되고, 뱀 같은 말을 하는 딸은 외롭게 죽었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남자들이 좋아하는 꽃 같은 말을 하는 여자와 두꺼비와 뱀 같은 말을 하는 여자의 삶은 극명하게 나뉜다.

이 책에는 다양한 유명 삽화가들의 작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 편에 수록된 삽화 이 책에는 다양한 유명 삽화가들의 작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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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엔 고 최진실의 CF가 큰 인기였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그녀는 화면 속에서 우리를 쳐다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사랑스럽지 않다'고, '시시비비를 가리면 따지고 드는 게 된다'고, '지혜로운 여자는 아는 것도 모른다고 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이 모든 것은 여자가 너무 잘나면 남자 '기(氣)'를 죽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이 미스터리한 남자의 '기(氣)'라는 존재는 너무나 섬세하고 연약하기에 살살 달래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이 땅의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꽃 같은 말만 하기를 다짐받아 왔다.

이런 분위기에 반발감이 든 작가는 대학 시절, 혀에 가시가 돋혔다고 했다. '혀에 가시가 돋힌다'는 표현은 영어로는 '날카로운 혀(sharp tongue)를 가졌다'고 한단다(작가는 영문학자다).

무엇보다도 내게 백 개 혹은 천 개의 얼굴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보이라고 강요받는 거 같아서 싫었다.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수용하겠다는 세상이 너무 답답했다. (p.031)

그렇게 가시가 돋친 혀를 지닌 그녀는 <리어 왕>의 코델리아 이야기를 한다. 코델리아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를 소금처럼 사랑한다'고 대답했던 막내 공주다. 그녀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얻어 소금 자루와 함께 광야로 쫒겨나고 만다.

이 일화를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보기 좋은 얼굴만 보이고 듣기 좋은 말만 하라고 강요하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두 가지 삶의 양식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하나는 그네들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어 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며 이용하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이며 탄압을 받고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기 내부의 자기 통합성integrity을 지키며 사는 것. (p.34)


사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삶에 정답이 있을까. 각자 자신의 성정대로 자신에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찾아 사는 삶을 살아내면 그만인 것이다. '날카로운 혀'를 지닌 저자는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가치를 스스로 일구어 내겠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비극적인 결말이 될 수도, 행복한 결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결말보다 그 과정이 더 소중한 법이다.

푸른 수염은 부정적인 남성상이며, 그가 봉인했던 작은 방의 아내 시신들은 오랜 세월 살육 당해온 여성들의 상처였다. 상처를 마주한 이야기 속 주인공은 내면의 지혜를 불러 탈출한다.
▲ '푸른 수염의 딸로 자란다는 것'에 실린 삽화 푸른 수염은 부정적인 남성상이며, 그가 봉인했던 작은 방의 아내 시신들은 오랜 세월 살육 당해온 여성들의 상처였다. 상처를 마주한 이야기 속 주인공은 내면의 지혜를 불러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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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소리를 찾아서

꽃 같은 말만 하라고 하지마라. 뱀 같은 말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헤집어야 비로소 꽃 같은 말의 가능성도 껴안을 수 있다.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느라 꾸며대는 꽃 같은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와 피어나는 꽃 같은 말이다. (p.36)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어쩌면 좀 더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담당 피디의 말대로 그날 스튜디오를 방문한 부장님의 팔짱을 끼고 살갑게 굴었으면 내 삶은 좀 더 쉬워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여행 이후 지금은 방송작가가 아니라 여행작가로 살고 있다.

물론 비정규직의 삶에서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전환했기에 해피엔딩은 아니다. 동화처럼 고난을 극복한 주인공이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하는 결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단 한 가지 위안이 있긴 하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애쓰느라 나 자신을 구겨 넣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럴 땐 이런 구절을 읽으며 위안을 받으면 된다. 마음에도 없는 꽃 같은 말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니니까. 모든 외롭고 막막한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제 우리에게는 '남자들이 보기에 좋은 모습만 보이고,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존재로 살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다 가진 존재이다. 꽃 같든 뱀 같든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 선택에 의해, 우리 필요에 의해 어느 쪽의 말이든 할 것이다. 이제 대를 거듭해 속삭이며 전해온 이런 동화 속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자. (P.36)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 꽃 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 같은 말

조이스 박 지음, 스마트북스(2018)


태그:#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여성에세이, #조이스박, #JOYCE PARK, #페미니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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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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