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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6.27 09:44수정 2018.06.27 12:15
아침나절, 서울을 떠나 경북 영덕에서 일 보고 숙소에 들어오니 딱 저녁 때다. '영덕'이라고 하면 대개 '대게'를 떠올린다. 영덕 강구항은 대게의 메카 같은 곳이다. 강구항에 들어서면 게판도 그런 (대)게판이 없다. 항구 초입 다리부터 커다란 대게 조형물이 반긴다. 6월 중순, 대게는 이미 철이 끝난 상태다. 그나마 6월까지는 살이 차 있는 홍게마저 시나브로 살이 빠지는 시기라서 많은 대게 집을 스쳐 지나갔다.

검푸른, 때로는 옥색 물빛의 바다를 끼고 '블루로드'를 달렸다. 방향은 고래불 해수욕장쪽. 목적지는 따로 없다. 고래불까지 가다가 마음에 드는 식당이 있으면 들어갈 요량이었다. 출장지에서 협력사 분들과 저녁에 반주까지 곁들여 식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혼밥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한들 식사 자리가 일 자리의 연장이 되기 십상이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하기 때문이다.

출발하기 전, 출장지의 식당을 알아보고 출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현지에서 '감과 촉'에 의지해 식당과 메뉴를 선택한다. 감과 촉으로 선택한 메뉴는 대부분 실패한다. 실패했을 때는 편의점에 들러 좋아하는 컵라면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열에 아홉은 편의점에서 라면을 샀다. 실패하면 속상하지만 한 번 성공을 위해 아홉 번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 또한 재미고, 다음에 실패를 줄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한 번 성공하면, 야구에서 1할 타자가 뜬금없이 9회말 역전 만루홈런을 친 것하고 비슷한 쾌감을 느낀다.

영덕 강구항, '게판'도 그런 게판이 없다

영덕의 해안도로. 검푸른, 때로는 옥색 물빛의 바다를 끼고 '블루로드'를 달렸다.

영덕의 해안도로. 검푸른, 때로는 옥색 물빛의 바다를 끼고 '블루로드'를 달렸다. ⓒ 김진영


지난해 이맘 때 영덕으로 출장을 갔다. 영덕은 대게뿐만 아니라 산과 바다 사이 널직한 들판에서 감자며 옥수수가 난다. 백두대간 끄트머리 영덕에서는 여름철에 감자나 옥수수가 재배된다. 찌면 분이 하얗게 피는 분질감자 생산자를 만나고, 물회를 먹을 요량으로 영덕의 작은 포구들을 구경삼아 돌아다녔다. '여긴가, 아닌가, 저긴가'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느낌이 온 횟집에 들어가니 1인분은 안 판다고 해서 나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디서든 1인분을 파는 물회를 안 판다고 하니 기분이 몹시 상했다.

다시 차를 몰고 가니 작은 삼거리 모퉁이에 횟집이 있었다. 길 옆에 바로 주차장이 있는 걸 보고 주차하기 편해 보이는 식당을 골랐다. 조금 전의 거절이 생각나 '물회 1인분도 돼요?' 여쭤보니, 주방과 붙어있는 안방에 놓인 테이블에 앉으라고 한다. 잠시 후, 물회가 나왔다. 내가 익히 봐왔던 물회와 모양새가 달랐다. 살얼음이 가득 차 있거나, 얼음을 동동 띄운 육수가 없었다. 회와 채소만 담겨 있었다. 멀뚱멀뚱 쳐다보다 "육수 없어요?" 물어봤다. "옆에 있잖아요"라며 하얗게 김 서린 물통을 가리킨다.

"이건 물이잖아요?" 
"이 동네 처음인가 보네. (회와 야채 그릇에)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드시다 물 넣고 먹으면 물회, 물 없이 먹으면 회(덮)밥. 여기서는 그렇게 먹어요."

시원한 육수에 밥을 말아먹을 요량이었기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먹고 나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면서 고추장을 넣고 비볐다. 첫 숟갈을 뜨고나니 눈이 번쩍 뜨였다. 맛있다. 여름 생선치곤 쫄깃하고 회의 식감도 좋다. 무엇보다도 뒷맛이 살짝 매콤한 고추장이 전체 맛을 아우른다.

"회가 무슨 어종인가요?" 
"성대하고 노래미, 소라 삶은 거..."

여름 성대가 이렇게 쫄깃했나 싶을 정도로 차진 맛이었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얼추 그릇 바닥이 보인다. 물을 넣었다. 실수다. 밥 먹는 사이 시원함도 사라졌고 회도 줄어서,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애매한 맛이 됐다.

저녁 무렵, 지난해 기억을 되살려 식당을 찾아가다 축산항으로 빠졌다. 사방을 보니 이미 어둠이 자리를 잡았다. 지나면서 본 작은 포구의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다. 더 가봐야 헛걸음 칠 듯 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축산항이지만, 이미 문 닫은 곳이 있다. 서둘러 구석구석 다니다 '물회 전문'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집에 빨려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는 순간 '감과 촉'이 발동했다.

다른 것보다 횟감 종류에 따라 적힌 물회가 대부분이었다. 메뉴 수가 적은 곳일수록 실패할 확률은 줄어든다. 실패하면서 체득한 경험이다. 회밥을 주문하니 채소가 별로 없다고 한다. 괜찮다며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니 쟁반에 반찬 몇 가지와 회밥이 나왔다. 경험이 있으니 육수를 찾지 않고 고추장으로 쓱쓱 비볐다. 탱글탱글한 부시리 회가 맛있다. 곁가지로 슬쩍 끼어있던 멍게를 씹으니 바다 향이 반긴다. 지난해 실패를 거울삼아 찬물을 넣지 않고 끝까지 회밥으로 먹었다. '회밥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회가 맛있어야 물회도 맛있다

물회를 맛있게 먹었던 곳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두 회가 맛있는 곳이었다. 제주의 옥돔 물회와 활한치 물회, 강원도 아야진의 가자미 물회 등 모두가 회가 맛있는 곳이다.

물회를 맛있게 먹었던 곳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두 회가 맛있는 곳이었다. 제주의 옥돔 물회와 활한치 물회, 강원도 아야진의 가자미 물회 등 모두가 회가 맛있는 곳이다. ⓒ 김진영


전국 여러 곳에서 물회를 먹어봤다. 그 가운데 물회를 맛있게 먹었던 곳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두 회가 맛있는 곳이었다. 제주의 옥돔 물회와 활한치 물회, 강원도 아야진의 가자미 물회 등 모두가 회가 맛있는 곳이다. 등골까지 짜릿한 육수도, 입안 가득 채우는 달콤한 육수도 내지 않는 곳이었다. 물회를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에 먹는다고 하는데, 너무 그 두 가지에만 매몰된 게 아닌가 싶다. 물회든, 회밥이든 회가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이튿날, 영덕을 출발하기 전 지난해에 먹었던 대진항의 횟집을 찾아갔다. 2년 이상 묵힌 고추장에 비빈 도다리 회밥으로 점심을 든든히 먹고 출발했다. 영덕-상주 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영덕을 오가는 길이 한결 편해졌다. 예전엔 일곱여덟 시간 걸렸는데, 이젠 슬렁슬렁 가도 다섯 시간이면 된다. 오던 길에 잠시 동청송 IC를 나왔다. IC를 빠져나오면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신촌약수터가 지척이다. 약수 한 병을 채워 출발했다. 영덕에서 물회로 배를 채운 탓에 청송의 고추장 닭구이와 백숙은 다음을 기약하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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