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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조령 북봉대로 들어가는 입구가 만발한 꽃잎으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은 1592년 4월 20일 청도읍성을 짓밟은 일본군이 그 이튿날인 21일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한 치욕의 침입로였다.
 팔조령 북봉대로 들어가는 입구가 만발한 꽃잎으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은 1592년 4월 20일 청도읍성을 짓밟은 일본군이 그 이튿날인 21일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한 치욕의 침입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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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용학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한 팔조령 북봉대-무동재-봉산서원-청호서원 탐방이 6월 23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시행됐다.

일반시민과 도서관 관계자 등 45명이 참가한 이날 행사는 '수성구 선조들이 보여준 선비 정신의 유적'을 찾는 역사기행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행사는 해설, 질의와 응답, 현장 답사, 체험 등으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청도와 대구 경계 팔조령 정상부의 봉수대 터부터 답사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과 대구시 달성군 용계면을 잇는 팔조령 북봉대 터부터 답사했다. 이 고개는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일부로, 1592년 4월 21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넘은 진군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 무렵 산적이 들끓어 혼자 또는 소수 인원으로는 위험하고 여덟(八)명 이상이 서로 도와가며(助) 넘어야 하는 고개(嶺)라 하여 팔조령(八助嶺)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북봉대는 청도(현재의 화양읍) 남산의 남봉대에서 전해주는 긴급 소식을 대구 수성못 뒤 법이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 군사 시설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남대로의 고개였으므로 주막 등 과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여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황무지로 보일 뿐이다. 그래도 안내판을 세워놓은 덕분에 '팔조령 꼭대기 휴게소 식당에서 150미터쯤 올라가면 있다'는 배경지식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이 봉수대 터를 확인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팔조령 북봉대 터
 팔조령 북봉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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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사이를 넘는 고개를 팔조령이라 부른다. 여덟 명 이상이 모여서 넘어가야 산적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고개의 대구 쪽 산비탈에 석주사가 있다. 조선 시대의 팔조령 고갯길은 석주사 천불전 뒤에서 고개마루로 이어졌다. 지금의 자동차 도로와는 다르다.팔조령 터널과 구도로가 나눠지는 지점의 조금 위쪽에 나 있는 길로 들어서면 석주사가 나온다. 물론 길 입구에 석주사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찾기는 쉽다. 임진왜란 당시 팔조령을 넘는 고개길은 이 절 천불전(사진에서 보는 천왕문 오른쪽 뒤편 법당) 뒤쪽에서 북봉대(팔조령 봉수대)로 나 있었다. 그런데 이 길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좁은 산길로 여겨지겠지만 조선시대의 '경부고속도로'인 영남대로의 일부였다.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이 고개를 넘어 대구로 진격한 것도 이 길이 가장 넓은 대로였기 때문이다.
▲ 영남대로의 팔조령 석주사 대구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사이를 넘는 고개를 팔조령이라 부른다. 여덟 명 이상이 모여서 넘어가야 산적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고개의 대구 쪽 산비탈에 석주사가 있다. 조선 시대의 팔조령 고갯길은 석주사 천불전 뒤에서 고개마루로 이어졌다. 지금의 자동차 도로와는 다르다.팔조령 터널과 구도로가 나눠지는 지점의 조금 위쪽에 나 있는 길로 들어서면 석주사가 나온다. 물론 길 입구에 석주사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찾기는 쉽다. 임진왜란 당시 팔조령을 넘는 고개길은 이 절 천불전(사진에서 보는 천왕문 오른쪽 뒤편 법당) 뒤쪽에서 북봉대(팔조령 봉수대)로 나 있었다. 그런데 이 길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좁은 산길로 여겨지겠지만 조선시대의 '경부고속도로'인 영남대로의 일부였다.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이 고개를 넘어 대구로 진격한 것도 이 길이 가장 넓은 대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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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일행은 팔조령에서 파잠(파동의 임진왜란 당시 이름)으로 내려와 무동재를 방문했다. 무동재는 임진왜란 직전 정사철, 채응린과 더불어 대구 유림을 이끌었던 세 거유(巨儒) 중 한 분인 전경창 선생과, 임진왜란 발발시 경상좌수영 우후로 재직했으나 수사 박홍이 '화살 한 발 날리지 않고 도주(조선실록의 표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향 파잠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던 전계신 등을 섬기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전경창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7년 전인 1585년에 별세하였으므로 직접 의병 활동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공산의진군(대구 지역 의병군 총연합)의 1대, 2대, 3대 의병대장을 역임한 서사원, 손처눌, 이주가 모두 자신의 제자였으므로 '훌륭한 스승'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는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이 1565년(명종 20)에 완공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지역 선비들은 그를 뒷날 연경서원 별사에 모심으로써 제자 또는 후배로서의 성심을 다했다.

전경창, 전계신 등을 섬기기 위해 지은  재실 무동재
 전경창, 전계신 등을 섬기기 위해 지은 재실 무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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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 의병 총연합 부대의 의병대장은 모두 전경창의 제자들

답사자 일행을 안내하기 위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전병걸(全柄傑) 선생은 무동재의 내력에 대한 설명은 물론 주련까지 세밀히 해설해주었다. 주련은 전경창 선생의 좌우명을 6행으로 운문화한 것인데, 재실의 기둥이 7개인 탓에 전병걸 선생이 제목에 해당하는 '身心內外勤謹誠實(신심내외근근성실, 몸과 마음을 부지런하고 삼가며 성실히 하라)' 1행을 추가하였다.

6행의 주련을 필자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衣冠嚴整謂之外修 (의관엄정위지외수)
겉모습을 단정히 하면 밖으로 수양이 된 것이고
行義純潔謂之內修 (행의순결위지내수)
행동이 올바르면 마음의 수양을 이룬 것이다.
內外具修何人不求 (내외구수하인불구)
안팎이 두루 반듯하면 모두가 칭찬하리라.

衣冠不整謂之外惰 (의관부정위지외타)
겉모습이 단정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고
行義不修謂之內惰 (행의불수위지내타)
행동이 올바르지 않으면 마음이 게으르다고 지적받을 것이다.
內外具惰何人不唾 (내외불타하인불타)
안팎이 두루 게으르면 모두가 침을 뱉으리라.

향사례 시범을 보이고 있는 주성일(朱星日) 궁사. 2015년 세계민속궁 대회에서 3등에 입상한 주성일 궁사는 현재 대구대학교 일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 궁사이다.
 향사례 시범을 보이고 있는 주성일(朱星日) 궁사. 2015년 세계민속궁 대회에서 3등에 입상한 주성일 궁사는 현재 대구대학교 일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 궁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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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자들은 무동재 앞뜰에서 향사례(鄕射禮) 체험을 했다. 향사례는 3월 3일과 9일 9일 임금 앞에서 선비 활쏘기 대회가 열리고 나면 그 이튿날인 3월 4일과 9월 10일에 각 지방별로 개최되는 활쏘기 대회를 말한다. 이는 당시 사회가 선비에게 문무 겸비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무술 능력을 강조한 전경창 선비의 무동재 앞에서 활쏘기 체험

무동재 앞에서 향사례 체험을 한 것은 이 재실의 주인인 전경창 선비가 평상시 제자들에게 활쏘기 훈련을 강조했고, 그 자신이 방 안에 늘 활을 걸어놓고 생활한 일을 되살리자는 뜻에서였다.

국궁 쏘기 체험은 달구벌죽궁 김병연 대표, 향사례 대구시민단 이임선 사무국장, 세계 민속궁 대회 3위 입상 경력을 자랑하는 주성일 대학생 궁사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답사 참가자들은 향사례처럼 조를 나누어 활쏘기 경연을 실시했는데, 우승은 이원경, 준우승은 이석원 씨가 차지했다.

  
손린을 모시는 봉산서원
 손린을 모시는 봉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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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답사 일행은 상동의 봉산서원과 황금동의 청호서원을 답사했다. 두 서원은 서원의 일반적 건물 배치 방식인 전학후묘(앞에 교육 공간, 뒤에 제향 공간)와 어긋나는 구조를 보여준다. 대략 터가 좁아 그렇게 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봉산서원은 강당 앞 뜰에, 청호서원은 강당 담장 밖 산비탈에 사당이 세워져 있다. 

전학후묘의 일반적 서원 배치 형식과 많이 다른 봉산서원, 청호서원

봉산서원에 모셔진 손린은 호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름난 효자였다. 청호서원에 모셔진 네 분 중 손처눌, 류시번, 정호인 세 분은 임란과 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손조서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승복하지 않고 낙향하여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인물이다. 모두들 언행일치의 선비정신을 꼿꼿하게 보여준 전형적 선비라는 점에서 답사자들은 "수성구에 이렇게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서원들이 숨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면서 입을 모았다.

청호서원 강당
 청호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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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도 계속 이어지는 용학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용학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은 7월에도 계속 이어진다. 7월 7일에는 '독립운동가만 모신 전국 유일의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 주제로 필자도 참여한다. 7월 12일과 19일 '대한광복회를 중심으로 본 대구지역 무장 독립운동'과 '태극단 사건을 중심으로 본 대구지역 학생 독립운동'(김병우 대구한의대 교수) 강연이 모두 도서관 내 강의실에서 오후 7시 시작된다.

7월 21일 13시에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답사에 나선다. 답사 예정지는신암선열공원- 달성공원- 조양회관 터- 청라언덕- 상화고택- 대구형무소 터- 대구사범학교 항일투쟁지- 대구상업학교 항일투쟁지- 대구고보 동맹휴학 투쟁지 터- 태극단 기념탑 순서이다. 참가 문의는 053)668-1701.


태그:#무동재, #팔조령, #주성일, #북봉대, #청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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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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