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들의 섬>의 작품 포스터

영화 <개들의 섬>의 작품 포스터 ⓒ 20세기 폭스


웨스 앤더슨 감독의 <개들의 섬>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관심을 끌었는데, 첫째는 보기 드문 퍼펫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감독이 웨스 앤더슨이라는 점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이후로 자취를 감춘 인형극의 형태를 가져왔는데 개라는 은유적인 설정이 인형의 형태와 맞물려 어떤 느낌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문라이즈 킹덤> 등을 연출한 웨스 앤더슨이 전작 보다 한층 무거워진 소재를 어떻게 다뤘는지 궁금증도 들 만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 본편의 설정을 납득시키기 위한 내레이션이 나온다. 일본 전통화의 형태를 빌려 개와 인간의 싸움을 묘사하는 장면은 본편의 무대인 현대에 이르러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영화상으로 수백 년이 흐른 만큼, 싸움의 이유는 없어지고 감정만이 남아 스크린 위에 잔존한다. 이 작품은 인간이 개를 혐오하게 하고자 1분여의 시간을 투자한 후 그것이 러닝타임 내내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 지속성으로 영화의 결말에는 개들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개들과 인간의 화해라는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사실 그 평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조차 미리 예견되어 있다.

소통되지 않을 두 집단의 갈등

이 영화의 주요 갈등 상황은 인간 권력 집단이 개 하위 집단을 외딴 섬으로 추방하는 것인데, 자연스럽게 무언가가 연상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만큼 정치적이고 파급적이다. 심지어 작중에서 대다수 인간이 일본인으로 설정됨으로써 인간의 언어는 일본어가 되고, 모든 개들과 일부 인간만이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개들의 언어는 영어가 된다. 영화상에 자막은 오직 영어만이 해석되며, 일본어는 자막을 달지 않으리라고 도입부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인간과 개 두 집단이 소통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두 집단 중에서 서로의 언어를 아는 이는 몇몇뿐이다. 명백한 이분법으로 갈라진 두 집단에서 일본어를 아는 어느 개와 영어를 하는 어느 인간의 역할이 도드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많은 평자의 지적대로 영어를 하는 미국인 교환학생은 남의 나라 문제에 이상하리만치 감정적이다. 물론 그 문제를 외면하는 게 옳은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면에서 그녀의 행동은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그 의문이 드는 이유는 개와 인간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는 개일 뿐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며, 표면적으로 주종관계를 유지하지만 '떠돌이 개'처럼 쉽게 버려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끌어올 수 있는 여러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 같은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인간이 아닌 개'라는 점에서 인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를 떠올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 개들은 인간처럼 살기를 요구하지 않으므로 그건 적절한 비유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개들은 인간이 아니라 개로서의 합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현실 세계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아랫것들은 아랫것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된다.

자가당착에 빠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주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개들의 섬>이라는 제목처럼 '개'가 주요한 소재로 다루어지니 관객은 '개'에 자신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마리 개들은 네 마리와 한 마리의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 한쪽은 인간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애완견'파이고, 다른 한쪽은 인간과 개는 동등하다는 '떠돌이'다. 영화는 '떠돌이'를 '애완견' 파로 설득함으로써 '떠돌이'는 인간 아래에서 삶의 당위와 안녕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상하관계의 이분법에 설득 당하던 관객은 권력 아래에서 삶의 당위와 안녕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

영화 내내 우직하게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던 '떠돌이'가 마음을 바꾸게 되는 계기는 우연히 만난 자신의 혈육과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남자아이를 통해서다. 이 영화에서 개와 인간의 대립이 '고바야키' 가문의 복수심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혈통 간의 싸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떠돌이'는 '혈통'에 감화되어 '애완견' 쪽으로 돌아선다. 반대로 개들을 위협하던 '고바야키' 시장은 어느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개연성을 제외하고서도, 이 장면은 '인간'은 혈통을 이겨내고 '개'는 혈통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상하다. 혈통 대립으로 핍박받은 개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혈통을 인정해야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으로 변화한다. 말하자면 과거에 있던 '잘못만을' 이겨내고 다시 '과거처럼' 잘살아보자는 것이다. 결말에 해당하는 이 장면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그전까지의 행보가 메시지를 흐리고야 만다.

그 이전의 행보를 다시금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가 개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들을 구하려는 '남자아이'의 목적성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모험이므로 남자아이의 목적이 곧 영화의 중심 서사가 된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경호견 '스파츠'를 찾아 외딴 섬에 경비행기를 몰고 올 정도로 헌신적이지만, 그 헌신은 '주종관계'라는 의무감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 개들을 사람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귀중품처럼 다룬다. 그는 '떠돌이'에게 먹이와 목욕을 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앉기'나 '물어와'를 명령한다. 즉, 남자아이에게 '개'는 계급을 극복하기보단 계급을 인정하면서도 배려해야 할 위치다.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과거를 인정하는 순간

위의 두 가지에 대한 해석이 평자마다 갈리기에 섣불리 무언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단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누군가에게는 과오를 인정하고 과거처럼 다시 살아보자는 게 좋게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대의 실수로 잘못된 일과 그 위에 형성된 사회에서, 잘못된 일만을 잊고 형성된 사회를 유지하자는 건 마치 실수를 묵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개의 헌신'에 대한 동상과 사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영화가 민주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결말 부분에서 제시되는 그 두 가지가 영화가 제시한 해결책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다섯 마리의 개들은 항상 투표를 통해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 데, '리더' 역할의 '떠돌이'의 말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어서 나머지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투표이기에 '떠돌이'도 다수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와중에 떠돌이와 나머지 견들이 엇갈리게 되고, '이기적인' 떠돌이의 의견이 오히려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들이 엇갈리는 무렵이 바로 '떠돌이가 혈통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다른 견들이 없을 때 남자아이와 떠돌이 단둘만이 남아 목욕을 통해 자신이 '검은 개'가 아니라 '하얀 개'임을 깨닫게 되고, 떠돌이는 남자아이와 친해지게 된다. 말하자면, '혈통을 알던' 애완견들의 의견이 기존까지 옳았다면 이제는 '혈통을 모르던' 떠돌이의 의견이 맞게 된다. 결국 영화의 변곡점은 '과거를 아는 게' 아니라 '과거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98% 득표율의 독재자로 묘사되는 '고바야키' 시장이 겉으로는 반대파에게도 발언권을 주지만 뒤로는 방해공작을 벌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들이 하위 계급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수단에 가깝다. 대중은 고위층의 선전 선동으로 놀아나고, 고위층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공적인 힘을 소모한다. 이것은 감독 본인의 말처럼 '오직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기에 작중 상황이 일본과 타 국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고 여겨질 심산이 크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이야기이며, 감독이 일본 영화를 많이 참조했다고 발언한 것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그것에 의도가 있는 듯하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상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이 영화의 삽입곡 전부가 일본풍을 띄고 있지만 그중에 딱 하나가 팝송인데, 'I won't Hurt You'라는 곡이다. 해석하자면 '해치고 싶지 않아' 정도다. 밴드 이름이 너무 길어 옮겨 적을 수 없는 이 노래는 작중에 두 번 정도 등장한다. 그 중에 하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특기인 수평 트래킹 숏으로 개와 남자아이가 장소를 이동하는 모습을 연달아 보여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대한 오마주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의 50년대를 풍미한 감독인데, 일본 영화와 할리우드 작법을 적절히 혼합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혹자는 구로사와를 두고 '동양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데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게 아닐까 싶다. 어찌 됐든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주요 특징은 '사제관계'를 거듭해서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 부분으로 <개들의 섬>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방향이 보이게 된다.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스승과 제자는 말 그대로 전통적인 권력관계다. 어리석고 아둔한 제자를 거두어들인 스승은 몹시 자애롭고, 시간이 흘러 제자는 스승을 따라 변화한다. 그러던 중 스승이 위기에 처하고, 제자는 스승을 구하러 여행을 떠나게 된다. 두 인물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를 인정하면서도 엄격하며, 제자는 스승을 인정하면서도 반항한다. 쉽게 말해 갈등 상황에서도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제관계는 '스승과 제자'라는 형태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아버지와 아들, 의사와 환자, 장군과 부하. 이 중 몇몇은 권력이라고 하기도 모호하지만, 사회적으로 의무감이 통용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쉽게 말해, 구로사와의 사제 관계는 의무가 유대와 얼마나 섞여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 공과 사의 경계에서 어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개인의 몫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로사와 영화의 인물은 항상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그 갈등은 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미 행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의 만류로 방해받는다. 그럼에도 인물은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다. 그건 마치 이것이 영화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결말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인물들은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야만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은 아니지만, <개들의 섬>처럼 사회와 인간의 관계가 그려진 <이키루>에서는 사무절차에 집착하던 어느 공무원이 암 선고를 받고 소외 받은 사람을 위해 힘쓰게 된다. 두 영화는 공무로 인해 소외된 하층민을 구제하는 어느 인물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는다. '해치고 싶지 않아'라는 노래의 제목은 '공무'를 위해 누군가를 사지로 내몰아야 했던 인물의 마음가짐처럼 느껴진다. <이키루>에서 주인공은 빈민촌에 공원을 만들려 온갖 힘을 쏟고, <개들의 섬>에서 남자아이는 경호견 '스파츠'를 구하려 섬 안으로 날아온다.

공무원과 시민의 관계는 '국민'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시민이 속한 환경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상하관계이기도 하다. 물론 공무원이 높은 쪽이라는 것은 아니고, 명령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른바 관료제라고 불리는 피라마드형 권력체계는 아래에서 위로의 상향식 의사 전달에 소극적이다. 나쁜 사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좋든 싫든 국가라는 의무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공무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개들의 섬>에서 인간과 개의 관계가 '애완견'이라는 이름으로 '공무'를 유지했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일방적으로 돌봄 받는 '애완'이 아니라, 서로에게 득이 되는 '경호견'이라는 상호보완적 관계다.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영화 <개들의 섬>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글을 마치며

<이키루>에서 주인공은 사무실에 앉아 도장만 찍으며 하루를 보낸다. 주변인에게 월급만 축낸다고 불리는 그는 국가에 길들여진 '애완견'처럼 보인다. 그런 그에게 '공무'라는 당위성이 '소외'로 향하게 되는 건 '암 선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들의 섬>에서는 '고바야키' 가의 비호를 받던 남자아이가 경호견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은 '개 독감'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키루>에서는 '스승'쪽이 <개들의 섬>에서는 '제자' 쪽이 병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개들의 섬>은 제자가 스승처럼 '공무'를 얻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건 수직이라는 권력관계가 아니라 웨스 앤더슨의 수평 트래킹 숏처럼 나란히 걸어가는 사제관계를 뜻한다. 플루에 걸린 애완견이 경호견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보호에 대한 대가로 '경호'라는 이름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아무런 대가 없이 받기만 한다면 훗날의 불이익에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해치고 싶지 않아'라는 곡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들려올 수 있는 목소리다.


영화 웨스 앤더슨 개들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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