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 포스터.

영화 <변산> 포스터.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지 10년. 1평 남짓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온 청춘은 그 자체로 애잔하다. 주변에선 비루한 인생이라 폄하하기 일쑤일 것이고, 스스로 역시 자신이 원했던 꿈은 희미해지고 의지 역시 약해졌을 무렵일 것이다.

영화 <변산>은 6년 간 힙합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의지를 불태워 온 학수(박정민)로부터 시작한다. 프로그램 출연 단골손님임을 증명하듯 흔들리지 않는 눈과 자세, 하지만 유일하게 그를 붙잡는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해결되지 않은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고향이었다.

어떤 비루한 삶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삶과 청춘이 처한 현실, 뭔가 잘못된 사회를 매섭게 꼬집으며 속사포 랩을 선보이는 학수는 동시에 공허함을 가지고 있다. 발렛파킹(대리주차) 아르바이트 중 우연히 마주친 고향 친구들로 인해 학수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말의 가족애를 발휘해 고향 변산으로 향한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불빛이 매일 가득한 대도시에 비해 변산은 보잘것없다. 학수는 건달이며 노름에 빠진 채 가족을 등진 아버지, 병들어 아버지 없이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며 분노와 회한을 키워왔다. 랩은 그래서 그의 감정을 표출시키고 승화시킬 유일한 출구였을 것이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영화 <변산> 관련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는 그렇게 끌려가듯 고향으로 돌아온 학수를 향해 등장하는 여러 주변 인물을 제시한다. 학수를 짝사랑했던 선미(김고은)와 학수가 짝사랑 했던 미경(신현빈), 학수가 떠난 뒤 학수 어머니의 묘소를 돌봐온 세 친구들(배제기, 최정헌, 임성재), 그리고 학수가 괴롭혔던 친구 용대(고준) 등.

세월의 흐름이 그렇듯 이들은 그 안에서 모두 변했다. 마음이 변했다는 게 아니라 고향을 떠나지 않은 이들은 그곳을 터전 삼아 자신의 삶을 나름 충실히 일구고 있었다. 학수만 뿌리 없이 떠돈 셈이다. 이준익 감독이 빛나는 지점은 이런 서사와 정서를 진지한 드라마가 아닌 촌스러운 코미디로 풀었다는 데 있다.

결코 가벼운 코미디가 아니다. 원망하고 미워했던 자신의 아버지(장항선)와의 재회 이후 학수는 말 그대로 자신이 애써 잊고 무시하려 했던 과거를 마주하며 그대로 그때의 잘못을 돌려받는다. 건달이 된 용대는 학수를 겁박하며, 선미는 '지금의 모습이 너의 아버지와 다를 게 없다', '영혼이 망가졌다'며 타박한다. 두 사람 모두 학창시절 학수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던 이들이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을 파출소로부터 학수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돼 변산 밖으로 당분간 나갈 수 없는 처지. 운명처럼 다가온 이 상황 안에서 학수와 그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다시 정립해 나가는지가 <변산>의 주요 골격이다.

버려진 항구에서 피어난 것들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사실 학수는 랩이 아닌 시를 쓰는 소년이었다. 복잡다단한 집구석을 나와 그가 안식을 느낄 유일한 공간은 마을 뒷산. 그곳에서 숱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그는 시를 썼다. 그리고 선미는 그로부터 노을과 시를 남몰래 배웠다. 세월이 지나 선미는 문단이 주목하는 소설 작가가 됐다. 시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했던 학수는 랩으로 감정을 분출하는 무명 래퍼가 됐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변산>은 영락없는 청춘영화다. 일견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규정한다면 사실 이 영화는 나이 지긋한 감독이 그럴싸해 보이는 희망을 덧발라놓은 그저 그런 꼰대 영화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영화 <변산> 관련 사진.

영화 <변산> 관련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변산>의 묘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학수 아버지, 그리고 비슷한 증세로 병원에 입원 중인 선미 아버지(정규수)의 잔잔한 각성에 있다. 주변 인물로 기능적으로 묘사되고 말았을 법한 이 캐릭터들은 영화 초중반부터 등장해 결말 부분까지 충실하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학수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 학수에게 남긴 '특별한 유언'을 기억하자.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몇 마디의 말은 어쩌면 기성세대가 다음세대에게 꼭 하고 싶었던, 진작 표현했어야 했던 진심이니 말이다.  

평소 힙합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준익 감독이 힙합을 소재로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수상했다. 영화 곳곳에 힙합 음악이 흐르긴 하지만 역시 <변산>은 힙합 영화로 보기에 무리수가 있다. 참신한 리듬과 랩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힙합 뮤지션들의 애환을 다루지도 않았다.

<변산>은 이준익 감독의 장기가 총망라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휴머니즘이 담긴 드라마다. 음악 영화를 가장한 <라디오 스타>, 사극을 가장한 <왕의 남자> 등에서 꾸준히 보여 왔던 인간 군상에 대한 그만의 애착이 <변산>에 밀도 높게 담겨 있다. 그의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이야기 안에서 하나의 입체적인 인간으로 존재했다.

<변산> 속 학수도 그렇다. 아버지를 원망했기에 그와의 연결고리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그의 모습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촌스러움을 가장한 이 드라마 안에서 각 인물들이 소모되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또 하나. 학수는 시를 쓰는 소년이었다. 영화 <동주>로 그간 선보인 휴머니즘 드라마와는 또 다른 결을 선보인 이준익 감독이 박정민을 내세웠다. <동주>에서 시를 쓰던 송몽규가 학수로 분했을 때 관객 입장에선 시로부터 파생된 이 래퍼 유망주의 정서를 보다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박정민은 학수의 감정선을 살리려 직접 가사를 썼다고 한다.

한 줄 평 : 인생은 기대와 상상대로 가지 않는 법.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소중하다
평점 : ★★★★(4/5)

영화 <변산> 관련 정보

연출 : 이준익
출연 : 박정민, 김고은, 고준, 신현빈, 김준한, 배제기, 최정헌, 임성재, 장항선, 정규수, 정선철 등
제공 및 배급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작 : 변산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크랭크인 : 2017년 9월 11일
크랭크업 : 2017년 11월 18일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23분
개봉 : 2018년 7월 4일 


변산 이준익 박정민 김고은 쇼미더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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