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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은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지만, 맛은 없는 개살구'라는 뜻으로, 흔히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대자연의 햇살과 기운을 받고 자란 개살구가 듣기에는 다소 거북스럽겠지만,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상당히 쓸모가 있는 비유이다. 외부로 보이는 것과 실제의 차이가 클 때, 화려하게 치장된 어떤 수단이 별 효과가 없을 때 자주 사용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기관, 공공정책, 행정 서비스 등 공공영역에서도 빛 좋은 개살구로 비유될 수 있는 상황이 자주 발견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1999년에 법의 제정과 함께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책임운영기관제도가 있다. 정부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이 제도 또한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법률만 보면 이 제도는 참 좋아 보인다. 기관에 조직·인사·재정상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행정 운영의 효율성과 행정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고 한다. 그리고 운영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평가를 실시한다. 그럴듯하다. 각종 법률과 지침 등의 제약 때문에 경직되어있는 행정기관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서비스 질을 높인다고 하니, 혁신적이다. 공공부문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그런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해당 법률의 목적과 정의에 포함된 화려한 수식어에 도취되어 책임운영기관제도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겠으나, 법조문의 난해함을 이겨내고 앞으로 전진하다 보면 이 제도가 가진 한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물론, 여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법률을 꼼꼼하게 들여다볼 사람은 많지 않다. 정부 기관 운영에까지 신경 쓸 만큼 삶이 한가하지도 않고, 내일 당장 세금, 통신비가 오르거나, 양육비를 더 받는 등 나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관이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한다고 했는데 무슨 사업계획서도 내야 하고, 예산을 전용하거나 초과수입금을 사용할 때도 상위 부처의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항 곳곳에서 묻어난다. 조직 및 인사 관리는 좀 자유롭게 할 수 있나 했더니 기존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르라고 한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부처에 소속된 기관에게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와 같은 막강한 부처를 상대로 협의해서 일하라고 하니 제대로 일하기 힘들겠다는 느낌이 든다.

법률을 확인해서 든 걱정은 분위기와 느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책임운영기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이 제도의 무용론을 말한다. 가장 큰 문제는 기관 운영의 자율성이 없다는 것이다. 조직·인사·예산상의 여유는 법률에만 존재할 뿐 갖가지 견제 장치로 인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상위 부처에서 자율성을 줬으니 성과를 내라고 다그치는 현실이다.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평가를 하고, 다른 기관과 경쟁을 시켜 순위를 매기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이다.

책임운영기관 평가는 기관장의 연임과도 연결되다 보니,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당연히 실적에 대한 압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현장에서 벌어질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평가를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평가를 잘 받기 위한 강의도 듣고, 평가하는 교수들이 좋아할 만한 분석기법도 따로 배운다고 한다. 쓸데 없는 곳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이렇다 보니 기관의 고유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현실. 어떤가. 이쯤 되면, 내일 당장 월급이 오르지 않는 제도라고 하더라도 정말 그런가 하고 눈길을 줄 만하지 않는가.

이렇게 현재 책임운영기관은 법조문에 드러난 화려한 목적과 다르게 굴러가고 있다. 매년 기관 운영의 성과를 평가하고, 순위를 매겨,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있지만, 그 내막을 보면 씁쓸함이 남는다. 기관 업무의 특성도 서로 다르고, 근무하는 여건과 환경, 조직의 권력 관계 또한 차이가 있는 기관들을 동일한 평가 체계로 평가를 하고 있으니, 현장의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한 책임운영기관제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쳐 써야 할까. 고쳐질 수는 있을까. 개살구가 다음 해에 새로운 대자연의 기운과 햇살을 받으면, 지금과 달리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다들 시절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지금, 책임운영기관제도 존치 여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태그:#책임운영기관, #빛 좋은 개살구,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자율성, #성과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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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소장으로 일했습니다. 정부와 사회 이슈, 사람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 많은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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