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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제공: 냉면을 먹고 싶던 나
중요 힌트: 모스크바에 조선 식당이 있음을 알려준 친구
상황 조정: 현지 조선 식당을 찾아내고, 러시아 월드컵 현지 회합을 이끌어낸 대장님
결과물: 남북 화해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모스크바 대동단결
일시: 2018년 6월 19일 저녁 7시
장소: 모스크바 시내의 조선 식당 '고려 (KOPЁ)'


시작은 단순했다. 갑자기 4월 27일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로 계속 먹고 싶었던 '평양냉면'을, 러시아 월드컵을 위한 출국 하루 전에 먹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나라를 떠났는데 계속 '평양냉면'이 머리를 떠다니면 곤란하니, 얼른 내가 제일 좋아하는 냉면집에서 북한식 냉면을 먹었다. 언제나처럼 '나 이거 먹었다'를 자랑했고, 친구들이 하나둘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언니, 저 모스크바에 있을 때 북한 식당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때(2007년)는 남북 상황이 좋지 않아서 가 볼 수가 없었어요. 이번에 한 번 들러보세요!"
"그래? 모스크바에 '고려'라는 식당이 있던데, 우리 거기서 만날까?"
"좋아요! 우리들 같이 모스크바에 있을 수 있는 날이 6월 19일인데, 그날 저녁 어때요?"

평소 알고 지내던 동생이 페이스북에 '모스크바의 평양냉면'에 대한 힌트를 남겼고, 이번 여행을 같이 준비하는 대장님이 식당을 찾아서 '대동단결'을 제안한다. 우선, 우리가 그동안 나누었던 일정을 확인하여 가능한 날짜를 던졌고, 자연스럽게 6월 19일 저녁시간으로 '러시아 월드컵 원정단'의 모스크바 대동단결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제야 북쪽으로 한참 올라온 것이 실감이 나네요!
▲ 하늘로 시원하게 뻗은 침엽수림 이제야 북쪽으로 한참 올라온 것이 실감이 나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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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벌어진 한국과 스웨덴의 1차전을 뒤로하고, 아침 일찍 모스크바로 오는 무료 열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펼쳐진 녹색의 평원과 푸른 하늘과 맞닿으려는 듯 높이 솟은 자작나무 숲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푸른 하늘은 흐리고 무겁게 낮아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만 같은 모스크바의 공기는 습하고 끈적했다.

서둘러 친구의 집에 짐을 풀고, 오늘 저녁의 대동단결에 참전 준비를 한다. 친구네 집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근처인데, 이곳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고려'까지는 버스를 타면 한 시간쯤 걸리는 곳이다. 쭉 뻗은 레닌 대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서, 드디어 고려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의 조선 식당인 '고려'에서, 러시아 월드컵 원정 여행 성공 기념 '평양냉면' 대동단결을 준비합니다.
▲ 꽃다발을 사들고,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모스크바의 조선 식당인 '고려'에서, 러시아 월드컵 원정 여행 성공 기념 '평양냉면' 대동단결을 준비합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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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고려'라고 쓰여진 안내판입니다.
▲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한글 '평양고려'라고 쓰여진 안내판입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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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설명으로는 고려의 러시아어식 표기는 КОРЁ인데, 여기에 Я을 붙이면 '한국'의 러시아식 표기인 KOPEA가 된다고 하니 뭔가 더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번이 첫 번째의 북한 식당 방문이기도 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여, 근처의 마켓을 들러 꽃다발을 하나 준비했다.

마흔해가 넘는 세월을 살았지만, 지금처럼 남과 북의 사이가 '희망'으로 다가왔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부디, 지금의 이런 평화 분위기가 계속 지속될 뿐만 아니라, 결실을 맺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 뒤로, 선녀가 가득한 그림이 눈에 익숙해요.
▲ 식당은 익숙한 우리들의 문화로 가득채워져 있었습니다.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 뒤로, 선녀가 가득한 그림이 눈에 익숙해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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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식당에 들어서자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여성 종업원분들이 반갑게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어딘가 뭉클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무척이나 반가웠던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미 몇몇 테이블에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폴란드와 세네갈전을 보며 식사를 하는 한국 팬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종업원 한 분이 물병을 가져다주신다. 물을 주시나 보다, 하고 있었더니, 가져온 꽃을 물병에 꽂아주시는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는 꽃을 귀하게 여겨서 식당에 꽃을 가져가는 경우 종종 있는 서비스라고 하는데, 그 순간은 그녀의 친절이 나를 무척이나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 처음 만난 북한 동포들이예요. 반갑습니다!
▲ 푸른 유니폼의 여성 종업원들이 바삐 움직입니다. 아, 처음 만난 북한 동포들이예요. 반갑습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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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챙겨주신 화병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두 가지 색깔이 섞인 장미 꽃다발입니다. 우리도, 잘 지낼 수 있겠죠?
▲ 처음만난 그들에게 주고 싶던 선물 얼른 챙겨주신 화병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두 가지 색깔이 섞인 장미 꽃다발입니다. 우리도, 잘 지낼 수 있겠죠?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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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가 있나요?"
"지하라서 사용하기 곤란합니다."


일행들에게 먼저 들어와 있음을 알리려고 와이파이를 물었더니,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억양으로 저렇게 대답한다. 그녀의 억양도 단어의 쓰임이나 문장의 구성도, 우리와는 다르지만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메뉴판에도 짐작은 할 수 있으나,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는 메뉴들이 가득했지만, 이것 역시 통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를 잊지 않은 것만 같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었고 반가움에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겠지?

평양냉면과 회냉면으로 냉면 대 회동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맛은 짐작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언젠가 반드시! 평양의 옥류관에 가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하기에 충분했어요!
▲ 냉면 듀엣 등장이오! 평양냉면과 회냉면으로 냉면 대 회동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맛은 짐작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언젠가 반드시! 평양의 옥류관에 가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하기에 충분했어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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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매우 즐겁게 끝이 났다. 냉면의 맛이 기대했던 것과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이것도 진짜 옥류관 냉면에 대한 기대를 배가시키는 것일 테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양한 음식들을 시키다 보니, 그동안 먹었던 식사에 비해서는 비싼 느낌이긴 했지만 오늘의 이 감동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산을 마치면서 사들고 온 (그리고, 그녀가 건네준 꽃병에 꽂혀있던)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가지런하게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영수증을 받아들었습니다.
▲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글씨체? 가지런하게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영수증을 받아들었습니다.
ⓒ 임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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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거 드려도 될까요? 제가 오늘 처음 북한 사람을 뵙는 것이 너무 반가워서 가져왔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어떤 느낌이라고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면서, 북한의 동포를 어떻게든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 적이 없어서인가, 오늘의 이 만남은 무척이나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그냥 좋다. 그들의 반가운 얼굴이 선한 미소가, 언제까지나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식상하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 아닌가?

한반도의 내일은, 반드시 평화로울 것을 믿어요! 오늘, 정말 반가웠습니다.
▲ 멀리로 또 하루의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내일은, 반드시 평화로울 것을 믿어요! 오늘, 정말 반가웠습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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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러시아 월드컵맞이 '모스크바 평양냉면' 회합은 대성공! (리춘희 아나운서의 톤으로 읽어주세요!) 이제, 제대로 된 평양냉면도 먹었으니, 제대로 된 '붉은 광장'의 레닌을 만나러 가볼까?


태그:#아, 맞다. 월드컵이지!, #러시아 월드컵 2018, #모스크바, #북한음식점, #평양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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