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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태 독립지사의 이야기가 상당 부분 담겨 있는 윤이조 자서전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의 표지
 윤상태 독립지사의 이야기가 상당 부분 담겨 있는 윤이조 자서전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의 표지
ⓒ 아인아이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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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역사공원(송현로7길 38) 북쪽 출입구에 닿아 잠시 걸음을 멈춘다. 출입구 바깥 일대에 윤상태(尹相泰, 1882∼1942) 고택과 덕산(德山)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윤상태 고택의 상인동 909번지와 덕산학교의 상인동 865번지에는 아파트와 공영 주차장 등이 들어섰다. 그 결과 지번 자체가 아예 멸실되어 버렸다. 가시적인 유적은 없지만 윤상태 지사의 존재는 역사에 남아 있다. 그의 활동과 업적을 돌이켜 본다.

군수 벼슬을 내던진 윤상태

윤상태는 나이 23세인 1905년 1월에 거제 군수가 되었다. 그런데 열 달 뒤인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그는 군수 자리를 던지고 경북 고령군 성산면 우곡동에 들어 은거했다.

그 이후 1911년 우곡동에 일신(日新)학교를 세워 신교육 운동을 펼쳤고, 1913년에는 대구은행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에는 박상진(朴尙鎭), 서상일(徐相日), 이시영(李始榮), 박영모(朴永模), 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결성했다. 그는 통령(統領)에 선임되어 단체를 이끌었다.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는 3·1운동의 영향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했다.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지 안일사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지 안일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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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했다. 3·1독립운동 당시 경남 일원의 시위를 대동청년 단원인 변상태(卞相泰), 김관제(金觀濟) 등이 주도하도록 이끌었다. 윤 지사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가 상해로 건너갈 수 있도록 자금도 지원했다.

이 일로 윤 지사는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지금의 월곡역사공원 동북쪽 솔밭 아래에 덕산학교를 세워 항일 민족교육 운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월곡역사공원 북쪽 출입구에 서서 윤상태 고택과 덕산학교가 있던 터를 다시 바라본다. 여전히,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서양식 건물과 고층 아파트, 공영 주차장만 가득하다. 하지만 윤상태 지사의 자취는 무형의 정신사가 되어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새로운 형태로 역사에 조명된 윤상태 지사

1957년에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윤이조 씨가 자서전 성격의 책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를 펴냈다. 책은 1부 '내 고향, 나의 유년', 2부 '해방 그리고 전쟁', 3부 '생의 끝자락', 부록 '윤상태 조선국권회복단 통령 활동 연혁 및 문헌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의 명칭에서 짐작이 되듯이,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윤이조 저자의 할아버지인 윤상태 지사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1부 '내 고향, 나의 유년'의 '할아버지는 윤 거제 어른으로 불렸다', '할아버지는 온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참 많이도 우셨다' 등의 소제목은 본문을 읽지 않고도 내용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윤상태 고택과 덕산학교는 비록 남아있지 않지만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는 우리에게 지사의 삶을 돌이켜보게 해준다. 책의 서문을 통해 '할아버지가 하신 일을 내가 다 알지는 못한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주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할아버지 윤상태 독립지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헌신적인 민족애를 다시 한번 역사에 아로새긴 저자의 마음씀은 새로운 역사 자료로 각인될 것이다.

우병기 추모비
 우병기 추모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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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순국한 우병기 지사

월곡역사공원 안으로 들어서서 우병기(禹丙基, 1903∼1944) 추모비를 본다. 당시 주소로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 1093번지'에서 출생한 우병기는 윤상태가 설립한 사립 덕산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양산 제조업에 종사했다.

그는 1939년 11월 5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 문제 시국 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회원들은 1941년 8월까지 8회에 걸쳐 모임을 가지면서 시국을 논의하는 한편, 회원을 확충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활동이 포착되어 1942년 2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942년 3월 5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청진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4년 대전 형무소로 이감되었지만 19 44년 10월 26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우하교 묘비
 우하교 묘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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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권회복단 활동을 한 우하교 지사 묘비

공원 안에는 우하교(禹夏敎, 1872∼1941) 묘비도 있다. 묘소는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지고 비석만 남아 있는데, 앞면에 '애국지사 노암 우공지묘, 배 유인 옥천전씨 부좌'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우하교는 조선국권회복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에 여념이 없었던 1917년 7월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3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1919년 '파리 장서운동' 때는 달성 지역 책임자를 맡아 친족 우성동, 우경동, 우승기, 우찬기, 우하삼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 일과 관련하여 6개월 실형을 언도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월곡역사공원에는 그 외에도 파리장서비, 임진왜란 의병장 우배선 장군 좌상, 우배선 장군의 말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의마총 빗돌, 낙동서원, 역사박물관 등 많은 답사 자료들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마음에 새기려면 아마 하루는 충분히 바쳐야 할 듯하다. 그렇지만 앞시대 사람들의 뜨거운 역사가 서린 공원에서 몇 시간의 낮을 보내면 그만큼 보람있는 하루를 영위한 것으로 뒷날 기억되리라.

덧붙이는 글 | 윤이조 저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아인아이엠씨, 2018년 5월 12일), 132쪽, 1만5천 원.



태그:#윤상태, #윤이조, #조선국권회복단, #우병기, #우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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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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