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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생가와 뒷동산 묘소
▲ 다산 유적지 정약용 생가와 뒷동산 묘소
ⓒ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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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가 물러나고 한 차례 장대비가 내려서인지 푸르고 쾌청한 하늘이 선물처럼 주어진 15일 남양주시 다산 유적지를 찾았다. 다산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 비해서 생소한 이곳은 사실 정약용이 나고 자란 곳인 동시에 유배에서 돌아온 57세부터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고 영면을 취하고 있는 곳이다.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교통편이 나쁘면 찾기 꺼려지는 편인데 다산 유적지는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도 꽤 편리한 곳이다.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하차하여 56번 버스를 타면 다산 유적지로 수월하게 갈 수 있다. 단 배차간격은 40분임을 감안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
▲ 여유당 다산 정약용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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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고향에 돌아오다

올해는 정약용의 해배(귀양에서 풀려남) 및 목민심서 저술 200주년 되는 해이다.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의 여파로 유배형을 받아 1818년까지 귀양살이를 하며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유배생활 동안 정약용의 학문이 자라나고 무르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배기간 머물렀던 전남 강진에 비해 정약용이 태어나고 성장했고, 말년을 보낸 그의 고향 마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어 안타깝다.

다산은 1762년 음력 6월16일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 유적지는 작은 시골 마을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200여년 전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와 운길산에 둘러싸인 이곳은 고된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다산이 사색을 하고, 벗들과 교류하기 좋은 환경이었으리라.

1836년 2월22일 홍씨부인과의 회혼일(결혼 60주년)에 자손과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산은 세상을 떠났다. 다산의 유적지가 특별한 것은 그의 생가에서 묘소까지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정약용과 홍씨 부인의 합장묘
▲ 다산의 묘소 정약용과 홍씨 부인의 합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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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정돈된 생가와 묘소이지만 1925년 대홍수에 집이 떠내려갈 때 다산이 남긴 서책들이 모두 허망하게 사라질 뻔 하기도 했다. 5,320권 183책에 달하는 저술이 보존되어 있었지만 한강이 범람할 정도로 엄청난 물난리 속에 모두 떠내려가고 후손 정규영이 겨우 『여유당집』만을 서궤에 넣어 탈출해서 다산의 묘역에 올라 대성통곡을 했다는 후일담이 남아 있다.

이후 1972년 경기도 기념물 7호로 지정된 후 1986년 20칸의 전통 한옥 원형대로 복원하여 유적지로 조성하였다. 2009년 11월 개관한 실학박물관에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정약용의 주요 저서와 홍씨부인이 보낸 치마에 아들에게 쓴 편지 『하피첩』 뿐만 아니라 유형원, 박지원, 박제가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서와 유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아내가 보낸 치마에 아들에게 쓴 편지
▲ 하피첩 아내가 보낸 치마에 아들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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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실천과 행동만이 개혁을 완성한다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정치·경제·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개혁과 개방으로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 그의 실학정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를 통째로 바꿔야한다고 생각한 그는 개혁의 지침이 되어줄 책을 쓰는 데 평생을 바쳤다.

다산의 3대 저서라고 불리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쓴 이유에 대해 『자찬묘지명(회갑을 맞아 지나온 인생과 학문적 업적을 정리한 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실학박물관에 전시된 다산의 3대 서적
▲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_왼쪽부터 실학박물관에 전시된 다산의 3대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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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 먼저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목민심서』 법과 제도가 제대로 집행되려면 공무원들이 청렴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흠흠신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만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사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 모두의 실천과 행동이 전제조건이므로 정신과 철학을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다산의 정신은 200년 전 조선사회에 멈춘 것일까?

국민을 무시하고 편협한 정치를 일삼던 권력자들의 추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소망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다산 정약용의 개혁정신을 되새기는 기회를 가지길 바란다. 이상국가는 멀리 있는 누군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태그:#남양주시, #정약용, #다산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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