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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예린이 당시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피해자 예린이 당시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 김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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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라 믿고 싶었던 그 날

전남 보성에서 보낸 2박 3일 학술답사의 마지막 밤이 지났다. 아침 7시에야 술자리도 파장에 이르렀다. 건국대학교 철학과 집행부원이었던 예린(당시 21살)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실엔 최후의 다섯 명이 남았다. 예린, 친한 남자 동기, 고학번 남자 선배 A, 그리고 옆 호실에서 놀러 온 언니 두 명. 감겨오는 눈을 못 이긴 남자 동기는 그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지금 방문 열면 다 깰 텐데, 거실에서 딱 두 시간만 눈 붙여야겠다.'

예린도 친한 남자 동기 옆에 대충 자리를 잡고 몸을 뉘었다. 그때까지도 언니들과 남자 선배 A는 술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잠결에 목 아래로 팔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누군지 참 정신없이 자나 보다' 싶은 순간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운 예린의 뒤에서 팔베개하듯 자리 잡은 누군가의 손이 점점 가슴 쪽으로 내려왔다.

순간 잠이 확 깼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예린은 눈을 떴다. 앞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자 동기 녀석의 뒷통수가 보였다. 옆 호실에서 놀러 온 언니 두 명은 각자의 호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예린이 학술 답사에서 처음 본 고학번 남자 선배 A, 그밖에 없었다. 소리를 질렀다간 맞을 것만 같았다.

앞에서 자고 있던 동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봤지만, 미동도 없었다. 그사이 A의 손은 상의 안으로 들어와 맨 가슴을 더듬었다. 예린은 몸을 뒤척이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이 이내 팬티 속으로 들어왔다. 예린은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다들 아침 먹으러 가요."

꿈이라 믿고 싶었던 순간, 이상하리만치 일상적인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선배도 아침 먹으러 가요."

예린은 침착하게 가해자에게 말했다. 불과 몇 초 전 자신을 추행했던 그였다. 일단 사람이 많은 곳으로 데리고 가,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두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예린과 남자 선배 A는 친구들 사이에 휩쓸려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예린은 학우들과 둘러앉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A의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뛰쳐나와 집행부실로 향했다.

복도에 서 있던 집행부 친구들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다리가 확 풀렸다.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무서웠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그 말만 반복했다.

2017년 4월 1일 만우절 아침, 거짓말이라 믿고 싶던 그날이었다.

고통의 대가는 터무니 없었다

함께 학술답사를 갔던 철학과 교수단 다섯 명은 모두 모여 가해자를 소환했다. 당황한 가해자는 자신의 성추행 행위를 전부 인정했다. 하지만 단서를 덧붙였다. 피해자도 원했노라고, 잠에서 깨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고, 자신은 술에 취해 실수로 그런 거라고. 가해자의 모든 발언은 6분 남짓한 녹음 파일에 또렷이 담겼다.

예린은 자신이 원하는 건 가해자의 퇴학이라는 의사를 교수단에 표했다. 다시는 그를 학교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교수단은 학칙에 맞춰 가해자의 처벌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학교 차원의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가해자는 수업에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건 당일 저녁 8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예린은 경찰서로 향했다. 추행 수위가 유사강간에 가깝다는 주변의 조언에 그녀는 고소를 결심했다.

하지만 경찰은 "음부를 건드렸다 해도 질 속에 손이 들어가지 않으면 형법상 유사강간이 될 수 없다" 말했다. 예린의 예상과 달리 준강제추행으로 수사가 진행됐다. 피해자 측 변호사도 처벌은 300만 원~500만 원 상당의 벌금형에 그칠 거라 조언했다. 예린은 믿을 수 없었다.

형법 제297조의2(유사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구강, 항문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내부에 성기를 넣거나 성기, 항문에 손가락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일부 또는 도구를 넣는 행위를 한 사람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298조(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299조(준강간,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한 자는 제297조, 제297조의2, 및 제 298조의 예에 의한다.

유사강간의 경우 2년 이상의 형기가 정해져 있지만, 강제추행은 폭행, 협박, 추행의 정도에 따라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학교를 도망쳐 나온 건 피해자였다

학술 답사 이후 예린의 첫 수업에서였다.

"OOO(A의 이름)?"

대답이 없었다. 그날 일을 미처 전해 듣지 못한 강사에겐 그저 결석생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예린을 다시 며칠 전 그날로 데려갔다.

괜찮을 줄 알았다. 징계 처분을 기다리는 가해자는 학교에 나올 수 없으니까, 마주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서면, 아니 학교 근처에만 오면 몸이 아팠다. 뱃속에서 수백 마리 나비들이 한 번에 날갯짓하는 듯한 느낌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일주일 만에 예린은 휴학을 결정했다.

한동안은 집에만 있었다. 술과 수면유도제에 의지한 채 잠드는 날이 잦았다. 예린이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내렸다. 

하루에 한 두시간이라도 자는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겨우 잠에 들어도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이 떠졌다. 엄마는 집에 틀어박힌 예린만 보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2017년 4월 3일자 가해자 사과편지
 2017년 4월 3일자 가해자 사과편지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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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엄마의 얼굴에서, 가해자 엄마가 보였다

2017년 4월 25일, 휴학 중이던 예린은 전화로 가해자의 퇴학처분 소식을 접했다. 학칙 제48조에 따라 해당 단과대학 교수회의를 거쳐 가해자는 퇴학이라는 징계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예린과 가해자 사이엔 형사고소가 남아있었다. 가해자에게 퇴학은 둘째 문제였다. 당장 시급한 건 형사 고소였다. 가해자가 쓴 사과 편지에는 자신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다는 뻔한 레퍼토리만 쓰여있었다. 그는 선처를 부탁한다고 빌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조금만 넓은 아량으로 한 사람을 바른길로 가게 한다면 이 또한 매우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7년 4월 3일 자 가해자 사과편지에서 발췌

예린은 기가 찼지만, 가해자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보았을 때는 마음이 흔들렸다. 가해자의 어머니는 "죄스러움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편지를 썼다. 예린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가해자 어머니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예린은 자신의 엄마만 보면 그 편지가 떠올랐다. 예린은 우는 엄마의 얼굴에서, 가해자 엄마가 보였다.

가해자의 퇴학처분 소식을 들은 지 하루 만에, 예린은 형사 고소를 합의하자 마음먹었다. 퇴학처분 정도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가해자를 학교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2017년 4월 26일, 예린은 더 이상 가해자를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처벌불원서'를 작성해 합의했다. 이후 형사 고소 합의가 참작돼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왼쪽 사진 2017년 11월 24일 건국대학교 철학과 집행부 대자보, 오른쪽 사진 2017년 12월 14일 피해자는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에 본인의 피해 사실을 호소했다.
 왼쪽 사진 2017년 11월 24일 건국대학교 철학과 집행부 대자보, 오른쪽 사진 2017년 12월 14일 피해자는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에 본인의 피해 사실을 호소했다.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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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만에 가해자는 퇴학처분 취소소송을 걸었다

악몽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끝난 줄만 알았던 싸움이 복학을 앞둔 예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해자는 학교를 상대로 '퇴학처분 취소소송'을 걸었다.

합의한 지 석 달만이었다. 2017년 8월, 가해자는 돌연 건국대학교를 상대로 '퇴학처분 취소소송'을 걸었다. '자신의 죄질에 비해 퇴학처분이 과하지 않은지 법원에서 판단해달라'는 논리였다. 대신 피해자가 졸업한 이후에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2017년 2학기 복학 후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예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가해자가 다시 학교로 돌아올 일 없다고 생각한 예린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형사고소 합의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가해자였다. 가해자의 죄에 합당한 벌이라 여겼던 퇴학처분마저 없던 일이 될 판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가해자를 마주할 게 두려워서만이 아니었다. 예린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은 가해자가 돌아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철학과 집행부 역시 대자보를 통해 가해자를 동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예린은 가해자가 건 소송에 대한 판결이 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언론사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대나무숲'(익명 소통 게시판)에도 글도 썼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사건을 공론화하는 이유가 있다. 형사소송법 제232조에 따라 고소를 취하한 예린은 가해자를 다시 형사 고소를 할 수 없다. 현재의 가해자와 학교 간의 '퇴학처분 취소소송' 형국에서 예린이 할 수 있는 법적 대응은 전무하다.
 
형사소송법 제232조(고소의 취소) ②고소를 취소한 자는 다시 고소하지 못한다.

 피해자 예린은 자신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용기내어 고백하고 있다.
 피해자 예린은 자신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용기내어 고백하고 있다.
ⓒ 김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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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017년 11월, 서울동부지방법원은 1심 진행 중 가해자의 징계를 퇴학에서 '무기정학'으로 처벌 수위를 낮추라는 '강제조정명령'을 내렸다. 재입학이 허가되지 않는 퇴학처분(제적)과 달리, '무기정학'은 사면이 가능한 징계다. 다시 말해, 가석방이 될 수 있는 무기징역처럼 무기정학도 '단과대학 교수회의'를 거쳐 가해자의 복학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건국대학교 학칙 제23조(재입학) ②성행불량으로 징계에 의하여 제적된 자는 재입학을 허가하지 아니한다.

다행히 학교 본부는 법원의 '강제조정명령'에 '이의신청'을 했다. 2018년 현재, 학교 본부는 피해자인 예린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고려해 1심을 진행하고 있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대학 내 미투 운동에 힘입어 그녀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싸움에서 그녀의 목표는 한 가지다. 가해자가 퇴학처분 취소소송을 취하할 때까지 이 사건을 공론화하는 일이다.

예린은 가해자가 이 기사를 꼭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인 그녀가 용기내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해자가 소송을 취하할 때까지 저는 끝까지 달릴 거예요."

아직 그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https://storyfunding.kakao.com/episode/40836

다음 스토리펀딩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에 올린 기사입니다.
피해자분이 펀딩보다도 기사의 공론화를 원하셔서 오마이뉴스에 송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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