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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화엄사요, 화엄사의 지리산이라

화엄사 각황전과 석등
▲ 화엄사 화엄사 각황전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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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문화재단이 주최하는 '23회 새얼역사기행 탐방' 이튿날이 시작됐다. (4월) 27일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이다. 지리산 화엄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장면을 봤다. 버스 안에서 박수가 터졌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보물창고로, 소장한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 천연기념물 등이 뜨르르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국보 각황전과 그 앞의 석등도 일품이지만, 사실 3월 하순 각황전 오른쪽에 흑매가 검붉은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자태를 일경으로 추천하고 싶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 절 이름은 화엄경에서 따왔다. 화엄경이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는 경전이니, 화엄사가 곧 부처님의 세계이자 깨달음의 성지다. 화엄사 뒷산이 지리산 노고단인데, 화엄사의 그 장엄함은 지리산에 밀리지 않는다. 지리산의 화엄사요, 화엄사의 지리산이다.

화엄사상은 우주의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으로,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을 일컫는다.

화엄은 곧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곧 하나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곧 통일국가의 기틀을 다진 상징적인 사상이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화엄종의 원찰로 삼았고, 경덕왕 때 이르러 8가람 81암자의 대사찰로 거듭났다.

임진왜란 때 화엄사의 혜안 스님과 벽암 스님은 승군을 일으켰고, 자운 스님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바다를 지켰다. 화엄사는 왜란 때 잿더미가 됐다. 그 뒤 선조 30년무렵부터 벽암 스님이 복원하기 시작했다.

화엄사는 볼 게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춤추듯 물결치는 보제루의 기둥을 빼놓을 수 없고,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사사자 삼층석탑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구층암 모과기둥을 보고 있자면 건축물에 어떻게 자연을 저리도 자연스럽게 담았을까 절로 탄성이 나온다.

그래도 바쁘다면 각황전 앞 석등 앞에서만 한참 서 있어도 좋다. 화엄사가 장엄한 만큼 각황전 석등도 위풍당당하다. 국내 최대 높이의 석등이니 그럴 만한데, 웅장하기만 한 게 아니라 군살이 없어 매끈하다. 마치 석등계의 석가탑을 접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이 석등도 각황전에 들어가서 보면 또 다르다. 각황전 3존불에 사해동포와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삼배하고, 돌아보니 위풍당당하던 석등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단아하기만 하다. 오공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더니 각황전 앞 석등 또한 그러하던가, 아니면 석등이 오공처럼 분신술로 몸체를 줄였나 보다.

호남 사찰에서 강화학파를 만나는 즐거움

천은사 극락보전 현판. 현판 글씨는 강화학파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 천은사 천은사 극락보전 현판. 현판 글씨는 강화학파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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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에서 천은사로 향했다. 천은사는 지리산 성삼재로 가는 길에 있다. 천은사 일주문에 이르니 '지리산 천은사'라는 현판이 눈에 들온다. 조선 4대 명필 중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1705 ~ 1777)의 글씨이다. 강화학파다. 천은사 극락보전도 그의 글씨다.

천은사 현판은 원교가 잦은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천은사 스님의 딱한 사정을 드고 화기를 막기 위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진다. 물이 흐르듯 썼다하여 수기체라고 부른다는데, 흐르는 물이 화기를 막고 있는 셈이다.

천은사 현판은 원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원교의 대표적인 글씨는 해남 대둔산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이다. 대흥사 대웅보전 글씨는 옹골찬 기개와 화강암의 결기가 느껴지는 데 비해, 천은사 현판은 얽매임 없이 자유롭다.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일화로 유명하다. 추사가 유배차 제주도로 가던 중,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형편없는 글씨라며 떼라고 하고, 자기 써준 '무량수각'을 달게 했다. 무량수각은 추사 작품 중 기름지고 윤기 흐르는 글씨다.

그런 추사가 제주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 유배를 마치고 복귀 중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기가 떼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이 있으면 다시 걸라고 했다. 세한도가 말하는 것처럼 제주 유배 생활이 그를 바꿔 놓았던 것일까. 추사가 유배를 마치고 쓴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유배 전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에 비해 기름기가 쫙 빠진 대신 힘찬 골격이 드러난다.

백성들과 여민동락할 것인가, 대상으로 여길 것인가

천은사 수홍루
▲ 천은사 천은사 수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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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보제루 계단에 걸터앉아 극락보전을 바라보니 눈이 먼저 알아본다. 많이 보던 서체다. 자세히 보니 이 현판 또한 원교의 글씨다.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글씨와 이란성 쌍둥이 글씨라고 해도 될 만큼 닮았다.

해남 대흥사에도 구례 천은사에도 원교의 글이 남아 있으니 두 사찰이 강화학파와 교우가 깊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천은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매천 황현 선생을 기리는 매천사가 있는 걸 보면 그냥 인연은 아닌 듯하나 아는 바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매천 또한 강화학파로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망국의 비통함에 식음을 전폐하다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강화도 사기리에 가면 강화학파의 거두 영재 이건창 선생의 생가 명미당이 있는데, 명미당 당호는 매천이 쓴 글씨이다.

매천은 자결 전 구례에서 강화까지 걸어와 영재와 시국을 논한 뒤, 나라가 망하는데 선비 한 사람은 목숨을 끊어야 한다며 자결했다.

지행합일을 내건 양명학은 유교 경전 대학 1장을 해석하는 데서 기존 성리학파와 구분된다. 대학 1장은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이라고 하여,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더 밝게 하는 데 있고,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 지극히 선한 곳에 머무는 데 있다'는 뜻이다.

양명학을 계승한 강화학파는 재친민으로 읽어 백성들과 여민동락하는 데 뜻을 두지만, 기존 성리학파는 재친민을 재신민으로 읽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사상이 다르니, 뜻이 달랐고, 정치적 노선도 달랐다.

다시 일주문으로 다시 나오는 길 수홍루가 반긴다. 천은사 앞 호수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천은저수지와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지어진 수홍루는 무지개(虹)가 드리워진다(垂)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송광사 임경당과 선암사 강선루는 같은 산 같은 빗물

송광사 임경당(왼쪽)과 선암사 승선교(오른쪽). 승선교 아래로 보이는 누각이 강선루다.
▲ 송광사와 선암사 송광사 임경당(왼쪽)과 선암사 승선교(오른쪽). 승선교 아래로 보이는 누각이 강선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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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서쪽에 자리 잡은 사찰은 송광사고, 반대편에 자리한 사찰은 선암사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등산로를 따라 넘어갈 수 있고,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갈 수 있다.

송광사는 국내 삼보사찰 중 하나로 승보사찰로 꼽힌다. 불가에서 삼보는 부처, 불경, 스님을 일컫는데,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절이라는 뜻이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선승의 요람이다. 승보사찰답게 대웅전 뒤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당우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만큼 스님을 높이 받든다는 뜻이 담겨있다.

송광사와 선암사 모두 일주문으로 가는 길이 아름답고, 물소리가 정겹다. 하늘 높이 치솟은 송광사 편백나무 길에 잠시 쉬어가는 것도 묘미다. 송광사가 품은 국보와 보물은 절에서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고, 그보단 법정 스님이 거처했던 불일암 가는 길을 추천하고 싶다.

송광사의 일경은 계곡에 발 담그고 있는 임경당과 그 너머 우화각을 꼽고 싶다. 우화각 넘어 스님들의 학습공간인 침계루가 자리잡고 있다. 임경당은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건물로, 계곡물에 비친 임경당과 우화각이 일품이다.

송광사에 임경당이 있다면 선암사의 일경은 승선교 아래로 비치는 발 담근 강선루다. 선암사 일주문 가는 길 또한 나무가 우거지고, 계곡물이 풍부해 산책하기 좋다. 승선교에 이르면 무지개다리 아래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있는 강선루가 얼굴을 내민다.

송광사는 조계종이고 선암사는 태고종이지만, 송광사 임경당이나 선암사 강선루나 같은 산에 같이 내린 빗물이 만든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선암사 또한 매화로 유명한데, 매화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시사철 꽃이 피기로 유명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 하듯이, 중생을 살피고 구제하는 부처와 보살님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사시사철 꽃은 선물하는 셈이다.

적벽에서 노니는데 유주학선이 따로있나

화순 동복호 노루목적벽(뒤쪽)과 보산적벽(앞쪽).
▲ 화순 적벽 화순 동복호 노루목적벽(뒤쪽)과 보산적벽(앞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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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정은 화순적벽이다. 화순적벽은 동복호와 상류 7km 구간에 형성된 절벽으로, 물염, 창랑, 보산, 장항적벽(일명 노루목적벽) 4개로 구성됐다. 보산적벽과 노루목적벽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예약해야 갈 수 있다.

화순적벽은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으로 유배 온 신재 최산두가 깎아지르는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보다 아름답다고 하여 적벽이라 명명했다.

물염적벽은 예약 없이 갈 수 있다. 물염적벽엔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이 반긴다. 세태에 물들지 말고 깨끗이 살다가라는 물염정(勿染亭)은 물염적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진 정자다. 정자가 유명한 전남에서 8대 정자에 꼽힐 정도니 지나치면 서운할 일이다.

게다가 1981년 중수 때 마을사람들이 기증한 배롱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것도 아름답다. 울퉁불퉁하고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했다. 물염정의 모든 기둥이 꼿꼿한 가운데, 이 휘어지고 울퉁불퉁한 배롱나무 기둥은 정자에 멋을 살렸다. 마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머리를 감고, 탁하면 발을 씻으라는 것처럼.

화순적벽의 으뜸은 노루목적벽이다. 문신 임억령은 적벽이 곧 신선들이 사는 곳이나 다름없다며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했다. 적벽 중앙엔 화순 현감 이인승이 '적벽동천(赤璧洞天)'을 새겼다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흐릿해 육안으로 보긴 어렵다.

방랑시인 난고 김삿갓(김병연)은 적벽에 머물다 적벽에 잠들었다. 난고는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해도 모래 위에 흐르는 물이더라('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 무등산고 송하재 적벽강심 소상류)'라고 읊었다.

다산 정약용도 16세 때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와 '적벽강 정자에서 노닐며'라는 시를 남겼다. '해맑은 가을 모래 오솔길이 뻗었는데 / 동문의 푸른 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 새벽녘 시냇물엔 연지 빛이 잠기었고 / 깨끗한 돌 벼랑은 비단무늬 흔들린다.'

1985년 동복댐 조성으로 15개 마을이 수몰됐고, 노루목적벽은 2014년까지 접근이 금지됐다. 현재 일주일 세 번(수,토,일) 예약한 사람만 관광할 수 있다. 관광버스가 지나는 길은 수몰지역 주민들이 산소라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만들어진 임도다. 노루목적벽 망향정에 '수구초심'을 담은 건립기념문이 눈시울을 적신다.

난고와 다산은 적벽에서 노닌다고 했다. 논어 술이편에 공자가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고, 어진 것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닐어야 하느니라.(지어도 거어덕 의어인 유어예)"라고 했다. 유어예의 마음으로 적벽에서 노닐었으리라.

무주학불 유주학선이라하여,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우고,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운다고 했다. 오죽하면 난고도 '장유적벽 탄유객무주(將遊赤壁 歎有客無酒)'라 하여, 적벽에서 노닐다 술이 없음을 한탄했겠는가.

조계산 이름난 사찰에서 무주학불하다 적벽에서 노닐다 보니 술 생각이 절로 났다. 적벽에 노닐고 낮술에 취하니 시인묵객과 유주학선이 따로 있나. 시한수도 절로 나온다. 

동파 선생의 적벽 붉게붉게 탄다해도
화순 적벽앞 붉은글씨 밖에 더되는가
유어예라 삿갓 선생 적벽에 노닐었네
선생의 유객무주 한탄 동복호에 가득하니
무주학불은 운주사요 이 몸은 유어주라
벗님올적 국화에 달차면 유주학선 그만일세

화순 영귀산 운주사 와불.
▲ 운주사 화순 영귀산 운주사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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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정은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송광사의 말사인 화순 영귀산 운주사다. 운주사의 자랑은 사찰 내 숱한 석불과 석탑이다. 그중에서 인기가 많은 석불은 와불이다.

창건 스님으로 알려진 도선국사는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 세상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울음을 내는 바람에 석공들이 모두 날이 밝은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와불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 땅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운주사 와불은 당분간 일어날 일이 없을 듯하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축하하며, 두 정상과 함께 우리도 TV를 보며 같이 만찬을 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도기행, #조계산, #화순 적벽, #무주학불, #유주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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