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구호 아래 1997년 개막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아래 여성영화제)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제20회 여성영화제는 지난 5월 31일 미투, 디지털 성폭력 등 여성 이슈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개막했다. 뜨거운 이슈 탓인지 영화제 시작 전부터 여성영화제 예매창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2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29일 여성영화제가 열리는 신촌 메가박스 앞 한 카페에서 김선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김 위원장은 "작년에도 표가 많이 팔렸는데, 아직 정확한 수치는 받아보지 못했지만 올해는 작년에 비해 약 두 배 정도라고 하더라. 이 정도 참여율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선아 집행위원장은 1997년 여성영화제 개막 당시 코디네이터로 일을 시작해 제17회 여성영화제부터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여성영화제의 역사와 함께 해온 셈이다. 여성영화제 20주년을 맞이하는 소감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김 집행위원장은 "사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답했다.

"올해로 20년이 되긴 했지만 소회를 말하고 업적을 치하하기에 여성영화제는 아직 너무나 팔딱팔딱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여성 감독을 많이 배출하지도 못했고, 한국 영화 환경 자체가 여성들에게 녹록하지도 않다. 여성 감독들이나 관객들의 충성도가 높은데,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크게 벌인 판, 관객들 더 많아야"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2018년 5월 31일(목)-6월 7일(목), 총 8일간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메가박스 신촌점에서 열린다. 총 36개국에서 147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 여성영화제


여성영화제는 20주년을 맞아 판을 크게 벌였다. 김선아 위원장은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했으니 호응이 똑같다면 재미없다. 관객들이 훨씬 더 많이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마디로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거다." (웃음) 

올해 여성영화제는 총 36개국에서 147편의 영화를 가져왔다. 영화 편수는 작년에 비해 30~40편 정도 늘었다. 국제장편경쟁 부문과 한국장편경쟁 부문도 올해 처음 도입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 같은 국제 컨퍼런스 프로그램이나 '낙태죄가 폐지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등과 같은 다양한 쟁점 토크도 기획했다.

지난 20년 동안 여성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 중 프로그래머들의 투표를 통해 좋은 영화를 다시 불러온 '20주년 기념 앵콜전' 섹션도 눈여겨볼 만하다. 매년 영화제의 규모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김선아 위원장은 "지금으론 만족하지 못한다"고 거듭 말했다.

- 여성영화제가 20주년을 맞았다. 올해 여성영화제의 특징이나 추천할 만한 영화가 있다면.
"다 추천하고 싶은데? (웃음) 국제장편경쟁은 여성영화제가 20회를 맞이해 처음 준비한 섹션이다. 나중에 굉장히 유명한 감독이 될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다. 관객들이 이들의 잠재력을 같이 발굴해주었으면 좋겠다. 남미에서 아시아까지 전세계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모아놨으니 관객들께서 한 번 보시고 자체적으로 심사를 해보시면 어떨까.

개별 작품으로는 아르헨티나 출신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늪>(2000)이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특히 영화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꼭 좀 봤으면 한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탄 작품인데, 1960년대 이후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헨티나 영화를 재발견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관습적인 상업 영화나 한국에서 통용되는 남성들의 '예술' 영화가 아닌 다른 종류의 예술 영화이고, 내 뒤통수를 친 영화다. 20주년 기념 앵콜전 섹션의 영화들은 어떤 걸 선택해서 봐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 '디지털 성폭력' '미투' '낙태'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다루는 영화들을 모은 쟁점들(Polemics) 섹션은 해당 주제랑 연관시켜 보면 재밌을 것이다."

- 3년 전 한 매체 인터뷰에서 20주년 여성영화제의 목표로 '한국 여성 감독을 길러낼 구조를 만들겠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번 20회 여성영화제에서 한국·국제 장편 경쟁 섹션을 신설했다. 경쟁 부문 신설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의미가 있다. 대학교에서 영화학과를 진학할 때는 여학생과 남학생의 비율이 비슷하다가 피라미드 맨 꼭대기로 가면, 극영화를 갖고 극장 개봉을 하는 여성 감독들의 비율은 1:9로 확 줄어버린다. 영화계는 남성 지배적인 산업 구조를 갖고 있는데, 저희 영화제 안에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장편 극영화 섹션에서 수상을 하면 극장 개봉에도 도움이 되고 홍보 효과도 나고 커리어를 계속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커리어의 연속성을 갖지 못한 여성 감독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작년부터 박남옥 영화상을 다시 부활시켰다(박남옥 감독은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 감독이다. 여성영화제는 2008년에 한시적으로 만들었던 박남옥 영화상을 2017년 다시 신설해 장편 극영화 신인 여성감독을 대상으로 상을 수여하고 있다 -기자 주). 여성영화제가 여성 감독들을 아끼고 격려해주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페미니스타 배우 이영진과 김선아 집행위원장.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홍보대사 '페미니스타' 배우 이영진과 김선아 집행위원장. ⓒ 여성영화제


- 30주년, 40주년 목표도 있나?
"장기적인 목표로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전용상영관을 만드는 것이 있다. 영화제 기간에도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델테스트(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만든 영화의 성평등 평가 방식.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나와 서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이외의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백델테스트'가 통과됐다고 본다)를 통과한 영화들을 튼다든지... 전용상영관에서는 적어도 논란이 되는 성차별적 영화나 여성 관객들을 소외시키는 영화들을 상영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 목표는 되게 많다. 그래서 아직 배고프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운영이 좀 더 안정적이 됐으면 한다. 서울시의 경우 너무나 많은 축제와 행사가 있다 보니 '나눠먹기식'의 자원 배분이 이뤄진다. 이 정도로 입증된 영화제라면 서울시에서 제대로 키워줄 수 있지 않나. 물론 과거 보수 정권 아래서 예산이 너무 많이 깎여 나갔지만 다행히 영화진흥위원회 지원 보조금도 늘었고 서울시도 본격적으로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해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뤄야 할 건 아직 너무 많다."

- 20년 전, 처음 영화제가 시작했을 때는 어땠나.
"당시엔 지원이 체계적이지 않았다. 다행히 김대중 정부의 개방적인 문화 정책 때문에 많은 영화제들이 태동을 했다. 여성 운동도 활발했다. 그 당시 문화를 바탕으로 여성 운동을 해보자는 흐름이 있었고 이것이 여성영화제와 잘 맞았다. 뒤돌아 보니 그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잘 태어난 것 같다."

- 해외에 있는 다른 여성영화제들과 비교했을 때 현재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위상은 어떤가?
"일단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사이즈가 전세계 여성영화제 중 제일 크다. 반면 역사는 오히려 짧다. 프랑스에서 크레테이유 영화제가 가장 먼저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대만 여성영화제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데, 사이즈는 우리 영화제가 압도적으로 크다."

- 그만큼 단기간에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 여성의 상황이 그만큼 열악해서 아닐까. 반비례하는 것 같다. 영화제는 사회의 갈등 지수를 낮추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들을 보여주는 영화제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밖에 없다. 미투나 디지털 성폭력 등 현재 갈등을 겪고 대립하는 것에 대해 영화를 갖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영화제는 우리뿐이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 2030 세대가 대부분이다. 다른 나라 감독들이 오면 한국 여성영화제 관객들이 젊다는 것에 가장 놀란다. 여성 이슈가 너무나 안 풀리는,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는 지역에 있지만 그만큼 잠재력과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오히려 여성 문제가 개선이 되면 영화제의 전성기가 지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
"그렇겠지. 사회가 천천히 갈등을 흡수해갈 테니까. 그래도 한 100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젠더나 섹슈얼리티 이슈에서 갈등 지수가 높을수록 공론장으로서 그 갈등을 풀어헤치면서 만날 수 있는 곳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여성영화제에 페미니스트들이 오면 위안과 위로를 받을 것이고, 힘과 용기를 얻을 것이다. 또 일반 관객들은 영화 보는 재미나 즐거움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고, 처음 오는 남성들은 여성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해소될 것이다. 물론 싸우는 과정도 있겠지만 일단 만나서 영화를 통해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더 좋은 사회로 가는 거다."

- '여성영화제에 남성이 가도 되느냐'는 질문을 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 질문에 집행위원장이 답을 한다면.
"여성영화제는 남성 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특정 시간에 남성 관객들이 오면 할인을 해주기도 하고 이벤트도 많이 벌인다. 당연히 남성 관객들도 환영한다. 영화제는 축제이지 않나. 축제의 시간이라는 건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다. 남성 관객들은 여성들이 말하는 방식을 여성영화제에 와서 배우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장은 계속 있어야 한다고 본다."


여성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페미니즘 여성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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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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