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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를 가르친 교사들도 역사서도 그렇게 말하고 기술했다. 다수가 주장하는 것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어렵다. 청일전쟁과 을사늑약, 경술국치 같은 침략의 현대사를 떠올리면 두말할 나위 없다. 한반도의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는 공리 수준으로 굳어진 이론이다.

영국의 국제문제 전문가 팀 마샬의 신간 <지리의 힘>은 그런 주장의 타당성을 다각도로 살피는 서책이다. 그는 25년 이상 <스카이뉴스>의 외교부문 편집장이자 영국방송협회 (BBC) 기자로 활동했다. 마샬은 중동을 포함한 세계전역의 갈등과 분쟁, 정치와 종파, 민족과 역사 등을 전문적으로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지리의 힘>에 붙은 부제는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경제를 좌우하는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개인과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지리의 힘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나는 원제가 지은이의 사유와 인식을 훨씬 명쾌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리의 수인(囚人)들>(Prisoners of Geography)이다. 지리에 갇힌 사람들!

지리의 힘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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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중국과 서유럽, 러시아를 포함하는 유라시아 전체는 물론이려니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를 종횡으로 다룬다. 여기 더해서 아프리카와 북극까지도 서술하는 치밀함을 선보인다. 서문에서 그는 서책의 일관된 주제를 기술한다. "이념은 스쳐지나가도 지리적 요소는 그대로 남는다."(10쪽) 평화에 기초한 한반도의 새판 짜기가 한창이다. 역사적인 사건이 진행되는 시점에 한반도와 세계의 지리와 지정학을 생각해본다.

중국과 미국

한반도와 가장 밀접한 역사적-지리적 관계를 맺어온 나라 중국.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기초한다. 고대 황하유역의 좁은 영역을 두고서도 그들은 천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논어>나 <도덕경>, <장자>에는 천하, 천명, 천자 같은 어휘가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이런 단어에 그들의 선민의식과 대국주의가 내재해 있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확보한 영토를 물려받은 현대중국은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인도와 맞서고 있다. 동아시아의 맹주 중국과 남아시아의 보스 인도의 대결은 히말라야라는 '천연의 만리장성'(33쪽)으로 제어되고 있다. 중국은 원유 매장지이자 대규모 핵 실험장인 티베트와 신장 같은 강역(疆域)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샬은 확언한다.

태평양부터 대서양까지는 얼마나 될까? 4828킬로미터. 서울과 부산의 10배 정도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유럽인들이 첫발을 내디딘 후 미국은 동에서 서로 영토를 확장한다. 멕시코와 국경전쟁도 벌이지만, 돈거래로 땅을 넓히기도 한다. 미국은 1803년 미시시피 유역의 루이지애나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1500만 달러에 구입한다.

1867년에 알래스카를 러시아에게 720만 달러에 매입한 미국은 1869년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한다. 천혜의 지리적인 이점을 가졌지만, 미국의 지도자들은 워싱턴의 퇴임연설을 진주만 전쟁이 촉발된 1941년까지 금과옥조로 지킨다. "뿌리 깊은 반감 때문에 특정국가와 반목하지 말고, 어떤 나라들의 열정적인 접근에 연루되지 말며, 항구적인 동맹들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라." (71쪽)


21세기 미국의 쇠퇴를 말하는 식자들의 견해에 마샬은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최강의 경제력과 국방력, 최고의 대학을 거느린 미국을 중국이 따라잡으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라 주장한다. 군사력과 전략적인 측면의 차이가 매우 심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서유럽과 러시아

서유럽은 성장-발전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서유럽에는 사막이 없고, 지진과 화산, 대규모 홍수도 드물게 일어난다. 다뉴브나 라인(Rhein)처럼 교역하기 좋은 하천을 보유하고 있다. 슈바르츠발트에서 발원하여 2858킬로미터에 이르는 다뉴브는 18개국에 영향을 미치면서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다뉴브는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자연국경이기도 하다.

유럽은 많은 산맥과 계곡, 강 때문에 수많은 민족국가들이 존재하고 천년 이상 천천히 성장했다. <유러피언 드림>에서 리프킨은 유럽에 100개 민족과 87개 언어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유럽의 화약고는 발칸이다. 마샬은 "발칸은 유럽연합과 나토, 터키와 러시아가 경쟁하는 경제적-외교적 각축장"(103쪽)이라고 언명한다.

우리가 아는 지구 최대국가는 1709만 평방킬로미터의 러시아다. 러시아는 11개의 표준시간대를 가지고 있으며, 한반도의 80배 가까운 면적을 차지한다. 러시아 영토의 75%는 아시아에 있지만, 아시아에 거주하는 인구는 1억 4400만 가운데 22%에 불과하다. 그런 까닭에 19세기 중반 러시아는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심각한 논쟁을 경험한다.

러시아의 지리적 아킬레스건은 부동항의 부재다. 러시아가 개발한 군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연중 4개월 동안 항구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흑해에 자리한 세바스토폴이 러시아가 보유한 유일한 부동항이다. 그러나 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진출하려면 터키의 보스포루스해협과 그리스의 에게해, 포르투갈의 지브롤터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도처에서 자국의 견제세력을 관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와 더불어 정치와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곳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다. 등소평이 제3세계라 칭한 지역으로 '아아아!' 하는 곡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대륙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의 식민주의와 노예제로 인한 험로를 걸어왔다. 1846-1848년까지 멕시코는 미국과 전쟁함으로써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아리조나를 상실한다.

미국은 1890년부터 냉전종식 때까지 50여 차례 남미를 침공했다. 100년 전 세계 10대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불공정한 사회, 허술한 교육제도, 쿠데타 등으로(215쪽) 빈국으로 전락한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파라과이, 베네수엘라는 남미경제블록인 메르코수르(MERCOSUR)를 창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역내의 불안한 정정(政情)과 유동적인 경제, 아마존의 낮은 활용도 등이 걸림돌로 작용한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아프리카는 고립무원의 행로를 경험했다.

"인류의 사상과 기술은 (유라시아의)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주고받으며 발전했지만, 북쪽(유라시아)에서 남쪽(아프리카)으로는 전달되지 않았다." (222쪽)

아프리카에는 대륙을 관통하는 공통의 문화가 없으며, 수천 개가 넘는 언어가 혼재한다. 56개 국가가 포진한 아프리카에는 유럽이 자의적(恣意的)으로 그은 국경선 때문에 여전히 허다한 민족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유럽 제국주의가 획정한 무차별적인 국경선뿐 아니라, 태생적인 자연조건도 아프리카에 호의적이지 않다. 팀 마샬의 지적을 보자.

"아프리카와 유럽의 발전 차이는 배를 띄울 수 있는 강들의 유무(有無)에서 시작된다. 아프리카에는 큰 강들이 많지만 주로 고지대에서 낙하하면서 거대한 폭포를 이루고 서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런 조건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강들은 무엇인가를 운반하는 교역로로 이용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15-16쪽)


한반도의 지정학은 그렇게 불리한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해양으로, 해양에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할 때 한반도가 교두보로 이용되는 바람에 한국은 수많은 외침(外侵)을 겪었다고 한다. 호사가들은 한반도가 970회 정도의 침략을 받은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고조선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를 들여다보면 대규모 외세침략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고, 횟수도 많지 않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부여받은 서유럽 역사를 보면 외세침탈과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한반도의 불이익은 과장된 것이다. 고구려와 수당전쟁, 몽골의 고려침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경술국치 정도를 외세침략의 전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의 침략전쟁은 서유럽 세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30년 전쟁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현대의 첨단기술과 무기 그리고 천문학적인 전비를 생각하면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불리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근본적인 해법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새우라고 비하할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돌고래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과 일본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갈등과 불화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역할을 자임(自任)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동북아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첩경이다.

덧붙이는 글 | <지리의 힘>,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사이, 2017.



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사이(2016)


태그:#팀 마샬, #지리의 힘, #한반도, #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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