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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하극상> 1, 2권. 앞으로 꾸준히 더 나온다.
 <책벌레의 하극상> 1, 2권. 앞으로 꾸준히 더 나온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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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낯선 곳으로 날아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아이가 돼버리다니. 책을 읽고 싶어. 책만 있으면 어떤 환경이라도 참을 수 있을 거야.' (1권 18쪽)


오늘 갑자기 숨이 끊어진다면, 그런데 이 삶에서 못 다 이루어 아쉽기에 다음 삶에서 부디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이 바람을 그대로 이룬다면, 우리는 다음 삶에서 어떻게 지낼까요?

만화책 <책벌레의 하극상>(카즈키 미야·스즈카·시이나 유우/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2018)은 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서 다룹니다. 지진이 일어나 책꽂이가 무너지고, 이때에 책이 와르르 쏟아져서 어느 아가씨가 깔려죽습니다. 책하고 책꽂이에 깔려서 숨이 끊어질 아주 짧은 동안, 이 아가씨는 '부디 다음 삶에서도 책에 둘러싸여서 책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이 아가씨는 참말로 다시 태어납니다. 다만 다섯 살 나이인 어린 가시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어느 때 어느 곳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 알 수 있다면, 책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에 다시 태어나고, 게다가 '다섯 살 아이 몸으로 태어나기 앞서, 예전에 살던 삶을 고스란히 품'었습니다.

'혹시 이 세계의 책은 비싼가? 내가 아는 역사에서도 인쇄기로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책은 매우 고가의 물건이었어. 상류 계습이 아니면 책을 읽을 기회는 거의 없었을 거야.' (1권 35쪽)
'그렇게 책이 많았는 걸. 책에 깔려죽은 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 것도 나야. 하지만 이곳에는 책이 없어. 글자도, 종이도 없어.' (1권 38쪽)


책을 매우 좋아해서 집안에 발을 디딜 틈 없이 책을 갖추고 살다가 책에 깔려서 죽은 아가씨는 다음 삶에서도 책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책을 구경할 길이 없고, 이 아가씨가 사는 마을에는 책이나 글을 아무도 모릅니다.

이를 어찌할까요? 예전에 누리던 삶을 몽땅 잊었다면 근심이나 걱정이 없었을 텐데, '책벌레'로 지내던 생각을 모조리 품은 채, 마음은 어른이나 몸은 아이로 살아야 한다면 어떤 하루일까요?

1권에서. 책뿐 아니라 종이조차 얻을 수 없는 곳에서, 책벌레는 '종이부터 스스로 빚자'고 다짐한다.
 1권에서. 책뿐 아니라 종이조차 얻을 수 없는 곳에서, 책벌레는 '종이부터 스스로 빚자'고 다짐한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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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넣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지? 내 손으로 만들 수밖에 없잖아! 반드시 책을 손에 넣고 말겠어.' (1권 78쪽)
'책은 너무 비싸서 살 수 없다. 종이도 너무 비싸서 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지? 종이부터 내가 직접 만들면 되잖아!' (1권 120쪽)


책을 만지고 싶으나 만질 수 없습니다. 책을 읽고 싶으나 읽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시 태어난 몸은 매우 여려서 조금만 걸어도 앓아눕습니다. 아이인 어른은, 또는 어른인 아이는 하느님을 탓합니다. 왜 책 없는 곳에 다시 태어나게 하느냐고요.

이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해요. 책을 만질 수도 볼 수도 가질 수도 없다면 스스로 책을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고요. 아마 이 아이 또는 어른은 예전 삶에서 '남이 지은 책'만 신나게 읽었지 싶어요. 스스로 제 삶을 이야기로 갈무리해서 손수 쓸 생각은 안 했지 싶어요.

그런데 있지요, 책을 손수 지으려 했더니 종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종이뿐 아니라 연필이나 펜도 없습니다. 다시 아찔합니다. 그러나 새로 다짐하면서 '종이부터 스스로 빚겠어!' 하고 주먹을 불끈 쥡니다.

'점토판은 도저히 책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이 아니지만, 내게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손에 넣은 책. 이 세계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어. 그럼 이제 괜찮을지도. 너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은 책을 읽을 수 없는 세계에서 뭐만 했다 하면 금방 열이 나는 병약한 몸으로 환생을 했으니까. 조금 무리를 해도, 딱히 죽어버려도 상관없었다. 책이 없는 세계에 아무런 애착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책 하나를 손에 넣음으로써 이곳에서도 소중히 하고 싶은 물건이 생겼다. 이 세계에서 내가 살아갈 길을 찾은 기분이다.' (2권 161∼162쪽)


2권에서. 종이는 못 얻었으나 점토판에 글씨를 새겨 굳히는 길을 떠올려서, 첫 책을 빚어내다.
 2권에서. 종이는 못 얻었으나 점토판에 글씨를 새겨 굳히는 길을 떠올려서, 첫 책을 빚어내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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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하극상>은 먼저 소설로 나왔고, 소설을 만화로 새롭게 담아냅니다. 글쓴이 생각에 날개를 달아 놓는 만화는, 우리가 오늘 이곳을 떠나 아주 낯선 곳에 뚝 떨어졌을 적에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가를 가만히, 이러면서 재미나게 물어봅니다.

자, 책벌레는 여린 아이로 다시 태어나고 나서, 어떻게든 스스로 책을 지어 보겠노라며 용을 씁니다. 책벌레 아닌 요즘 어른이라면 누구나 손전화를 옆에 끼고 살 텐데요, '손전화 없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손전화를 어떻게든 스스로 지어 보겠노라 나설 수 있을까요? 또는 축구나 야구를 좋아하던 어른이 축구도 야구도 없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김치를 좋아하는 어른이 김치를 도무지 모르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린이로 다시 태어난 예전 어른은, 만화책 둘째 권에 이르러 '종이를 못 얻으면 점토판 책을 빚자'는 마음으로 찰흙을 캐고 반죽한 뒤에 나뭇가지로 글씨를 새깁니다. 예전에 책을 읽으며 배운 생각을 되새겨 '아스라한 옛날 문명은 글을 어떻게 남겼나' 하고 살펴 하나씩 해 보지요.

파피루스 문명을 따라해 보려다가 두 손 들고,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따라해 봅니다. 어쩌면 앞으로 구텐베르크처럼 인쇄기를 손수 짓는 길까지 갈는지 모르겠군요. 중국이나 한국처럼 닥나무를 삶아 종이를 얻는 길을 해 볼 수 있을 테고요.

"나는 엄마가 얘기해 준 이야기를 잊지 않도록 전부 기록해 두고 싶어." (2권 164쪽)


아무튼 드디어 점토판에 글씨를 새기는 길을 찾아낸 아이 또는 어른은, 새 몸으로 태어난 삶에서 새로 마주한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점토판에 새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책으로 남겨서 읽고 싶은 이야기'란 스스로 기쁘게 살아가는 하루로구나 싶습니다.

먼 데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아닌, 우리 곁에서 가장 수수하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삶을 글로 옮기고 책으로 여미어 두고두고 건사하고픈 꿈으로 우리 문명이나 사회가 발돋움했다고 할 수 있구나 싶어요.

덧붙이는 글 | <책벌레의 하극상>(카즈키 미야 글 / 스즈카 그림 / 김동욱 옮김 / 대원씨아이 / 2018.2.28.)



책벌레의 하극상 제1부 책이 없으면 만들면 돼! 2

카즈키 미야 원작, 시이나 유우 외 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만화)(2018)


책벌레의 하극상 제1부 책이 없으면 만들면 돼! 1

카즈키 미야 원작, 시이나 유우 외 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만화)(2018)


태그:#책벌레의 하극상, #책벌레, #만화책, #만화,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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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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