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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름을 오르나? '아는 만큼 느끼기' 위해 지침서를 하나 샀다. 제주를 백 번 여행했다는 여행기자 손민호는 <제주, 오름, 기행>에서 '제주를 두 번째 여행하는 당신을 위해 오름 40곳'을 소개한다. 손 기자는 2003년, '오름 사진작가' 김영갑을 만난 인연을 얘기한다. "제주에는 한라산 말고도 368개의 화산이 더 있다는 걸 알았다." 오름 여행을 시작하게 된 인연이다.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은 죽을 때까지 20여 년을 제주 중산간에 묻혀 살며 20만장이나 사진을 찍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찍은 건 '외로움과 평화'란다. 말년에는 루게릭병으로 시한부생명에 시달리며 삼달리의 폐교를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으로 만들었다. 죽기 한 해 전 2004년, 사진과 글을 모아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펴냈다.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중산간 초원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김영갑이 오름에 미친 이유이다. 3년 전, 올레길을 걸으면서 두모악에 들렀다. 온평포구에서 시작하는 3코스이다. 통오름과 독자봉(159m)을 오르내린 후 다다른, 기대했던 목적지였다. 그런데 '간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수요일이었다. 휴관날이라며 '작은 제주처럼 만들었다'는 운동장 정원도 보여주지 않았다. 김영갑이 '밭가의 돌을 날라다 몇 차례나 허물고 허물다가 다시 쌓은 돌담'만 만져보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올레길 걸으며 한 코스에 한두 개 씩 끼어있는 오름을 예전엔 그냥 야산인 줄 알았다. 집에서 시내버스 타고 댓 정거장만 가면 바로 오를 수 있는 삼각산(220m)이나 장원봉(386m)처럼 높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작아도 오름은 한때 불을 뿜었던 화산이다. 정상에 언제나 움푹 파인 '굼부리(火口)'를 가지고 있다. 성산일출봉(182m)을 높이가 낮다고 야산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성산일출봉도 368개 오름중 하나이다.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암벽성채 같은 성산일출봉은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굼부리 둘레가 2,927m나 되는 거대한 사발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모든 기운을 다 받을 듯 엄청나게 큰 초록빛 사발이다.

손 기자는 "당신이 지금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면 성산을 오르라"고 권한다. 날마다 제주 섬에서 제일 먼저 태양기운을 받는 신성한 오름에서 기를 받으라는 권유일 것이다.

올레 1코스(15.1km)는 시흥리 말미오름(146m)에서 시작해 기나긴 종달리 해변을 거치는 4시간 내내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일출봉이 길잡이 등대처럼 멀리서 앞을 인도한다. 영주10경중 제1경, 일출봉이 가까워지자 초원이 사람 물결로 꽃밭을 이룬다. 발길이 파도처럼 몰려든다. 1코스 원래 종점은 일출봉 옆을 지나 2km 밖 광치기 해변이다.

'언제 다시 성산을 오를 수 있을까' 광치기 해변을 포기하고 일출봉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거룩한 성소를 오르듯 가파른 계단을 한발 한발 오른다. 인파에 밀려 30여 분, 시야가 갑자기 확 트인다. 하늘, 바다, 수평선, 드넓은 굼부리 초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름 오르다>에서 이성복은 "그 내부에 분화구 흔적을 숨기고 있는 오름에는 정상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정상 분화구 주위로 생겨난 둥근 흙더미인 오름의 정상은 그것의 깊은 내부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라고 썼다. 정상이 따로 없는 오름이 좋아졌다. "솟아오름과 흘러내림의 경계인 둥근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보는" 재미가 있다. 덕분에 책을 3권이나 읽었다.


태그:#오름, #오름오르다, #그섬에 내가 있었네, #성산일출봉, #굼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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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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