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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먼, 판사가 되다>는 법조인을 꿈꾸는 청년층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도서이다. 우리나라와 법적 체계가 상당히 다른 미국에서 활동한 판사의 이야기이지만, 그의 삶에 깊게 녹아들어 있는 참된 법조인으로서의 자세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른 전기 도서들과 달리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까지의 모든 내용을 구석구석 살피려 하지 않는다. 짧은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가 판사로서 걸어간 길에 맞추어져 있다.

이는 그만큼 그가 항소법원의 어린 판사 때부터 연방 대법원의 중심에서 은퇴할 때까지 내린 판결들이 무수히 많다는 걸 시사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삶이 '법'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짐작도록 해준다.

그가 법조인으로 살아가던 1970~1980년대는 보수주의의 물결이 미국 전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본래 법조인들은 직업의 특성상 보수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까지 그러하다면 당시 내려지던 판결들의 방향이 어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안기순 옮김 <블랙먼, 판사가 되다>
 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안기순 옮김 <블랙먼, 판사가 되다>
ⓒ 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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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블랙먼은 이러한 조류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옥중에서의 잔인하고도 비정상적인 체벌(cruel and unusual punishment)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논쟁했던 '잭슨 대 비숍(Jackson v. Bishop)' 사건을 다루던 도중 그가 남긴 메모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져 있었다.

'헌법의 기준은 정적이지 않고 항상 진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개념과 판결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에서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기존 판례들이 중요시된다. 그러나 인용하기에 적합한 판례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담당 판사들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때 다수는 사회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판결을 내리기 주저하곤 한다. 한번 결정된 판결은 쉽게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의 이름으로 변화를 유도 또는 추인하는 것은 정치·사회적으로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결은 그러한 보수성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블랙먼은 믿었다. 그는 위의 잭슨 대 비숍 사건을 다루면서 당시 이미 여러 주(14개)에서 과격한 체벌을 불법화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그는 체벌의 완전 페지를 찬성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법의 역할

그는 법관으로서의 경력이 길어지고 명성이 커짐에 따라 더 큰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됐다. 일례로 그는 사형제도의 존폐 문제를 다룬 '포프 대 미합중국(Pope vs. United States)' 사건에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판결에 참여한 다른 동료 판사들의 강한 반발과 비판, 분노에 직면했고, 닉슨 행정부가 보수적인 법관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처럼 블랙먼은 여러 판결들을 거치며 법원 내·외부에서 반대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에 따라 심신도 지쳐갔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생각을 이유없이 철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잃지 않은 끝에, 그가 연방대법원의 구성원 중 하나로 임명된 이후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오는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사건은 미국 사회에서 낙태를 허용하는 첫 단추를 끼운 판결이다. 당시 텍사수 주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는 운동'에 대한 사수 의지가 강하게 존재하였다. 이들은 산모의 생명을 구할 목적을 제외한 다른 낙태시술들은 모두 범죄로 규정하고 징역형을 부과하였다.

블랙먼은 이러한 흐름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여러가지 논의들이 수반되었다. 태아의 생명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연방 정부가 다수 주 정부 법안을 폐기시키는 방향을 유도해도 되는 것인지.

낙태할 권리의 문을 열어주는 판결에 앞장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종교계로부터의 거센 비난과 사회 곳곳으로부터의 암살 위협이 잇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미국 사회는 보수성에서 탈피해 여성 인권을 둘러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의 법조계는 보수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지난 박근혜 정부 당시 정치권과 법조계의 '거래' 의혹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국민적 불신도 팽배해진 상태다.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확인하고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법의 역할은 반드시 필요하다. 호주제를 폐지해 유교적 가부장제를 극복해 내었던 것처럼 말이다. <블랙먼, 판사가 되다>를 읽으며 법조인의 꿈을 키워가는 청년들이 법관이 될 미래에는 정치 논리에 의해 휘둘리는 법조계가 아니라 사회의 방향을 제대로 읽어나가는 법조계라는 평가가 널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블랙먼, 판사가 되다

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안경환 옮김, 청림출판(2005)


태그:#서평, #북리뷰,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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