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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25일 홍대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25일 홍대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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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덕후 디자이너는 생각합니다. 매번 똑같은 CG, 똑같은 예능을 찍으며 겉만 핥는 선거방송은 지겹다고. 표를 소중히 여기는 유권자는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어느 당이 유리하다고 지레짐작하는 정치부 기사는 지겹다고."

사뭇 도발적인 이 글은 '전국투표전도 2018: 나의 선택을 돕는 지방선거 가이드' 란 제목의 펀딩 프로젝트 소개문이다. 글은 이렇게 끝난다.

"언론에 나오는 것은 유명한 중앙 정치인 서너 명의 막말과 허언 뿐입니다. 전국에서 4,011명의 우리 동네 정치인을 선출하는 '지방'선거인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투표 캠페인은, 유권자의 판단에 도움이 될 데이터를 그래픽의 힘으로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6.13 지방선거에 맞춰 그래픽 가이드북 형식의 '전국투표전도'를 만들겠다는 이 비장한 펀딩은 지난 23일 후원액 1360만 원을 돌파하며 성황리에 끝났다. 목표액인 200만 원을 훌쩍 넘긴 대성공이었다. 전국의 방대한 지방선거 자료들을 그래픽 디자인으로 보기 쉽게 풀어내겠다는 디자이너의 기획 의도가 600명 후원자들의 마음을 샀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25일 홍대의 한 카페에서 이 '정치덕후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래픽디자이너 조현익(28)씨다.

- 어떻게 이런 기획을 하게 됐나요.
"제가 지금 백수라 시간이 생겼거든요(웃음)."

- 백수요?
"실직 상태라고 해야 하나...(웃음) 디자인 회사에 다니다가 여차저차해 3월에 나왔어요. 시간도 생기고, 정치는 그전부터 관심이 많았으니까 자연스럽게..."

인터뷰 도중에도 다른 언론사들로부터 전화가 쇄도하던 현익씨도 취직을 준비 중인 평범한 청년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한 그는 노트북을 두들기며 펀딩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곧장 인쇄소에 들러 프린트의 최종 색감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침착하던 현익씨는 "디자인의 힘으로 사회적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가안으로 딱 한 부 만들었다는 가이드북을 꺼내 보이면서 행복하게 웃었다.

"투표 독려 포스터 보면 복장 터져... 디자인으로 유권자 판단에 도움 주고파"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제작한 전국투표전도 2018의 모습.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제작한 전국투표전도 2018의 모습.
ⓒ 조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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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씨는 4달 가까이 전국 지방자치와 관련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공개 자료나 언론 보도 자료 등을 홀로 정리해 그래픽화했다.

"지방 선거잖아요. 지방 행정 4년을 결정하는 건데 이래도 되는 건가... 디자인의 힘으로 지역별 이슈들을 정리하고 좀 더 한눈에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면 유권자들 판단에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그는 유독 '디자인의 힘'이라는 말에 힘을 줬다.

- 디자인의 힘이라면.
"그동안 디자인이 정치에 쓰인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 우리 함께 투표합시다'하는 식의 투표 독려 캠페인. 투표 기호를 활용한 포스터들 많이 있지 않나. 그런 걸 보면 저는 복장이 터진다(웃음). 이걸 갖고 설득이 될 리도 없고 전혀 새로운 것도 없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 고민에서 시작했다.

또 하나는 언론에서 선거 결과를 지도에 나타낸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소위 인포그래픽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정보는 별로 없더라. 정당들이라고 해도 의석수에 따라 규모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 그래픽적으로 커 보이게 하거나 작아 보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더 많이 득표했다든지, 누가 더 아깝게 떨어졌냐 하는지 등 기본적으로 충분히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그래픽 요소들을 활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득표수나 의석수 같은 단순 정보 이상의 실제 데이터들을 보여주자는 생각에서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보자. 그래픽 하나면 수많은 기사를 읽는 대신 그동안의 정세나 이슈 변화에 따라 어느 정당의 힘이 더 세지고 약해져 왔는지 추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가령 보수 텃밭이라던 경북 성주군은 사드 배치 이후인 2016~2017년 사이에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10%~20%포인트나 줄었다. 이걸 기사에서 볼 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래픽으로 보면 눈에 탁 띈다. 이런 게 디자인의 힘이다.

또 하나. 정치에는 이슈가 워낙 많다. 이슈가 많으면 자연히 글이 많아진다. 그걸 좀 더 보기 쉽게 하는 것, 조판을 더 잘해서 글을 읽는데 눈의 피로를 덜고 뇌가 생각을 더 잘하게 해주는 것, 이런 게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한 단락 폭을 몇 mm로 주느냐에 따라 읽는 속도와 이해도에도 영향을 많이 미친다. 그런데 아직 활자 언론이나 매체들은 이에 대해 많이 고려하지는 않더라. 이번 책에선 디자인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체나 줄 간격 등 굉장히 상세한 부분까지 많이 신경 썼다."

"정파적이지 않고 다양한 정보 제공하는 시사 콘텐츠 부족해"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기획한 전국투표전도 2018 기획.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기획한 전국투표전도 2018 기획.
ⓒ 조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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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펀딩이 대성공을 거뒀다.
"재미로 한 게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웃음). 책자 후원을 2만 원부터 받았는데 그 정도면 비싼 편이지 않나. 제가 알기로는 이런 종류의 책이 나온 게 처음이라 관심을 받았던 것 같다. 애초엔 100명 후원만 받아도 성공한 셈 치자고 했었는데 하루 하루 후원액을 보고 깜짝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콘텐츠라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을지 궁금하셨던 것 같다. 그동안 지역 이슈에 대해 알고 싶어도 쉽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 국면도 한몫했을 것이다. 기존의 정치 시사 콘텐츠는 아무래도 어떤 정파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책들이 많은데, 그게 나쁘다기보단 그런 콘텐츠만 많이 있다 보니 좀 더 다양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보면서 판단하고픈 분들이 소비할 만한 콘텐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장점이 있었다고 본다."

- 자료 조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나도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라 지역별 이슈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지역 이슈를 다 커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건별로 조금씩 깊이 들어가는 방법으로 조사했다. 예컨대 지역에서 고속 철도를 짓는 데 갈등이 있다든가, 최근 군산 GM 공장 문제라든지, 현안이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알아봤다. 조사하는 과정이 시간도 가장 오래 걸렸고 어려웠다."

- 지역 자료를 찾다 느끼는 게 많았을 것 같다.
"지역 언론 기사를 보면 지자체장이나 지역 정치인을 너무 지나치게 칭찬하는 내용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의심스러운 것들은 자료에서 뺐다. 작은 시단위나 군단위 같은 경우, 아예 대놓고 '우리 지역의 시의원·군의원 누구누구가 해냈다!' 식의 기사들이 많더라. 청탁을 받고 썼다고 의심되는 기사들이다. 너무 많았다. 그런 기사 하나만 보고 판단하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역 특색에 맞는 공약들이 있다는 것도 재밌었다. 예를 들어 농촌 지역 주요 공약 중에 퇴비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공약들이 많다. 이런 종류의 복지는 중앙당의 이념 성향이나 복지를 달가워하지 않는 정당이라도 모두 공통적으로 내세우고 있더라. 중앙 정치에선 거리가 멀지만 지역의 현안에 따라 지방 특색을 가진 이슈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개인적으로 놀란 것도 있다. 이번 펀딩으로 페이스북 페이지를 따로 만들었는데 고등학생 연령대의 '좋아요' 숫자가 많더라. 정치·시사 이슈 콘텐츠 시장이 아직 발굴해내지 못한 소비자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전국을 모두 조사하며 도가 텄을 것 같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관심이 가는 지역이 있나.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각 시도의회 쪽이다. 특히 지역 중에 보수 정당의 지역 조직이 잘 돼있다고 하는 곳들이 있지 않나. 요즘은 하도 민주당 세가 강하다 보니까 그런 곳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보수의 위기라는데 정말 보수 정당의 위기가 맞는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보수 텃밭의 시도의회 선거를 주의 깊게 보자."

"'누가 무슨 말 했다' 정치 기사 지겨워... 유권자들에게 보다 압축적인 정보 줘야"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만든 전국투표전도 홈페이지.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익씨가 만든 전국투표전도 홈페이지.
ⓒ 조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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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부 기사는 지겹다고 했더라.
"아무래도 공식 언론사는 어쨌든 선거 기간에 보도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철칙이 있어서 그런지 어떤 후보가 어디 유세 가서 무슨 말을 했다는 식의 기사들이 주구장창 나온다. 하지만 유권자 입장에서 그런 종류의 기사들이 많이 나올수록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펀딩 후원 피드백을 살펴보면 정치에 관심이 없다가도 선거철이 돼서야 어떤 후보, 어떤 정당에 표를 줄지 막 탐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더라. 그런 이들 입장에서 어렵지 않고 쉽게 정보에 접근해서 전체 추이를 알 수 있도록 돕는 기사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지난 4년간 이 지역에서 어떤 정당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했다든가, 지금까지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들이 부족하다 싶었다. 이 프로젝트도 그런 맥락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게다가 지방 선거는 지역의 선거다. 아직도 중앙 언론에서 주로 나오는 이야기들은 중앙 정치인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당 대표 발언이라든가, 아니면 어느 유력 중앙 정치인이 어느 후보 선거 사무실 개소식에 가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들 따위다. 정작 그 지역 출마 후보의 발언은 안 나온다. 이런 보도는 지방선거의 의의와도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도 이번에 책을 만들면서 중앙 언론이 지역의 일을 다 챙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꼈다(웃음). 그래도 지역에 이런 이슈가 있다는 걸 한 줄이라도 언급해주면 유권자들도 선택에 도움받을 것이고, 지방자치라는 이번 선거의 의의에도 부합할 것이다."

- 직접 만나보니 '정치덕후 디자이너' 맞는 것 같다. 정치에는 원래 관심이 많았나.
"정치덕후 맞다(웃음). 대학에서 시각디자인과 컴퓨터공학과를 공부했다. 이과라고 하면 정치에 관심이 없을 거란 인식들이 있는데, 저처럼 정치에 관심 있는 이과들은 오히려 더 심하다. 졸업전시 때는 2012년 19대 총선 결과를 갖고 투표 전도를 만들었다(투표전도 홈페이지). 이과는 관심있는 분야의 '덕질'도 분석적으로 하게 된다(웃음). 지금은 아니지만 최근까지 진보정당에서 꽤 열심히 일한 당원이기도 했다. 일신상의 이유들이 정리되면 다시 당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특히 선거가 되면 같은 '정덕'들끼리 내기를 하는데 이번 선거에서도 5명 정도와 함께 했다. 서울에서 안철수가 김문수를 이길까, 제주도에서 원희룡이 또 될까, 배현진이 송파을에서 30%를 넘길까 등등. 중앙선관위 투표 독려 캠페인 홍보대사가 레드벨벳이 될 것이냐도 있었다(웃음)."

"디자인의 힘으로 사회적 발언 주도하는 디자이너 되고 싶다"

- 향후 비슷한 계획이 있다면.
"가장 가까운 목표는 취직이다(웃음). 사실 이런 종류의 콘텐츠를 다시 만들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관심있는 주제가 바뀔 수도 있고,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프로젝트도 퇴직 후 시간이 생긴 점이 컸다. 당장 2년 뒤 총선 때 또 이런 시간이 날지도 알 수 없다. 이걸 정기적으로 해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여건상 힘들 것 같다."

- 꿈이 있다면.
"개인의 진로 계획이랄까 하는 것들은 물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고 경력을 쌓은 뒤엔 개인 스튜디오도 가지면 좋겠다. 큰 틀에선 디자이너가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데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

- 디자이너의 사회적 발언을 주도한다?
"사회운동이나 정당 등 어떤 프로파간다를 전달해야 하는 클라이언트들은 많이 있다. 그분들에게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자인이 할 일이 있다. 읽기 쉽고 보기 좋은 게 중요하단 정도까지는 공감대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디자인이 먼저 그런 기획을 제안하거나 디자인 작업이 운동의 방식으로서 사회적 발언을 주도하는 작업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정당에서 홍보용 카드뉴스를 만들어봤다. 보통 이렇게 한다. 당에서 디자이너에게 이런 작업물이 필요하니, 시간 이틀 줄 테니 빨리 만들라고 하는 식이다. 하청을 주는 식인 거다. 아까 이 책을 디자인의 힘으로 정리했다고 말했듯이 사회적인 발언을 디자인의 힘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건 어떨까. 그런 작업을 디자이너가 주도할 수 있는 전문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 사회 운동이라고 했는데, 특별히 관심있는 영역이 있을까.
"성과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다. 사회운동 단체든 정당이든 기업이든 어떤 주체든 그것이 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공감된다면 얼마든지 디자인의 힘을 보태고 싶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책 맨 앞부분에 적어놓은 것이 있다. 이번 투표전도 작업을 한 사람은 두 명이고 글을 쓴 사람은 한 명이었다. 그렇게 적은 사람이 전국을 다 조사해서 만든 내용이 236쪽 분량의 책으로 나왔다. 혼자 조사해도 이 정도다. 이 책을 읽으시는, 혹은 다른 유권자분들도 선거 기간 동안 조금만 시간을 내서 살고 계신 지역을 조사한다면 이만큼 이상의 내용을 알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도 엄청 대단한 방법을 쓴 게 아니라 인터넷 검색, 공식적인 정부 통계만 사용했다. 투표에 후회가 있어선 안되잖나.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동안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읽는 분들도 재밌었으면 좋겠다."


태그:#조현익, #6.13지방선거, #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전국투표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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