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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각으로 24일 트럼프 대통령의 느닷없는 취소 선언으로 북미정상회담이 무산될 것 같았지만, 반드시 비관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트럼프의 취소에 대한 북한의 반응도 색달랐다.

그 정도 되면 뭔가 쏘아 올릴 태세를 보이든가 입으로라도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할 법도 했는데,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25일 자 담화를 통해 '우리 마음을 왜 몰라주느냐?' 식의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는 북한의 적대적 태도 때문에 회담을 취소한다고 했지만, 그 적대적 태도라는 것은 미국의 지나친 언행에 대한 '반발' 수준이었다며 귀엽게 봐달라는 뉘앙스의 해명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한 '커다란 분노와 노골적인 적대감'이라는 것은 사실 조미 수뇌 상봉을 앞두고 일방적인 핵 폐기를 압박해온 미국 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자 트럼프의 입에서도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며 "(회담 날짜가) 6월 12일일 수도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미국 시각으로 25일 오전 백악관에서 기자들한테 한 말이다.

전날 취소할 때만 해도 "(김정은) 당신은 당신의 핵 보유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핵 능력은 매우 강력하기에 우리가 핵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신께 기도합니다"라며 귀여운 협박을 했던 그가 하룻밤 자고 나서 미묘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작년 연말까지 보여준 험악한 상황대로라면 지금쯤 말로라도 한판 대결을 예고할 법도 한데, 지금 김정은과 트럼프는 그마저도 하지 않고 있다. 양측 다 회담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판을 완전히 깨고 나갈 생각이나 자신감은 없는 것이다.  

협상장에 나오는 국가들은 협상하지 않고는 안 될 이유가 있는 나라들이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을 쌓고자 나오는 경우가 아닌 한, 그렇다. 미국 같은 세계 최강국이 전쟁이 아닌 협상을 선택했다면, 협상을 꼭 해야 할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협상해 가다 보면, 결국에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가능성이 작지 않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처럼 회담 전망이 어두워질 때가 있더라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바다 상황을 끝까지 주시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한 결과로 최후에 웃음을 짓게 된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성공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1871년 통일 당시의 비스마르크.
 1871년 통일 당시의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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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하지 않고 협상에 끝까지 성의를 보여 자기 민족의 대업을 성취한 인물이 있다. 군사력과 강공만 썼을 것 같지만, 의외로 협상에서도 끈기와 수완을 발휘한 인물이다. 독일제국 초대 총리인 비스마르크(1815~1898)가 바로 그다.

비스마르크는 비타협적 이미지를 풍기는 철혈재상이란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뜻밖에 '소프트'한 인물이었다. 인내심을 발휘할 줄도 강했다. 자존심을 죽일 줄도 알았다. 이런 태도로 그는 민족의 대업인 독일 통일(1871)을 완수했다.

962년부터 독일 땅에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면서 교황청과 제휴하는 신성로마제국이 있었다. 그 아래, 수많은 제후국이 있었다. 외형상은 하나의 나라이지만 실제로는 분열된 상태였다. 통일국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된 뒤에는 이 땅에 독일연방이 등장했다. 이 역시 통일국가로 볼 수 없었다. 35개 제후국과 4개 자유도시로 구성된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1862년 프로이센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훼방자들과 전쟁을 벌이는 방법으로 통일 과업을 추진해 나갔다.

1864년에는 독일연방 북쪽의 덴마크를 전쟁으로 제압했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과 더불어 독일연방을 주도하던 라이벌 오스트리아를 전쟁으로 제압했다. 그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완수하고자, 패전한 오스트리아를 내쫓고 북독일연방을 결성했다. 그런 다음, 1870년에는 서쪽의 프랑스마저 전쟁으로 제압했다. 그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반대할 만한 나라들을 이렇게 순차적으로 제압했다. 

독일연방의 국장(국가 상징 문양).
 독일연방의 국장(국가 상징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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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이란 수단을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한 힘은 없었다. 북독일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남부 제후국들을 끌어들여 통일을 완성하자면, 나머지 과정만큼은 협상을 통해 마무리해야 했다. 비스마르크 전문가인 역사학자 강미현의 <비스마르크 평전>은 이때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1870년 연말에 프랑스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도달하면서 통일 추진의 필요성이 대두됐을 때의 상황이다.

"전쟁의 승리가 가시화되어 감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남부 국가들과의 화합을 기대했으나, 정치적 흐름은 순탄치 않아 보였다. 전쟁에서 함께 고군분투한 그들이었지만, 새로 마주한 자리에서 그들 각자 서로 다른 목적에다 적대감마저 지녔기 때문이다."

24일 자 서한에서 트럼프는 "당신이 최근 발언에서 표출한 분노와 적대감에 비추어 봤을 때, 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긴 시간을 들여 계획해왔던 회담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북한 외교 라인의 발언에서 느낀 그 적대감. 그런 적대감을 비스마르크도 통일협상 과정에서 느꼈다. 덴마크·오스트리아·프랑스를 연달아 제압한 비스마르크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장기간의 분열로 인한 상호 적대감이 협상 파트너들의 말과 눈빛에서 느껴졌다. 남부 제후국인 바덴·헤센·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은 통일이란 것 자체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비스마르크 평전>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남부의 대표 격인 바이에른은 그들의 단결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북독일연방을 해체하고 예전의 독일연방으로 대체하여 회원국들이 보다 강한 독립성을 보장받기를 원하는 쪽으로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의견이 분분해짐에 따라 결국 남부 국가들의 북독일연방 가입과 관련된 협상 문제는 베르사유에서 개최되는 군주회의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북독일연방의 국장.
 북독일연방의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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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 연기되고 통일작업이 지연되는 것을 비스마르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세 나라나 연달아 격파한 그였지만, 그래서 한 번쯤 무력적 해결을 생각해봤음 지도 한 그였지만, 참을성을 유지하면서 협상 모드를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인내심의 시험도 받았다. 바이에른이 판을 깨고 나가려 했다. 그래서 바이에른을 가까스로 설득해 통일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통일이 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뷔르템베르크가 판을 깰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그쪽과도 추가 협상을 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남부 국가들과의 협상을 끈질기게 이어나갔다. 평소에는 무례하다는 인상까지 풍겼던 비스마르크는 이 협상에서만큼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성인군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여차하면 협상을 깰 수도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 남부 국가들을 포용하자니, 이것저것 양보할 것도 많았다. 그래서 북독일연방 회원국들이 누리는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그들에게 약속해야 했다. 일례로. 바이에른에게는 바티칸으로 대사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나 연방의회 외교위원장을 맡을 수 있는 권한 등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통일 과정에서 소외시킬 듯이 하면서 애간장도 태워봤다. 남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애간장도 태워야 했으니, 비스마르크 자신도 속이 무척 많이 탔을 것이다. 지금의 김정은과 트럼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잊지 않았다.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고자 자존심을 최대한 억눌렸다. 그가 잊지 않은 또 다른 것은, 상대방한테 명분은 내주더라도 실리는 꼭 챙기자는 것이었다.

바이에른에 외교위원장 자리를 내준 것도 그랬다. 외교 문제에 관한 최종 결정권만큼은 연방 정부에 남겨두었다. 이리저리 양보하다가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해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서도 실익을 잃지 않고자 이리저리 두뇌 회전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남부 국가들을 독일 통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통일 독일인 독일제국의 국장.
 통일 독일인 독일제국의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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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8일의 독일 통일은 덴마크·오스트리아·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뿐 아니라, 바덴·헤센·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과의 협상을 인내심을 갖고 끈덕지게 진행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비스마르크 평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순탄치 않은 과정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뜻대로 모든 상황을 돌려놓았다. (중략) 북부 독일을 위해 구상해온 통치체제가 시간을 두고 큰 수정이나 강압적인 조치 없이 남부 국가들에 의해 수용된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협상에서 보여준 대로 그들을 정복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대가이기도 했다."

협상장에 나온 국가들은 대개는 협상이 꼭 필요한 나라들이다. 비스마르크는 그런 이치를 잊지 않고 끈기 있고 넓은 마음으로 협상 테이블을 지켰다. 당장의 낙담스런 상황 때문에 일희일비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독일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업을 자기 민족한테 바칠 수 있었다. 남북한과 미국도 그런 태도로 협상 모드를 유지하며 한반도 평화 및 북미관계 정상화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태그:#북미정상회담, #독일 통일,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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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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