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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으로 향하는 도로표지판마다 'AH-6'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옆에 앉아있던 아이는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타원형의 파란 바탕에 흰색 숫자가 적힌 곳은 국도이며, 노란 직사각형의 검정색 숫자는 지방도라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을 만큼 '지리 박사'인 그도 생뚱맞은 알파벳 두 글자가 낯선 모양이다.

AH는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의 줄임말이다. 지난 1959년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교류 확대를 위해 국제연합(UN)이 시작한 프로젝트로, 아시아 32개국을 동서로 관통하여 유럽에 이르는 55개의 대륙 횡단 루트를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두 개의 노선이 지나는데, 부산을 출발해 서울과 평양, 베이징을 잇는 'AH-1'과 부산에서 강릉, 원산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닿는 'AH-6'이 그것이다.

"아빠, 이 길을 따라 직접 차를 몰고 유럽 여행 떠나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아이는 혼잣말하듯 물었다. 분단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비행기가 아닌,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도로 변에 보이는 건 온통 군부대뿐이고, 하얀 포말이 쉴 새 없이 부서지는 해변에도 철책이 둘러져 있는 살벌한 풍경을 보며 아이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원경으로 금강산 자락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따가운 햇볕을 피해 줄을 섰습니다.
▲ 북녘 땅을 바라보는 관광객들 망원경으로 금강산 자락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따가운 햇볕을 피해 줄을 섰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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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과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가 맞닿은 동해바다의 호위를 받으며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향하는 길이다. 이태 전에 왔을 땐 남북으로 곧게 뻗은 4차선 도로가 쓸모없이 느껴질 만큼 한산했는데, 이번엔 아침부터 밀려드는 승용차들로 북새통이었다. '4. 27 판문점 선언'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인 듯싶었다.

대한민국 최북단인 이곳은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오지 중의 오지다. 특히 지난 9년간의 보수 정권 시절엔 그 흔한 단체 안보 관광객들조차 사라진 터였다. 지금도 분단으로 인해 두 동강 난 강원도 고성군의 군청소재지만 지나면 변변한 휴게소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썰렁해 살갗에 와 닿는 바람마저 스산하게 느껴진다.

늘 그렇듯 변화는 길 위에서 시작된다. 도로 위엔 굉음을 내며 달리는 육중한 군용 트럭들 대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의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부분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지만, 줄지어 선 대형 버스들도 더러 보인다. 최근 들어 땅을 보러 오는 서울 사람들이 시나브로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휴게소에서 만난 한 주민으로부터 듣기도 했다.

오전 10시경이었는데도, 통일전망대 출입 신고소는 이미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주차선이 줄다리기 끈 마냥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을 뿐 별도의 개별 주차 공간은 없다. 도착한 순서대로 앞 차의 꽁무니에 이어 대라는 뜻이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려니 뒤에는 벌써 뒤따른 차량 예닐곱 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개별 출입 신고와 함께 별도의 입장료와 주차요금을 치러야 한다. 민통선 안이 무슨 사설 관광지도 아닌데, 입장료를 징수한다는 게 쉬이 납득되지는 않지만 누구 하나 문제 삼는 이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창구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마당에 직원에게 꼬치꼬치 이유를 캐묻기도 힘들다.

출입 신고 과정에서 이수하도록 돼 있는 안보교육 영상입니다. 말이 안보교육이지,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는 반북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안보교육을 받고 있는 관광객들 출입 신고 과정에서 이수하도록 돼 있는 안보교육 영상입니다. 말이 안보교육이지,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는 반북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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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이 아니다. 관람권을 받은 뒤 동선을 따라 매표소 옆 안보교육관으로 가서 20분 남짓의 영상물을 시청해야 한다. 매표소의 직원은 부러 상영 시작 시간까지 관람권에 적어주면서 반드시 관람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따로 확인하는 이도 없을 뿐더러 한꺼번에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일일이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처음 방문한 이들은 시간까지 엄수하며 공부하듯 시청하기도 하지만, 대충 보는 시늉만 하고 나오거나 아예 안보교육관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자리를 뜨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새치기하듯 서둘러 빠져나가는 차들이 한데 엉키면서 출구가 이내 혼잡해졌다. 안 봐도 되는 거였냐며 불만으로 토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도 했다.

"시답잖은 내용에다 화질까지 조잡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상을 시청한 이들의 하나같은 반응이다. 건물의 이름처럼 '안보교육'을 내세웠지만, 실상 '반북교육'에 불과하다. 6.25 전쟁 관련 내용이 대부분인데다 북한 정권의 야만성을 줄곧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 김정일이 김정은으로 바뀌고 언어만 다소 순화되었을 뿐,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얼마 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났고,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까지 거론되는 마당에 대화의 상대를 조롱하고 악마화하는 영상이 버젓이 상영된다는 게 황당했다. 한쪽에서는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영상이 끝날 때쯤 울려 퍼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생뚱맞게 들리는 이유다.

증오로는 평화에 단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다. 역시나 자막엔 국가정보원이라는 다섯 글자가 뚜렷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분단 장사'에 목매단 그들의 오랜 관행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영상이든 팸플릿이든 사회적 통념과 상식에 반하는 안보교육은 이미 수명을 다한 냉전적 사고를 관광객들에게 강요하는 행위로서, 단언컨대, 역사적 퇴행이다.

출입 신고소를 나와 북으로 11km를 더 가야 통일전망대에 닿는다. 민통선 검문소에서 신분증과 차량 내부를 간단히 검사한 뒤 통행증을 발급 받으면 더 이상의 번거로운 절차는 없다. 검문소에서 일러준 규정대로라면, 중간에 차를 멈춰 세워 내려서도 안 되고, 촬영이 허가된 곳을 제외하곤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 허가되지 않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엄포가 뒤따랐다.

한두 대도 아니고 수백 미터 이상 늘어선 차량의 트렁크를 일일이 열어보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텐데, 총까지 둘러맨 채 묵묵히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앳된 군인들이 가엾어보였다. 차라리 출입 신고소부터 통일전망대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한다면 그런 수고로움은 벗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개별 차량의 통행량도 줄어들 테니 에너지 절약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통일전망대는 대목이라도 맞은 듯 북적였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도 있고, 목 좋은 자리엔 어김없이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군데군데 자리한 초소의 철책만 아니라면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었다. 순간 바로 코앞이 북한 땅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흡사 우주선 발사대처럼 생긴 새 통일전망대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 신축 중인 통일전망대 흡사 우주선 발사대처럼 생긴 새 통일전망대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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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가 어수선한 건 관광객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존의 3층짜리 낡은 전망대 곁에 흡사 우주선 발사대 모양을 한 큼지막한 새 전망대 공사가 한창이었다. 완공된 후 승강기를 타고 꼭대기에 오르면 병풍처럼 늘어선 금강산의 준령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한반도에 봄이 왔을 때, 과연 이게 명물이 될지 애물단지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실 이번 연휴에 왕복 1000km 운전을 멀다 않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대한민국 최북단에 자리한 기차역이라는 제진역을 보기 위해서다. 우리 영토지만, 정작 철로는 북한과 연결되어 있어 기차를 타고는 갈 수 없는 외딴 섬 같은 곳이다. 남북 관계에 따라 부침이 심했던 터라 지난 달 남북정상회담 이후 가장 주목을 끄는 '핫스폿'이 됐다.

그러나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통일전망대는 갈 수 있어도, 그보다 수km 남쪽에 위치한 제진역은 가볼 수 없다.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는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는 탓이다. 제진역 입구 경비실 근무자의 말에 따르면, 제진역을 구경하려면 사전에 국가정보원이나 국방부에 별도로 방문 신청을 한 뒤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미리 출입 절차 등을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 탓이긴 하지만, 역 앞까지 6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있는 마당에 정부의 융통성 없음이 아쉬웠다. 이 또한 셔틀버스 운행을 통해 얼마든지 관광객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실 통일전망대를 찾은 관광객들 중에 TV 뉴스에서 봤다면서 제진역을 보기 위해 부러 찾았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번 여행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단어다. 분단된 한반도에 봄기운은 완연하지만, 아직 봄을 맞을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에서다. 아이의 말마따나,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떠나는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아이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그렇듯, 평화와 통일의 과정 또한 한 판 승부가 아니야. 남북정상회담이 마중물일지언정 그것만으로 세상이 단박에 좋아질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야. 그렇다고 낙담할 것까진 없어.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고 휴전선의 철책이 한 뼘씩 걷혀가다 보면, 네 상상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라 믿어."



태그:#남북정상회담, #통일전망대, #제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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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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