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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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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를 꿈꾸며

조상연

만인보 스무 페이지도 못 넘겼는데
한하운의 전라도길을 옮겨 적다 말았는데
어느새 어둠은 물러가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네
낮 한 시간 뚝 떼어다가
새벽 두 시와 세 시 사이 끼워 넣고
그 까만 밤에
어둠이 착, 가라앉은 그 까만 밤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든가 시를 읽든가


딸아, 아버지는 삶이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25시를 꿈꾸며 사는 사람이 아버지다. 언제 네 앞에서 맥 빠진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더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하루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왜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은 많은지...

시장 안에 있는 휴대전화 가게를 놀러 갔는데 젊은 사장 하는 말이 "형님,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하기에 배부른 소리 말라고 일축하고 말았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버지는 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거 없이 풍요로우니 삶에 긴장감이 없고 긴장감이 없으니 사는 일이 재미가 없을 수밖에. 아버지가 평소 너에게도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에 시장 안 막창집에 앉아 소주 한잔 하며 그에게 한 말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별것도 아닌 동네일도 형님만 끼어들면 갑자기 생기가 돌고 분주해지는데 저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바로 코앞이 시장인데 삶이 재미가 없다? 그렇거들랑 아침저녁으로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시게. 대단하지 않은가?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자네랑 나랑 시장바닥 막창집에 앉아있지만 사실 이 집이나 근사한 고깃집이나 안줏값 차이가 별로 없어."

"……."
"나는 가끔 먼지 풀풀 날리는 장바닥 막창집을 찾지. 똑같은 돈 써가며 더우면 더워 추우면 추워 거기에 비위생적이야, 그래도 내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나하고 같은 높이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야. 지금 맞은편 노인네 술에 취해 깔깔거리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지."

"쉽게 이야기해봐요 좀."
"나는 내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잘난 사람들이 아무리 나한테 잘해줘도 그건 친절이지 위로로 다가오지 않더라고. 우리가 왜 개그맨을 보고 웃어? 극 중에서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실수를 보고 웃는 거야. 그 웃음은 바로 그들에게 위로를 받았다는 뜻이지 그들을 비웃는 게 아니야. 동병상련이랄까? 자네가 삶이 재미없다는 말속에는 남이 자네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그게 충족이 안 된다는 말로 나는 들었어."

"에이, 또 넘겨짚으시네……."

"자네, 하루 24시간이 짧아 본 적이 언제야? 다른 사람들은 안 되는 일이 자네는 되는 일이 있어. 그런데 그걸 하려고 하지 않아. 우리 작은딸 못 봤어?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2년 동안 열심히 돈 모으더니 여행 다닌다고 직장도 그만두잖아. 작은딸이 뭐라는 줄 알아? 2년 만에 팀장이 되었는데 원장을 만족시켜 팀장은 되었을지언정 자기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대. 그래서 벌어놓은 돈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다니기로 했대. 우리 작은딸처럼 남을 만족시키는 일 말고 자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을 해. 남들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해? 쓸 줄을 모르는데? 쯧쯧."

"형님 작은딸은 정신 나간 애지 그게 멀쩡한 애요? 히히."

"그래? 자네는 딱, 거기까질세. 그렇게 꽉 막혔으니 애들도 아빠만 보면 피해 다니지. 쯧쯧. 오늘 술값은 자네가 내시게"



태그:#모이, #딸바보, #아버지, #딸사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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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단어로 짧고 쉽게 사는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http://blog.ohmynews.com/han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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