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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조선왕조 멸망 때, 나라는 물론이고 파트너마저 단체로 상실한 집단이 있다. 상실한 파트너는 관리 및 선비들이다. 이들과의 파트너십을 상실한 집단은 관청에 속한 기생들이다.

기생의 본업은 관청 행사 때 춤과 무용을 공연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미지가 성매매와 연결된 것은 19세기 후반 개항장에 일본 유곽이 들어오고 그곳 여성 근무자들이 기생이나 창기로 불리면서부터다. 일본 유곽 여성과 달리 조선 기생 대부분은 관청에 속한 공노비이자 직업적인 예능인이었다.

그래서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과 다르게, 기생과 관리·선비 간의 은밀한 접촉은 용이하지 않았다. 형법 중 하나인 <대명률직해> 형률 편에서는 "관리가 기녀나 윤락녀의 집에 유숙하면 곤장 60대를 치고, 알선자에게는 1등급 감경한 형벌을 가한다"고 했다.

'머물다'란 의미의 유숙(留宿)은 성관계를 포함하는 표현이다. 현대인들이 노골적인 단어를 피하고자 '함께 자다'란 표현을 쓰는 것처럼, 옛날 사람들도 그런 우회적 표현을 사용했다. 

위의 규정은 관직이 없는 선비한테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그런 선비들도 관리 못지않은 지위와 명예가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노골적으로 기생과 접촉할 수는 없었다. 물론 형법을 어기고 사적 만남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생과의 공식적 만남은 관청 행사장에서나 가능했다. 그게 아니면 시와 술이 오가는 연회에서 가능했다.

이런 기회를 통해 기생은 관리·선비들과 파트너십을 쌓았다. 그들과 더불어 시와 술을 주고받으면서 예술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기생' 하면 일반 남성보다는 관리나 선비가 먼저 떠오르게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기생들의 악기 연습. <군산 해어화 100년>에 실린 사진.
 기생들의 악기 연습. <군산 해어화 100년>에 실린 사진.
ⓒ 전북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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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왕조 멸망으로 기생이 왕조의 공공 행사에 나설 이유가 없어졌다. 이로써 기생과 관리의 파트너십은 종결됐다. 또 선비들의 사회적 리더십도 함께 붕괴됐기 때문에, 기생과 선비의 예술적 동반자 관계도 예전 같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생들 입장에서, 1910년은 나라뿐 아니라 파트너까지 상실한 해였다.

이런 기생들이 1910년 이후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 최근에 나왔다. 2007년부터 군산 문제나 문화·정치·언론 문제에 관한 글을 <오마이뉴스>를 통해 발표해온 군산 출신 조종안씨가 편찬한 <군산 해어화 100년>이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의미인 해어화(解語花)는 기생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군산문화원이 기획하고 전북문화원연합회가 발행했으며,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은 이 책의 맨 뒷면에는 '편찬자 조종안'으로 적혀 있다.

'지은이 조종안'으로 했어도 됐겠지만, 이 책이 자료집 성격이 강하므로 그런 타이틀도 괜찮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던 모양이다. 신문기사 및 광고 400매, 사진 120장 이상이 수록됐으니 자료집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가 나올 만도 했을 것이다.

편찬자 조종안은 군산 기생뿐 아니라 기생 일반에 관한 내용도 깊이 연구했다. 이렇게 기생 제도를 깊이 탐구하다 보면, 꼭 하고 싶어지는 말이 있다. '기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항변이다. 자기가 기생이 아니면서도 기생을 변호하게 되는 것이다. 편찬자 조종안도 그랬다.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생은 뭐하는 사람이었겠느냐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 만난 사람의 80%가 ······ 요정 종업원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성매매가 목적인 유곽과 기생들이 전통 가무를 연행한 요정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많았다."


그래서 기생에 관한 편견을 바로잡겠다는 신념으로 이 책을 집필했노라고 편찬자 조종안은 말한다.

"잘못된 역사의 매듭은 오랜 시간 상처를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필자는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7~8년 전부터 기생 관련 자료(옛날 신문 및 사진, 문헌, 연구논문 등)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군산의 마지막 예기 김난주, 장금도 두 할머니를 20여 차례 만나 녹취도 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구술집도 만드는 등 그들의 삶을 정리하였다."


<군산 해어화 100년>.
 <군산 해어화 100년>.
ⓒ 전북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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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자의 말대로 선입견을 지워버리고 기생의 실체에 다가서다 보면, 우리는 여태껏 알지 못했던 매력이 그들의 옷에 잔뜩 묻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매력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 때 그들이 보여준 처신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왕조 멸망과 함께 기생은 선비나 관리 같은 예술적 파트너를 상실했다. 1910년을 계기로 조선 관리는 역사무대에서 사라졌고 조선 선비는 현격히 약해졌다. 대부분이 관기였던 기생들 역시 타격을 입었지만, 그런데 기생들은 선비나 관리들과 달리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고 악착 같이 노력했다. <군산해어화 100년> 제2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등 지방의 향기들이 상경 러시를 이룬다. 서울에는 한성(광교), 다동(대동) 등의 기생조합이 구성된다. ······ 기생조합은 1914년 이후 일본식 이름인 권번으로 바뀐다. 광교기생조합은 한성권번, 다동기생조합은 대동권번, 3패들로 구성된 신창기생조합은 경화권번으로 개칭된다."
일제강점기 군산 기생들. <군산 해어화 100년>에 실린 사진.
 일제강점기 군산 기생들. <군산 해어화 100년>에 실린 사진.
ⓒ 전북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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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직화를 통해 세력을 형성하는 것 외에, 그들이 투자한 또 다른 노력은 세상 및 민족과 파트너가 되기 위한 활동이었다. 오랜 파트너였던 선비·관리를 보내는 대신, 세상과 민족을 새 파트너로 만들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하에 억눌린 우리 민족의 권익을 찾기 위한 활동에 기생들이 집단적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던 것이다.

<군산 해어화 100년> 제3장 '옛날 신문에서 만난 군산 해어화' 편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일제강점기 하의 고아들을 위한 그들의 헌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1920년 6월 19일치 <동아일보>는 '기생 연합연주회, 고아들을 위하여'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남·대정·한성·경화 네 기생 권번에서 경성고아원을 위해 19일 밤부터 나흘 동안 시내 단성사에서 자선 연주회를 연다'고 보도하였다."


관리나 선비들 앞에서 공연했던 기생들이 이제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사회적 약자들 앞에서, 그것도 대가 없이 공연을 하게 됐던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만 배려한 게 아니다. 사회의 기둥인 학생이나 기업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1922년 여름에는 군산 개복기독교청년회와, 무산계급 아동교육에 뜻을 같이하는 조선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영신여학원을 설립하였다. ······ 군산권번·보성권번·군창예기조합·한호예기조합 기생들도 학원 설립과 교사 신축을 위한 의연금 모금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우리 물산 장려 거리행진과 성금 모금에도 앞장섰으며 조선인 야학 및 기성회, 체육회, 청년회 등 지역의 다양한 단체들과 교류하면서 직간접적 지원도 하였다."


학교 설립을 위한 성금 기부뿐 아니라 조선 기업인들을 위한 국산품 장려운동 즉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 운동을 위해 성금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거리 행진에도 앞장섰다. 총독부가 싫어하는 일을 앞장서서 했다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또 세상 및 민족과 파트너가 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가슴 속에 민족 사랑이 끓고 있었다는 점은 1923년 8월 하와이 교포방문단이 군산을 방문했을 때 표현해준 사랑에서도 드러난다. 김산월·최비취·강산월을 포함한 기생 10여 명이 하와이 동포들을 위해 성금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1923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고국을 떠나 하와이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게 뭔가 하나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1927년 4월이었다. 군산과 인연이 깊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의 차가워진 육신을 운반하는 영구 행렬이 군산에 도착했다. 이때도 기생들은 민족사랑을 보여주었다. 서울을 출발한 영구 행렬이 평택역을 통과할 때는 평택 기생 10여 명이 조등(상갓집 표시 조명등)을 들고 플랫폼에 나왔다가 관의 제지를 받았다. 행렬이 군산에 진입한 뒤에는 군산권번과 보성권번 기생들이 부조금 모금에 동참했다. 그들의 관심사가 민족문제로까지 확장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산 해어화 100년>의 한 페이지.
 <군산 해어화 100년>의 한 페이지.
ⓒ 전북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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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및 민족과 하나 되기 위한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도전이 가슴 절절한 진심에 기초했다는 점은, 그들의 활동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펼쳐졌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선비나 조선 관리가 없어진 빈자리를 세상 및 민족으로 채우려고 노력했다.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그들도 결국 선비나 조선 관리들처럼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했던 일제강점기 하 그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할 것이다.

<군산 해어화 100년>은 그런 그들의 도전과 몸부림을 객관적 사실을 나열하는 방법으로 소박하고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극에서 묘사된 것과 전혀 딴판인 기생의 모습을 그렇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서점에서는 만날 수 없다. 비매품이다. 6월 중에 전자북으로 발행된다고 한다.


태그:#군산 해어화 100년, #조종안,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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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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