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비범하고, 자유롭고, 인간적인 작품인가!' (토마스 만)
'매년 성경처럼 <돈키호테>를 읽는다.' (윌리엄 포크너)

몇 년 전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읽은 적이 있다. 속편을 빼고도 700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다. 한 번 잡으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나는 당시 버스로 출퇴근을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흔들리는 출근 버스에서 두툼한 책을 펼치고, 혼자서 실성한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던 기억이 뚜렷하다. 웃다가 민망해서 고개를 드니 버스는 한강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 찰스 디킨스, 윌리엄 포크너 등 세계 최고 작가들이 찬사를 바친 위대한 소설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요약본으로 읽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담긴 풍자와 해학의 맛을 잘 알 길이 없다.

돈키호테와 산초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분장하고 스페인 미식 여행 중인 두 영국 남자

▲ 돈키호테와 산초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분장하고 스페인 미식 여행 중인 두 영국 남자 ⓒ 찬란


'돈키호테의 나라'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는 두 남자가 있다. 햄릿의 나라에서 온 영국인들이다. 문학에서 대비적 캐릭터의 상징이 된 돈키호테와 햄릿. 앞뒤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인간형이 돈키호테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을 햄릿이라고 한다. 이렇게 유명한 두 인물을 창조한 작가들인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의 인연도 흥미롭다.

1616년 4월 23일. 문학사의 두 거장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다. 스페인의 대표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들이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돈키호테>를 모르면 서양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르반테스는 방대한 지식과 통찰, 유머로 당대 사회를 비판하고 조롱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다들 아실 터이니 더 이상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고 본다.

육아에서 해방된, 능청스럽고 수다스러운 배우

영국 남자 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은 함께 스페인 미식 여행을 떠나게 된다. 400여년 전 돈키호테와 산초를 상상하며, 스페인 전역을 누비는 것이다. 토마스 하디 소설 <주드>를 영화화하기도 하고, <웰컴 투 사라예보>, < In this world >, <관타나모로 가는 길> 등 날카로운 주제의식과 뛰어난 연출력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영국의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그가 이탈리아와 영국을 거쳐 세 번째 여행지로 스페인으로 향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바로 <트립 투 스페인>이다. BBC 쇼에서 히트를 친 시리즈로, 실제 인물들이 나라별 테마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셸리와 키이츠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따라가는 식이다.

일주일 정도의 스페인 미식 여행을 가게 된 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 능청스럽고 수다스러운 배우 롭이 박학다식하지만 까칠하기 짝이 없는 스티브와 콤비를 이룬다. 어린애들을 둘 키우며 배우로서의 일과 육아에 치인 남자 롭은 스페인 여행 제안에 흔쾌히 따라 나선다. 기저귀 차고 기어 다니는 어린 아들과 인형을 만지고 노는 딸아이는 아내에게 맡기고 잠시 육아에서 해방된다.

미식 여행  갖은 배우 흉내를 내며 식사를 즐기는 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

▲ 미식 여행 갖은 배우 흉내를 내며 식사를 즐기는 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 ⓒ 찬란


딱 오십 줄을 넘는 스티브 쿠건의 상황은 좀더 복잡하다. 겉으로는 더없이 좋다고 하지만, 내막은 복잡하다.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세를 탔다고 생각하는데, 이름도 모르는 신예 작가에게 밀리는 굴욕을 당한다. 갓 스무 살이 된 아들은 여행 막바지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황당한 상황으로 펑크를 낸다. 우연한 재회로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 전 여자친구는 스티브에게서 갑자기 멀어지고 있다.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안정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떠나보니 모든 게 흔들리고 있었다. 50대의 나이로 접어든다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니 하는 씁쓸한 말들이 유행했었는데, 영국에서도 비슷한 모양이다. 성실하게 일해온 분야에서 후배에게 밀리고 언제 퇴출될 지 모르는 불안. 또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지, 사랑하던 여자마저 등을 돌리지, 아무리 몸 관리를 해보지만 체력은 달리고 헉헉대게 된다. 이 흔들리는 중년에게 스페인 여행은 과연 자유와 위로를 줄 것인가?

여행을 떠난다는 게 그런 것이다. 우리가 속한 일상을 벗어나면, 내가 보이고, 내가 속한 관계들이 보인다.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준다. 비슷한 중년이지만 롭 브라이든은 여행 내내 활기차게 떠들고 즐기지만, 스티브 쿠건은 자기가 떠나온 일상, 일과 가족, 연인에게 끝없이 매어 있다. 물론 롭도 나이 드는 것이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머리는 자꾸 빠지고 힘은 달리는데, 어린 아이들은 언제 다 키우나 싶다.

두 남자가 처한 인생의 딜레마

스페인 미식 여행 영화 내내 웃음을 선사하는 주인공들

▲ 스페인 미식 여행 영화 내내 웃음을 선사하는 주인공들 ⓒ 찬란


두 남자가 처한 인생의 딜레마는 그렇지만, 영화는 재치 있게 시종일관 재미있기만 하다.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광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종종 등장하는 맛집들의 훌륭한 요리들은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에 더해서 두 남자의 만담에 가까운 유머가 내내 우리를 웃게 한다(<돈키호테>를 읽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웃었다!). 

이렇게 지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유머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문학에서 시작해 영화, 대중음악, 미술, 연극까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물론이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의 이야기를 나눈다. 또 데이빗 보위 같은 음악가 흉내를 내면서도 깊은 존경을 드러내고 유명한 영화 장면들을 재현하면서 로버트 드 니로, 안소니 홉긴스 같은 배우들을 흉내 낸다. 음식은 먹다 말고 어찌나 열심히 만담을 펼치는지! 분명한 것은, 모르고 봐도 웃기는 장면이 많긴 하지만, 그들이 떠들어대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 많이 안다면, 알수록 재미가 깊다는 점이다. 데이빗 보위를 전혀 모른다면, 그들이 왜 보위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게 재미있는 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롭 브라이든은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에 갈 수 있는 좋은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영국에 살아야 한다. 한편, 스티브 쿠건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한다. 기다리는 애인은 오질 않고, 사막처럼 더운 길을 달리는데 차의 기름은 떨어진다. 차는 멈추고 남은 물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는다. 차 밖으로 나왔을 때, 멀리서 트럭 한 대가 다가오고 있다. 희미하게 보이던 트럭 위 사람들의 형체가 점점 뚜렷해진다. 스티브는 환호하는 마음으로 차를 보다가 그들이 누구인지 잘 보려고 미간을 찌푸린다.

인생의 중간쯤 넘는 중년의 남자, 홀로 가는 여행길에서도 위기에 봉착하는 이 사람. 멀리서 다가오는 신기루 같은 트럭. 과연 그는 도움을 받을 것인가!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은, 내내 웃으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의 허를 찌른다. 대체 뭘까 싶다. 지독한 농담을 한 방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궁금하다면 직접 스크린으로 만나보시라. 적어도 기분 좋게 실컷 웃을 수 있으니 본전 이상이다.

트립 투 스페인 마이클 윈터바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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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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