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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을 등졌지만 지금도 고향에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살구나무와 앵두나무가 있다. 살구나무는 장독대 옆에, 앵두나무는 우물가 옆에 있다. 그리고 자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늦여름이면 새콤달콤한 자두가 얼마나 많이 열리는지 동네 애들 잔치를 하고도 남았다.

서울 가신 고모가 온다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신사용 자전거 뒤에 살구나무 꽃가지를 꺾어 매달고 아재와 함께 면에 있는 차부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고모가 할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살구나무를 심었고 살구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학교를 파하고 오면 염소 풀 먹일 생각도 안 하고 살구나무 아래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들어서였다.

고모는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살구꽃 피는 봄이면 꼭 한 번씩 다녀가고는 했다. 두 달에 한 번씩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끝에도 살구나무의 안부를 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재에게 따로 편지를 써서 동무들 데려와 살구나무 가지에 매달리지 말고 떨어진 살구나 주워 먹으라며 신신당부를 할 정도로 살구나무를 사랑했다.

3일마다 시집을 바꿔 출근하는데 오늘 가져온 <얼굴>이라는 시집을 펼쳤더니 <감나무>라는 시가 딱, 펼쳐졌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서울 간 고모의 안부가 그리울 때마다 할머니 하시던 말씀이 그대로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저 아래 충청도 부여사람인 이재무 시인이 강원도 산골짝 우리 할머니에게 빙의가 돼 <감나무>라는 시를 지었을 리 만무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내 할머니의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할머니를 뵙는 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구꽃이 필 즈음 할머니는 살구나무 아래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멍하니 살구나무를 바라보며.

"너도 순자의 안부가 궁금한 게로구나. 담 너머 사립 쪽으로 가지를 더 뻗은 걸 보니. 그렇게 애걸복걸 살구나무 노래를 하더니, 살구나무 제 년 키만큼 크니 보따리 싸서 서울 간 년 기다릴 것도 궁금할 것도 없다."

시를 외우려고 메모지에 써서 주머니에 넣었더니, 시 자체가 워낙이 할머니에게 들어왔던 말이라 한 번 읽고 외웠지요. 이 시는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이재무 시인의 '감나무' 시를 외우려고 메모지에 써서 주머니에 넣었더니, 시 자체가 워낙이 할머니에게 들어왔던 말이라 한 번 읽고 외웠지요. 이 시는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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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 시선집 <얼굴> 90쪽


태그:#시, #감나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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