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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민주주의 살롱'이었던 파리의 카페

파리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카페다. 그 효시는 1643년 프로코프라는 시실리아인이 문을 연 커피 가게였다고 한다. 오데옹 역 북쪽의 앙시엔 코메디로(Rue de l'Ancienne Comédie)에는 '프로코프(Le Procope)'라는 이름의 카페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프로코프의 첫 손님은 몰리에르, 라신, 라퐁텐 같은 극작가들이었고, 그 뒤를 이어 루소, 볼테르, 디드로,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 사상가들이 단골이었다. 혁명가들도 커피는 마셨다.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 등이 뒤를 이었고, 젊었을 때는 나폴레옹도 카페를 드나들었다. 그리고 발자크, 위고, 강베타, 베를렌느, 아나톨 프랑스 같은 문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후 카페는 전 파리지엔의 인기를 끌어 프랑스 대혁명 당시엔 '민주주의 살롱'이 되었고, 19세기엔 '문학과 예술의 포럼'이 되었다. 통계를 보면 1880년대에는 파리에 약 4만 5천개의 카페가 운영되었다. 지금은 미국식 커피숍들이 진출하는 등 현대생활의 패턴 변화와 함께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약 7천개 정도 남았다는 것이지만, 우리 같은 외국인 눈에 파리는 여전히 카페 천국이다.

그 가운데 유서 깊은 카페들도 많지만 우리가 가보려는 곳은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의 두 카페다. 하나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옆에 있는 카페 레 되 마고(Café Les Deux Magots)였다. 인근 메트로 역은 '생제르맹데프레'다.

나는 아빠와 함께 카페 드 플로르에 들어갔으나 노천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안에 남아 있는 테이블이 있었지만, 노천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 잡지를 보거나 혹은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파리지앵의 여유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내가 기대하고 있던 파리 낭만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빠를 재촉해 다음 블록에 있는 카페 레 되 마고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 레 되 마고 파리의 대표적인 카페 중 하나인 카페 레 되 마고
▲ 카페 레 되 마고 파리의 대표적인 카페 중 하나인 카페 레 되 마고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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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생제르맹 대로를 마주보는 노천 테이블에 앉으니 지나가는 행인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안경을 낀 50대의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려고 우리 테이블로 연신 고개를 내밀었다. 커피를 좀 안다고 자부해온 나였지만 파리의 커피는 생소한 이름이 많다. 이를 도표로 간략히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커피 종류 파리의 커피는 다양하고 생소한 이름이 많았다.
▲ 커피 종류 파리의 커피는 다양하고 생소한 이름이 많았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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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시고 나는 되마고에서 유명하다는 핫초콜릿(chocolat chaud)을 주문한 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파리는 유로 기준으로 20센트에서 1유로까지의 유료 화장실이 많기 때문에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이나 레스토랑 또는 백화점에 들를 때는 그곳 화장실(toilettes)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화장실 파리는 유로 기준으로 20센트에서 1유로까지의 유료 화장실이 많다.
▲ 화장실 파리는 유로 기준으로 20센트에서 1유로까지의 유료 화장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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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방 기둥의 천장 부근에 설치된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실물대의 이 도자기 인형은 생뚱맞게 청나라 복장을 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페 레 되 마고 '카페 레 되 마고'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있는 카페란 뜻이다.  카페가 되기 전에는 중국 비단을 파는 가게였고, 비단의 원산지인 중국을 상징하기 위해 카페 내부에 중국 도자기 인형을 2개 설치하고 카페 이름을 '되마고'라 붙인 것이다.
▲ 카페 레 되 마고 '카페 레 되 마고'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있는 카페란 뜻이다. 카페가 되기 전에는 중국 비단을 파는 가게였고, 비단의 원산지인 중국을 상징하기 위해 카페 내부에 중국 도자기 인형을 2개 설치하고 카페 이름을 '되마고'라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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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핸드폰을 꺼내 '마고(magot)'란 단어를 쳐보았다. 불어로 중국 도자기 인형이란 뜻이었다. 상호에 보이는 되 마고(Deux Magots)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 그러니까 '카페 레 되 마고'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있는 카페란 뜻이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방안을 둘러보는데 벽 곳곳에 사진액자가 걸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카페 한 구석에 걸린 액자는 헤밍웨이 사진이었다.

헤밍웨이 사진 카페 레 되 마고 안의 오른쪽 좌석 위에 걸린 헤밍웨이의 사진 액자.
▲ 헤밍웨이 사진 카페 레 되 마고 안의 오른쪽 좌석 위에 걸린 헤밍웨이의 사진 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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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 왼쪽 자리에는 피카소와 그의 애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카페 안의 사진액자. 피카소가 자주 앉았던 카페 레되마고 자리 위의 벽에 걸려있는 피카소와 올리비에 사진.
▲ 카페 안의 사진액자. 피카소가 자주 앉았던 카페 레되마고 자리 위의 벽에 걸려있는 피카소와 올리비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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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물어보니 그 자리가 바로 그들이 좋아하던 좌석(Sièges préférés)이었다고 한다. 화장실은 깨끗한 편이었다. 노천 테이블로 돌아온 내가 아빠에게 말했다.   

"안에 헤밍웨이와 피카소가 좋아하던 자리가 있어요. 손님이 앉아 있는 곳은 제대로 구경할 수 없었지만 사진액자가 걸린 곳이 예닐곱 군데는 되어요."
"그래?"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한참 만에 나오셨다.

"좋은 구경했다."
"전엔 못 보셨어요?"
"그땐 이런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근데 방 기둥에 설치한 도자기 인형은 뭐예요?"

아빠는 옆을 지나가던 나이든 웨이터에게 카페의 내력을 물어보셨다. 불어와 영어가 섞인 질문에 난감해진 웨이터는 아예 영어로 대답해주었다.

이 카페가 문을 연 것은 1884년이고, 그 전에는 중국 비단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그래서 비단의 원산지인 중국을 상징하기 위해 카페 내부에 중국 도자기 인형을 2개 설치하고 카페 이름을 '되마고'라 붙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게의 유래에 대한 흥미를 보인 우리에게 웨이터는 팸플릿을 하나 갖다 주었다. 거기에는 카페의 유래와 함께 되마고를 자주 찾았던 10명의 대표적인 문인 이름이 다음과 같이 인쇄되어 있었다.

문인명단 카페 레되마고를 자주 찾았던 10명의 대표적인 문인 이름.
▲ 문인명단 카페 레되마고를 자주 찾았던 10명의 대표적인 문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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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되마고의 별명은 '문학카페'였다. 사실 되마고의 단골손님 가운데는 이들 외에도 우리에게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으로 기억되는 알퐁스 도데,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로 친숙한 생텍쥐페리, <이방인>(L'Étranger)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알베르 카뮈 등 수많은 작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다른 자료들은 전한다.

팸플릿을 갖다준 웨이터는 지나가다 우리 테이블에 다시 들러 물어보았다.

"에뜨 부 자포네(일본인이세요)?"
"농, 누 솜므 코레안(아니, 한국인인데요)."

아빠가 대답하시자 웨이터는 국적을 물어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로는 팸플릿 명단에 있는 많은 문인들 가운데 일본인이 관심을 자주 표명하는 작가가 헤밍웨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헤밍웨이가 즐겨 앉던 테이블이 어디냐고 묻는 일본인이 많다면서 어깨를 으쓱 올리고 손바닥을 뒤집어 보였다.

프랑스에 와서 프랑스 작가가 아닌 미국 작가에 관심을 표명하다니 어이가 없다는 뜻인 듯했다. 사실 그 점은 아빠도 마찬가지셨다.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격인 헤밍웨이의 족적을 찾아 이곳 카페로 발길을 돌리셨던 게 아닌가?  하지만 아빠는 리딩글래스를 끼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셨다.

"아, 여기 있네."

반색을 하시기에 내가 물었다.

"뭐가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말이야."

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주장하던 실존주의 철학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르트르가 말했다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는 재미있는 말은 기억난다. 인생은 출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는 뜻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부부 아니었어요?"

아빠는 커피 잔을 기울이며 빙긋 웃으셨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었던 두 사람에 대해 무언가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는 눈치였다. 이럴 땐 들어 드려야지.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보부아르가 소르본느대학을 졸업한 것은 1928년이다. 여성으로서 소르본느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것은 프랑스 역사상 아홉 번째라고 한다. 그 시절 여성이 높은 교육을 받은 사례는 프랑스에서도 많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 뒤 보부아르는 아그레가시옹(agrégation)을 준비하기 위해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아그레가시옹이 뭐예요?"
"교수자격 시험인데, 이걸 통과하면 고등학교(lycées)뿐 아니라 대학(collèges)에서 교편 잡는 것이 가능해. 1766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이 제도는 당초 문학·문법·과학의 3개 분야였으나 그후 철학·역사지리·수학·물리 등이 추가되었고 최근에는 경제학이나 기술 분야까지 영역이 넓어졌지. 프랑스 공무원 시험 가운데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어려운 시험으로 알려져 있어."

"보부아르가 본 건 무슨 과목이었어요?"
"철학. 당시 합격정원은 20명인데, 시험 준비생으로 고등사범학교 청강생으로 다니는 동안 보부아르는 그곳 학생이면서 훗날의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 훗날의 작가인 폴 니장, 훗날의 철학교수인 르네 마외 등을 만났더군. 1929년, 수재들만 합격한다는 이 시험에서 보부아르는 21세의 어린 나이로 합격했지. 그것도 2등으로."

"1등은 누구였어요?"
"누구였다고 생각해?"

"혹 사르트르?"
"맞아."

사르트르 프랑스 교수 자격시험인 아그레가시옹에 1등으로 합격한 학생시대의 사르트르 사진.
▲ 사르트르 프랑스 교수 자격시험인 아그레가시옹에 1등으로 합격한 학생시대의 사르트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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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신이 나신 눈치였다. 당대의 수재였던 그들의 러브스토리가 시작되는 것 같아 나 역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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