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너른 숲속에 피나물이 꽃밭을 이뤘습니다. '천상의 화원'이 이런 것일까요. 꽃밭 사이로 낙동정맥 오솔길이 지나갑니다.
 너른 숲속에 피나물이 꽃밭을 이뤘습니다. '천상의 화원'이 이런 것일까요. 꽃밭 사이로 낙동정맥 오솔길이 지나갑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주역을 연구하는 그 친구는 2014년 12월, 멀지 않아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라고 흘려들었던 이 예언은 시기는 좀 늦춰졌지만 제대로 맞아떨어져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월세를 살고 있던 저의 사주를 풀어 보며 "너는 집을 사겠다"고 예언하기에 그냥 피식 웃고 말았지만, 그 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탈탈 털고 은행에서 엄청난 돈을 빌려 저렴한 아파트를 구입하게 됐습니다.

이 친구가 지난해 가을 또 다시 큼직한 예언 하나를 던졌습니다.

"내년(2018년) 2월쯤에는 우리가 북한에 뭘 퍼준다느니 해서 문재인 정부가 크게 곤욕을 치른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호전되면서 통일에 버금가는 상황까지 올 것이다. 돈 있으면 남북경협 관련 주식을 사라."

세상의 기운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고 이 친구는 단지 그 흐름을 감지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 친구의 말은 하나하나 맞아 들어갔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린 올해 2월에는 '평양올림픽'이니 해서 보수 세력이 엄청나게 몰아붙였지만,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와 함께 남북관계는 제가 할 수 있는 상상, 그 이상의 속도로 진전되며 현대사의 변곡점을 만들고 있습니다.(요 근래 며칠 남북 간, 북미 간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지만, 이 친구가 또 예측을 했습니다. 5월 말쯤이면 이 또한 풀릴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조바심을 좀 누그러뜨립니다.)

벌깨덩굴.. 꽃이 모두 한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예쁩니다. 꿀이 많아 벌이 좋아하는 꽃이랍니다.
 벌깨덩굴.. 꽃이 모두 한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예쁩니다. 꿀이 많아 벌이 좋아하는 꽃이랍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석개재 고갯마루에서 태백시 통리역을 향해 산행을 시작합니다. 오늘 산행할 거리는 거의 20㎞입니다. 지난 구간 산행 때 15㎞ 넘는 거리는 이젠 무리다, 15㎞ 넘는 산행은 하지 말자, 이렇게 다짐했지만 오늘 코스도 중간에 끊을 만한 적당한 지점이 없어 좀 힘든 산행을 이어 갑니다.

힘든 산행을 풀어갈 단 한 가지 방법은 천천히 가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럴 것 같습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 나가면 결코 이루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듭니다.

산행의 고단함, 꽃구경으로 달래며

오늘 산행의 고단함을 잊게 해 주는 커다란 즐거움이 있으니 그것은 꽃구경입니다. 인근 백두대간의 금대봉, 대덕산이 '야생화 천국'이니 '천상의 화원'이니 하는 이름이 붙을 만큼 봄이면 많은 꽃이 피어나지만,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오늘의 석개재~면산~통리역 구간도 울긋불긋 피어난 갖가지 야생화로 꽃밭을 이뤘습니다.

현호색은 종류가 다양한데 요건 왜현호색입니다. 하늘색 빛깔이 참 곱습니다.
 현호색은 종류가 다양한데 요건 왜현호색입니다. 하늘색 빛깔이 참 곱습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꽃밭'이라는 낱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너른 밭을 이루며 피어난 꽃은 피나물입니다.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쫙 뿌려 놓은 듯한 은하수처럼 어두운 숲속에는 노랗게 반짝이는 피나물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한 가지 꽃이 이렇게 널따랗게 펼쳐진 광경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호사를 누린다고 하는데 호사도 이런 호사가 있을까 싶습니다. 눈이 아득해지고 가슴은 콩닥거립니다. 반쯤 벌어진 입 사이로 "허~~" 하고 감탄사가 툭 튀어나옵니다. 이게 바로 천상의 화원, 하늘나라 꽃밭입니다. 힘들게 산에 올랐다고 하지만 되돌려받는 혜택이 너무 큽니다.

피나물은 꽃이나 잎 모양이 양지꽃과 비슷하지만 스케일이 다릅니다. 양지꽃이 아기 손톱만 하다고 하면 피나물은 꽃 크기가 아기 손바닥만 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큰 꽃이 숲속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피어나니 이런 장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줄기를 자르면 끈적끈적한 황적색 즙이 나와서 피나물이라는 조금은 섬뜩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리 들꽃은 대개 순우리말 이름을 지니는데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척척 이름을 붙여 버립니다.

피나물입니다. 줄기를 자르면 피 같은 액체가 나와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피나물입니다. 줄기를 자르면 피 같은 액체가 나와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피'로 시작하지만 '나물' 또한 붙어 있으니 먹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독성이 있으니 봄에 돋아나는 어린 순만 먹고, 그것도 잘 우려내어 독성을 없앤 뒤 먹어야 한답니다. 어지간하면 먹지 않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눈이 호사를 누린 다음에는 발이 또한 호사를 누립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지그시 잡고 "꽃길만 걷게 해 줄게"하며 작업에 들어갈 때의 그 꽃길을 저의 두 발이 걸어갑니다. 꽃밭 사이로 가느다란 길이 나 있고, 꽃 한 송이라도 밟을세라 저는 조심스레 발을 떼어 놓습니다.

바람꽃... 종류도 참 많다

회리바람꽃도 보입니다. '바람꽃'은 종류가 참 많은데, 꽃이나 잎 모양이 다 제각각입니다. 회리바람꽃은 연두색 꽃송이가 작고 수수하게 생겨 소박한 모습입니다. 꽃 피는 모습이 회오리치는 것 같아 '회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어디가 회오리치는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회리바람꽃.. 작고 수수하지만 정감이 가는 꽃입니다.
 회리바람꽃.. 작고 수수하지만 정감이 가는 꽃입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홀아비바람꽃.. 이름에는 구질구질한 '홀아비'가 붙어 있지만 꽃 자체는 산뜻하고 청아하기만 합니다.
 홀아비바람꽃.. 이름에는 구질구질한 '홀아비'가 붙어 있지만 꽃 자체는 산뜻하고 청아하기만 합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홀아비바람꽃도 만나고 꿩의바람꽃도 만납니다. 홀아비바람꽃은 홀아비라는 낱말이 주는 구질구질한 느낌이 아니라 산뜻하고 깨끗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다만 뿌리에서 꽃대가 딱 하나 올라온다고 해서 '홀아비꽃대'라는 예쁜 꽃처럼 홀아비라는 접두어가 붙었을 뿐입니다. 꿩의 바람꽃은 화사하게 피어난 꽃이 꿩의 어떤 모습을 닮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겠지만, 꿩을 자세히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닮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벌깨덩굴, 둥굴레, 홀아비꽃대, 구슬붕이, 얼레지, 노랑무늬붓꽃, 쥐오줌풀, 왜현호색… 꽃향기에 취한 채 꽃길을 걸어갑니다. 눈은 어질어질, 코는 벌름벌름, 다리는 비틀비틀…….

그러다가 까만 딱정벌레 한 마리를 만납니다. 이놈이 뭘 물고 갑니다. 그 자리에 앉아 들여다 보니 콩알만한 산짐승 똥 한 개를 물고 뒷걸음질 치며 갑니다. 고라니 똥이나 뭐 그런 것 같습니다. 소똥을 굴리며 가는 게 아니니 소똥구리는 아닐 것 같은데 인상착의는 소똥구리와 비슷합니다. 혹시 소똥이 없어진 마을을 떠나(사료 먹인 소의 똥은 소똥구리가 먹을 수 없다 하니) 산으로 이주한 변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잡념처럼 해 봅니다.

산짐승 똥을 하나 물고 가는 딱정벌레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을 소똥구리의 친척인 애기뿔소똥구리입니다.
 산짐승 똥을 하나 물고 가는 딱정벌레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을 소똥구리의 친척인 애기뿔소똥구리입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똥 한 개를 물고 열심히 옮기던 이놈은 침입자가 가까이 있음을 느꼈는지 똥을 물고는 나무토막 아래로 숨어 버립니다(산행 뒤 포탈에서 검색을 해 보니 이놈은 소똥구리의 친척으로 산속에서 고라니나 산양 같은 짐승의 똥을 먹고 사는 애기뿔소똥구리인 듯합니다).

소똥구리의 친척도 만나고

몸을 일으켜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갑니다. 인기척을 느낀 고라니가 도망가는 소리가 숲속을 흔듭니다. 남한에서는 오지 중의 오지에 속하는 이곳에는 표범이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생동물 지킴이가 10년 전 이곳에서 표범을 목격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표범… 무섭기는 하겠지만 표범도 사람이 무서울 것이라고 위안을 삼아 봅니다. 더욱이 오늘은 산행 팀도 만나고, 나물 캐러 온 일행도 만나고 했으니 표범이 알아서 멀리 피했을 것입니다.

삼척 쪽에서 보면 '멀리 있는 산'이어서 '먼 산'이었다가 아무 맥락도 없이 '면산'으로 바뀐 산봉우리에 오릅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 지명을 한자로 바꿔 버리면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먼'이라는 한자는 없으니까요.

저 멀리 면산이 보입니다. 삼척 쪽에서 보면 '멀리 있는 산'이어서 그냥 '먼산'으로 부르다가 '면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저 멀리 면산이 보입니다. 삼척 쪽에서 보면 '멀리 있는 산'이어서 그냥 '먼산'으로 부르다가 '면산'으로 바뀌었습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숲 건너 보이는 산이 구랄산입니다. '불알산'이 변해서 '구랄산'이 됐다는 게 저의 발랄한 상상입니다.
 숲 건너 보이는 산이 구랄산입니다. '불알산'이 변해서 '구랄산'이 됐다는 게 저의 발랄한 상상입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면산을 지나 구랄산에 오릅니다. 봉우리 안내판에는 심마니들이 쉬어 가던 굴이 많아서 '굴알산'이었다가 발음하기 쉽게 '구랄산'으로 바뀌었다 하는데 '구라'가 아닌지 의심해 봅니다.

그리고 좀 색다른 추측을 해 봅니다. 면산에서 구랄산을 바라보면 구랄산은 불알 두 쪽이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봉우리 두 개가 꼭 남자 거기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알산'이라고 직설적으로 부르다가(우리 선인들은 직설법을 좋아했습니다) 후세에 오면서 이름이 좀 그렇네 어쩌구 하면서 비슷한 듯 다른 구랄산으로 바꿔 버린 게 아닐까 하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도 해 봅니다.

고비덕재.. 고비(고사리)가 많았답니다. 험준한 다른 고개와는 달리 이 고개는 사람이 좀 넘어다닌 고개 같습니다.
 고비덕재.. 고비(고사리)가 많았답니다. 험준한 다른 고개와는 달리 이 고개는 사람이 좀 넘어다닌 고개 같습니다.
ⓒ 배석근

관련사진보기



토산령, 한개고개, 고비덕재… 고개도 여럿 지나갑니다. 모든 고갯길이 서쪽 태백시 쪽으로는 완만하지만 동쪽 삼척시 쪽으로는 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금, 생선 따위를 지고 이고 삼척 쪽에서 올라오며 땀깨나 눈물깨나 흘렸을 선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땅속으로 터널이 뚫려 이제는 영동선 기차가 다니지 않는 통리역 옛 역사 앞을 지나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 낙동정맥 26구간 종주
- 날짜 / 2018년 5월 5일 (토)
- 위치 / 경상북도 봉화군, 강원도 삼척시, 태백시
- 날씨 / 오전에 맑다가 오후에 흐렸고, 몹시 거센 바람이 거친 소리를 내며 종일 산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 산행 거리 / 20㎞
- 소요 시간 / 9시간 10분
- 산행 코스(북진) / 석개재 → 1010봉 → 면산 → 구랄산 → 토산령 → 한개고개 → 육백지맥 분기점 → 백병산 갈림길 → 고비덕재 → 면안등재 → 옛 통리역
- 동행 / 이번에도 산행 거리가 길어 아내 없이 혼자 산행해야 했습니다.

며칠 전 한 모임에 나가 저녁을 먹었습니다. 모두 여섯이 모였는데 그중 좌장격인 선배 한 분이 신나서 목청을 높였습니다. 식사 시간 내내…… 다른 후배들은 말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습니다.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새로이 마음을 먹었습니다.

결심 26 / 말을 많이 듣자. 아내와 아이들, 부모님, 친구들, 선후배, 회사 직원들…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자. 나는 말을 좀 줄이자.


태그:#낙동정맥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