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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지구 밑에서 살아 있다
- 잉게보르크 바흐만

불은 지구 밑에서 살아 있다
그리고 그 불은 투명하다.

불은 지구 밑에서 살아 있다
그리고 흐르는 용암도.

전류는 지구 밑에서 살아 있다
이는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다.

전류는 지구 밑에서 살아 있다
이는 우리의 뼈를 태운다.

큰 불이 다가온다,
전류가 지구 위를 넘어 다가온다.

우리가 바로 목격자가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 1926-1973)의 시 "불은 지구 밑에서 살아 있다(Es ist Feuer unter der Erde)"를 읽어 보자. 그의 시가 대개 언어를 통해 관념과 그 관념들의 관계를 마치 선문답처럼 혹은 수수께끼처럼 어지럽게 풀어내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시는 그나마 직관적으로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꼭 학창시절 지구과학시간에 돌림노래처럼 외워서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 시는 지구 밑에서 뜨겁게 움직이고 살아있는 불과 전류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우리 인류가 미처 관찰하지 못하고 움직임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해도 자연은 여전히 나름의 순리대로 살아 움직인다. 자연의 어떤 부분은 우리가 그 존재 여부 자체조차 알지 못할 지라도 자연의 일부인 우리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인 '우리가 바로 목격자가 될 것이다'라는 부분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전의 모든 문장의 주어가 문법적인 주어역할만을 하는 가주어(Es)였다면, 이 문장의 주어로 마침내 우리(Wir)가 등장한다. 이로써 우리가 바로 자연 원리의 진위여부를 판가름하는 주체이며, 뜨겁고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의 변화에서 방관자가 아닌 책임있는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이렇게 물리적 자연을 우리의 지식 체계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혹은 담아내려 해야만 하는가의 여부는 철학사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오스트리아 비엔나 학파의 창시자이자 논리실증주의의 대부라 불리는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 1882-1936)은 명제가 자연 현상을 포함한 경험적 실재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슐릭은 그의 논문 "사실과 명제(Facts and Propositions)"에서 명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명제란, 문장이 논리적 규칙과 결합된 것으로, 이러한 논리적 규칙들은 문장의 내용을 지시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의미를 담아낸다. 그래서 명제를 증명하려면, 이 명제가 의미하는 것을 실제로 지시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대성당에는 두 개의 첨탑이 있다"는 명제에서, 실제로 화자가 지칭하는 이 대성당의 첨탑을 직접 보고 정말 두 개라고 확인하면 간단히 이 명제의 진위여부가 판가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슐릭은 자신은 오로지 경험주의적 물체만을 명제의 대상으로 파악하며 숫자와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들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으로서 자연과학은 명제들끼리 일관적으로 만들어진 명제들의 체계이며, 과학은 그 자체로 세계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자연에 대해 서술한 명제들과 자연은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이 말하는 바를 의심없이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나는 내가 직접 관찰한 자연 세계로부터 얻은 나의 명제만을 참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바흐만의 시에서처럼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관찰한 자연 세계라면, 이를 담아낸 문장은 그 자체로 변화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문헌
Bachmann, I., 1978, "Es ist Feuer unter der Erde", 본문 인용된 시는 필자 번역, Ingeborg Bachmann Werke Band1, Piper Verlag.
Schlick, M., 1935, "Facts and Propositions", Analysis 2(5): 65-70.



태그:#목격자, #과학철학, #지구과학, #잉게보르크 바흐만, #모리츠 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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