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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기 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이로써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시작해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달아올랐던 운동의 열기는 된서리를 맞았다. 국민 대다수가 원했던 민주화와 민주정부 수립은 좌절됐다. 

마지막 불씨, 구로구청 투쟁과 명동성당 농성

 1987년 구로구청 투쟁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1987년 구로구청 투쟁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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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했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 농성도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와 구속자를 내고 종결됐다. 진압 과정에서 서울대 학생 양원태가 구청 옥상에서 추락해 척추 골절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민청련에서는 김병곤이 주범으로 구속됐다.

한편 선거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17일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한결같이 "부정선거 무효!"를 외쳤다.

국본 공정선거감시단은 전국의 개표소에 파견된 감시단으로부터 부정투개표 사례를 집계해 발표했고, 이는 곧바로 유인물로 만들어져 시위대가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선거운동 때보다는 못했지만 전국 대도시에서의 시위 열기는 상당히 뜨거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러 단체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시위를 기획했다. 민청련도 거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12월 18일 낮 12시 시청 앞 광장에서 "부정선거 규탄 및 군부독재 퇴진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일 시청 앞은 엄청난 수의 전투경찰과 백골단에 의해 점령당했고, 오가는 시민들의 동정은 모호했다. 선거 결과에 대해 잔뜩 불만인 듯한 표정도 있었고, 체념한 듯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민청련 회원들은 누군가 나서주길 기대하며 시청 주위를 배회했다.

마침내 오후 2시경,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청 앞 지하도 입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열은 2,300명 정도로 6월항쟁 때 비하면 아주 적은 규모였다. 경찰의 최루탄 발사와 백골단의 습격으로 시위대는 금방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흩어진 시위대는 청계천과 명동 한국은행 앞으로 이동하면서 도로를 점거해 반짝 시위를 하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계속 시위를 이어나갔다. 어느덧 시위대에 동참하는 시민들도 늘어갔다.

시위대 사이에서는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저녁에 명동성당으로 집결하자!"는 구호가 번져나갔다. 6월항쟁 때 명동성당 농성이 전국적 시위를 이끌어나가는 구심점이 됐듯이 이번에도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투쟁을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과연 해가 질 무렵인 저녁 7시, 명동성당 앞에는 3천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그들은 즉석에서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고 '선거무효 국민총궐기 명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도부는 중앙대 총학생회 간부들을 비롯한 대학생들과 각 시민단체 대표들이 맡았다. 민청련에서는 동민청 위원장 김성환이 민청련을 대표해 참여했다.  

 1987년 12월 1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부정선거 무효화 및 군부독재퇴진 결의대회’
 1987년 12월 1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부정선거 무효화 및 군부독재퇴진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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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단식과 민통련 의장단 사퇴

한편 대선 패배의 충격과 상처가 누구보다도 컸던 측은 재야 민주운동 진영이었다. 재야를 대표하는 문익환 목사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2월 23일, 그는 민통련 의장으로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자체가 문익환에게는 하나의  속죄의식이기도 했다.

문 목사는 단식을 시작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노태우의 부정선거를 외치며 항의의 뜻을 담았다. 또 야권이 단결하지 못해 패배한 것에 대한 통절한 자기비판을 토로했다. 처절했다.

"우리는 후보단일화를 관철하지 못했습니다. 민통련 의장으로서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미문의 부정선거가 노태우씨에게 안겨준 승리가 영광이 아니라 치욕이지만 그것으로 저의 죄책감이 조금도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군정의 연장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앞으로 더 바쳐져야 할 것이냐는 것을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장에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몸이지만 '죽는 게 아닙니다. 살아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외쳐오던 터라 그럴 수도 없어 저는 오늘부로 무기한 단식하며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으로 속죄되는 것이 아님을 저는 잘 압니다. 오로지 몸과 마음을 묶어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속죄의 단식으로 패배 의식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통련은 새해 1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의장단과 중앙집행위원이 선거투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1987년 12월,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면서 성명서 발표하는 문익환 민통련 의장
 1987년 12월,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면서 성명서 발표하는 문익환 민통련 의장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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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반성과 의장단 사퇴

명동성당투쟁은 참여한 자발적 시민들의 열의에 의해 계속 이어져 나갔다. 규찰대를 세워 입구를 지키며 농성을 이어나갔다. 민청련 대표 김성환은 규찰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프락치로 오인해 과격하게 대하는 것을 말리기도 했다. 그만큼 시민 대중과는 일정한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농성 중 1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자신들이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라는 단체라며 집회를 갖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외친 구호 중엔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시민 대중으로부터의 성원과 지지는 오지 않았다. 결국 시위대 지도부는 해산할 것을 의논했고, 김성환도 거기에 동의했다. 12월 24일 시위대는 마지막 촛불집회를 갖고 쓸쓸하게 해산했다. 

새해가 밝자 민청련 의장단은 침통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열었다.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으로 김병곤 부의장은 감옥으로 갔고, 김희택 의장을 비롯해 남은 4명의 민청련 의장단은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사퇴의 변을 민청련 기관지 <민중신문>을 통해 공표하기로 했다. 초안 작성은 권형택 부의장이 맡았다. 작성된 초안을 장준영 부의장이 보완한 뒤 의장단 회의에서 확정했다. 이 글은 "떨쳐 일어나 투쟁의 전선으로 –민청련 의장단 사퇴에 붙여"라는 제목으로 2월 4일자 민중신문에 실렸다.

"이번 대통령선거투쟁이 이렇게 저들의 승리와 민족민주운동의 실패로 귀결된 데에는 바로 운동 내부의 격심한 분열과 혼란이 한 원인이었음을 뼈아프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민청련은 대통령선거라는 특수한 시기에 있어서의 투쟁방침으로 전두환.노태우정권 타도투쟁을 중심축으로 하여 반군사독재 민주연합전선을 강화하는 한편, … 후보문제에 관해서는 통일정책, 광주항쟁해결문제, 민중생존권 문제 등에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한 김대중 씨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통해 분열된 민주세력을 단결시키려 내고자 했던 노력이 운동의 단합된 집중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의 한 요인으로 결과 지워진 점에 대해서 그 책임의 일단을 엄중히 통감합니다."

 1987년 12월, 침통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민청련 송년회. 장소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 한 음식점이며 김희택 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1987년 12월, 침통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민청련 송년회. 장소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 한 음식점이며 김희택 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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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위해

의장단이 사퇴함으로서 시급하게 새 총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선출해야 했다. 민청련은 이미 앞선 총회에서 '청대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표방하며 지역지부를 건설하고 있었다. 새 지도부는 그곳 지역지부에서의 활동을 통해 지도력을 검증 받은, 한층 젊어진 새 세대에게 맡겨질 것이었다.

한편 대선 막바지에 이르면서 선거 패를 감지한 소수의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에 대한 '비지'의 '업보'가 없는 새 연합체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의 위한 논의'라고 불렀다.

초기의 참석자는 민통련의 김병곤, 민청련의 장준영, 노동운동 쪽의 황인범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 및 경수지역노동자연합 대표, 농민 쪽의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대표 등이었다. 김병곤이 구속되자 역시 민청련에서 민통련에 파견되었던 이명식과 김두일이 참여해 논의를 이끌어나갔다.

대선은 패배했지만, 운동 진영은 세대교체를 통한 새 출발을 모색했다. 민청련 의장단의 성명의 마지막 구절 "커다란 이 아픔을 딛고 머지않아 새롭게 정비된 모습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는 이런 바람을 표현한 것이었다.     

  1987년 12월,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체를 논의하기 위해, 구속된 김병곤 대신 민통련·민청련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이명식(왼쪽)과 김두일(오른쪽).
 1987년 12월,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체를 논의하기 위해, 구속된 김병곤 대신 민통련·민청련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이명식(왼쪽)과 김두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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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