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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은 한 번에 조성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잡은 후, 회재 이언적이 본격적으로 옥산별업을 경영했고, 그의 아들 잠계 이전인과 손자 구암 이준에 걸쳐 주요 배치가 완성됐다. 그 후에도 독락당을 유지하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18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기자 말

독락당은 아버지 이번, 이언적, 아들 이전인, 손자 이준 등 4대에 걸쳐 완성했다.
▲ 독락당과 계정 독락당은 아버지 이번, 이언적, 아들 이전인, 손자 이준 등 4대에 걸쳐 완성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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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에 걸쳐 완성한 옥산별업

1553년, 독락당의 제1대 조영자인 회재 이언적이 죽었다. 이후 옥산별업은 아들 잠계 이전인(1516~1568)에게 전수되어 18대에 이르기까지 터전이 된다. 이전인은 이듬해에 어서각과 사당을 세웠고 안채를 중수했다. 그리하여 독락당은 3개의 뚜렷한 공간을 형성했다. 이때가 '제2대 조영 시기'이다.

이전인은 1516년 7월 4일 회재 이언적과 양주석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전인은 이언적의 서자였다. 어머니 석씨부인은 감포만호였던 외할아버지 석귀동의 천첩 소생으로 천인이었다. 외할아버지인 석귀동은 딸 석씨부인과 외손자 이전인을 천인에서 양인으로 신분을 바꾸는 이른바 '속신(贖身)'을 하게 된다. 그때가 중종 12년인 1517년으로 석씨부인은 22살이었고, 이전인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이때 장례원에서는 속신을 하며 '양주석씨속량입안'이라는 문서를 발급했다.

회재 이언적은 석씨부인을 각별히 생각했다. 그가 낙향했을 때 본가인 양동마을에 가지 않고 이곳 독락당으로 온 것도 석씨부인을 아꼈기 때문이다. 회재가 얼마나 석씨부인을 존중하면서 한편으로 친근한 정을 느꼈는지는 1546년(명종1) 9월에 작성된 <분재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언적은 시어머니 봉양에 힘쓴 소실 석씨부인에게 노비 4명과 밭 3섬지기, 논 1섬지기의 재산을 분배했다. 그러면서 글의 첫머리에 석씨부인을 '석군(石君)'이라 칭하고 본문에 '너(汝)'라고 표현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표현이었다.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이 20세에 심은 향나무로 전해진다.
▲ 이전인이 심은 향나무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이 20세에 심은 향나무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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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전인도 아버지에게 각별했다. 이전인은 아버지 이언적이 유배를 가자 유배지에서 6년 동안 극진하게 시중을 들었다. 끝내 아버지가 죽자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3개월에 걸쳐 평안도 강계에서 경주까지 걸어서 시신을 모셔온 효자였다. 그는 또한 아버지 회재의 유업을 잇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그를 기리기 위한 현양 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도 없다(無潛溪無晦齋)"고 말할 정도였다.

손자인 구암 이준(1540~1623)은 1572년에 독락당의 안채를 'ㅁ'자 형으로 다시 짓고 1623년 이전 즈음에 행랑채를 'ㅡ'자 형으로 지어 안채와 행랑채가 지금처럼 '므'자 형으로 형태를 갖추게 됐다. 게다가 행랑채 밖에 공수간을 짓고 서쪽에는 지금은 없어진 고직사를 지었다. 이때 외삼문 솟을대문과 지금은 없어진 마구간 등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가 '제3대 조영 시기'로 독락당 일곽이 최대 규모로 형성된 시기이다. 또한 그는 옥산서원을 건립하여 할아버지인 이언적을 배향했다.

손자 이준에 이르러 독락당 일곽은 최대 규모로 형성됐다.
▲ 독락당 손자 이준에 이르러 독락당 일곽은 최대 규모로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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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유지를 위한 후손들의 노력과 계승

손자 이준은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1583년(선조16) 안변부에 벼 80석을 헌납하여 그 자신과 자손들이 벼슬을 할 수 있는 이른바 '허통사로(許通仕路)'를 열었다. 이후 그는 60세인 1599년(선조32)에 무과에 당당히 급제하여 1608년에는 통정대부가 됐고 1610년에는 청도군수를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광해군 8년(1616) 11월에 이준은 향원이 될 수 있도록 향청에 청원을 했다.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준은 남이 추천하는 당시의 통례를 깨고 스스로를 추천하는 단자를 제출했다. 물론 향청에서는 향청을 가볍게 여기는 처사라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다.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 독락당 산수유나무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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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여주이씨세보>에 실린 옥산마을 지도. 옥산서원과 독락당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 옥산마을 지도 1956년 <여주이씨세보>에 실린 옥산마을 지도. 옥산서원과 독락당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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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아들 이굉과 이용은 당대의 대학자 한강 정구의 문인이 됐고, 이굉의 아들 이홍후는 가선대부, 손자 이익규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러다가 이준의 증손 이수담이 1689년(숙종 15)에 생원시에 합격하게 되자 그동안의 무과 위주의 가풍이 문과로 변화되는 전기가 됐다. 이후에도 이수담의 손자 이희성은 서얼허통을 지속적으로 전개했고, 1873년(고종10)에 마침내 이기원이 진사시에 합격함으로써 집안의 문반 기반은 더욱 튼실해졌다.

이후에도 독락당을 유지하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조선 시대에는 어떤 청원이 있을 때 관아에 내던 소지(所志)가 있었는데 독락당의 후손들은 이것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만 봐도 다음과 같다. 영조 4년(1728), 이언적의 후손 이학년은 계정과 독락당을 개수하기 위해 경주부윤에게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요청했다. 이학년은 계정과 독락당을 대대로 관리해 왔지만 이미 수백 년이 되어 기와가 상하고 목재가 썩고 기울어져 건물이 무너지는 데에 이르러 문중에서 공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재난과 흉년으로 물자와 인력 조달이 어려워져서 경주부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이에 경주부윤은 안강창에 보관 중이던 벼 두 섬을 내려주고 공사에 필요한 양식에 보태게 했으나 농사철임을 감안해 인력 지원은 어렵다고 밝혔다. 그 청원 내용이 '개수물력지원요청소지(改修物力支援要請所志)'에 잘 나타나 있다. 

계곡에서 보면 계정 마루 아래 벽에 아궁이와 굴뚝이 보인다. 허공에 매달린 아궁이와 굴뚝은 아주 독특한 발상이다.
▲ 계정의 아궁이 계곡에서 보면 계정 마루 아래 벽에 아궁이와 굴뚝이 보인다. 허공에 매달린 아궁이와 굴뚝은 아주 독특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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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3년인 1789년에 경주부에서 독락당 계정의 수호를 위해 땔나무와 숯 등을 나누어 주도록 한 완문
▲ 계정수호완문 정조 13년인 1789년에 경주부에서 독락당 계정의 수호를 위해 땔나무와 숯 등을 나누어 주도록 한 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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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 영조 25년(1749)에 후손 이희성이 계당의 바위에 있는 회재가 직접 심은 대나무(叢竹)밭을 측량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소지, ▲ 영조 29년(1753)에 독락당과 계정의 관리를 위해 인근에 거주하는 노비 중에서 잡역을 면제받는 대신 별도로 배정된 수호군(守護軍)에 대한 관의 침해가 없도록 요청하는 소지, ▲ 영조 44년(1768)에 독락당에 소속된 노비 세운과 순철이 세금을 거두는 대상에 포함되자 전례를 들어 면역을 요청한 소지, ▲ 정조 13년(1789)에 경주부에서 계정의 수호를 위해 땔나무와 숯 등을 나누어 주도록 발급한 증명서인 계정수호완문(溪亭守護完文), ▲ 고종 8년(1871년)에 계정 소속으로 역을 면제받고 있던 죽장면의 종이 만드는 곳인 저점전(楮田店)에 죽장면 면임이 세금과 이자를 부과하자 부당함을 호소하여 돈을 돌려받고 폐단을 일으킨 사람을 잡아들인 소지 등이 있다.

이를 보면 독락당 일대는 계속해서 여주이씨 가(家)에서 관리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독락당은 경주부의 관리와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명현이나 공신 등의 분묘나 유업을 관리하기 위해 관으로부터 일정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 특권이 침해당할 때 적극적으로 관에 그 부당성을 소장으로 알려 관의 판결이나 지령인 제사(題辭)나 증명서인 완문(完文) 등을 발급받았다. 선대의 유업을 수호하는 일 못지않게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했던 것이다.

1760년경 비변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도> 중 경주 지도 세부. 위쪽에 옥산서원과 계정, 자옥산, 화개산 등의 표기가 보인다.
▲ 경주 지도 세부 1760년경 비변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도> 중 경주 지도 세부. 위쪽에 옥산서원과 계정, 자옥산, 화개산 등의 표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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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의 후손들도 적극적으로 특권을 유지하고 활용함으로써 선대의 유업을 지켜갈 수 있었다. 이는 회재를 배향한 옥산서원을 세우고 지키기 위한 그들의 줄기찬 노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옥산서원에 소속된 장인들만 226명이었다. 18세기 말에는 노비들이 200명에 이르렀고, 서원 유사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도망간 노비를 추쇄하는 일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지금에서 보면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화의문 작성

이러한 특권의 유지와 활용뿐만 아니라 옥산별업을 지키기 위한 자체의 노력도 계속됐다. 이전인의 두 아들 구암 이준과 치암 이순 형제는 옥산별업을 지키기 위한 규칙을 마련하고 재정도 확보했다. 아울러 그들은 재산을 상속할 때 계정과 독락당을 분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1601년 이준 형제는 화의문(和議門)을 작성하여 계정과 독락당에 대한 애착과 향념을 표현했다.

"이 글은 화의하기 위함이다. 계정과 독락당은 선조고 문원공 회재 선생의 별서이다. 유택이 완연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형제가 삼가 당우(堂宇)를 지키고 근근이 유지하고 있으나 혹 불초한 후손들이 수호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남들 보기에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형제와 더불어 상의하여 약간의 노비와 토지를 내어 뒷날 계당을 수호할 자산으로 충당하니 종자와 종손은 이 토지와 노비를 잘 지켜 오늘 합의문을 작성하는 이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 뒷날 자손 가운데 이 노비와 토지를 가지고 다투는 경우가 있거든 불효로서 논단할 일이다." - <고문서집성> 65, -경주 옥산 여주이씨 독랑당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3, 671쪽 화의문(1)


화의를 통해 이들이 마련한 재산은 노비 2명과 논 19두락, 밭 15부 2속이었다. 이 화의문을 통해 남녀 균분 상속이 일반적이던 17세기 초에 계당과 독락당은 종손에게만 상속되어 철저히 관리됐다.

독락당의 후손들은 적극적으로 특권을 유지하고 활용함으로써 선대의 유업을 지켜갈 수 있었다.
▲ 독락당 독락당의 후손들은 적극적으로 특권을 유지하고 활용함으로써 선대의 유업을 지켜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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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은 특권의 유지와 활용뿐만 아니라 옥산별업을 지키기 위한 화의문 작성 등 자체의 노력도 계속됐다.
▲ 독락당 후손들은 특권의 유지와 활용뿐만 아니라 옥산별업을 지키기 위한 화의문 작성 등 자체의 노력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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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헌종 7년(1841)에 독락당의 계정 중수를 위해 업무를 나누고 사람을 배정한 <계정중수집사기溪亭重修執事記>를 보면 독락당과 계정을 지키고 관리하는 데에 얼마나 열성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체 총괄자인 도도감 2명, 실무 총괄에 별도감과 유사를 두었다. 유사는 각종 경비를 운영하는 전곡유사, 인력의 수급과 조정을 담담한 차용유사, 벌목을 담당하는 벌목유사, 기와를 담당하는 운와유사, 목재 운반을 담당하는 운목유사, 흙을 담당하는 운토유사 등으로 자재의 마련과 운반을 전담하는 유사를 두었다.

당시 계정 중수에 참여한 인사는 모두 이전인의 후손으로 29명이었으니 인부까지 합치면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락당과 계정은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를 했으며 주로 문중 사람들이 재정과 실무를 관장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독락당은 이언적(1491~1553)에서 시작하여 서자인 이전인(1516~1568), 손자 이준(1540~1623), 이굉(1567~1653), 이홍후(1591~1675), 이익규(1625~1716), 이수담(1665~1704), 이의식(1692~1732), 이희성(1720~1805), 이립(1740~1805), 이진연(1778~1820), 이태수(1799~1857), 이기원(1830~1879), 이병유(1861~1922), 이윤덕(1886~1912), 이지락(1910~1963), 이원목(1928~1974), 이해철(1949~) 등 18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언적은 이 살창을 통해 물을 바라보고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고 자신을 수양했을 것이다.
▲ 독락당의 살창 이언적은 이 살창을 통해 물을 바라보고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고 자신을 수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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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의 독락당 이후 행적

독락당에서 은거했던 이언적이 세상으로 다시 나아간 것은 47세(1537) 때였다.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중종이 그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는 다시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응교, 직제학을 맡았다. 이후 49세에 전주부윤, 50세에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51세에 수차례에 걸쳐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는 주로 노모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했는데, 53세(1543)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이때 무첨당과 동생을 위한 향단을 지었다. 55세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우찬성에 제수하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56세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여 좌찬성에 제수됐다.

그러나 57세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제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평안도 강계로 유배됐다. 유배 중인 59세에 <대학장구보유>, 60세에 <봉선잡의>, <구인록>을 짓고 63세에 <중용구경연의>를 완성하지 못한 채 6년의 유배 생활 끝에 11월에 63세(1553)로 생을 마감했다. 유배 기간 동안 노모와 아우 이언괄의 부음을 받았다.

12월에 아들 이전인이 시신을 수습하고 반장(返葬)하여 이듬해인 1554년 2월에 경주에 도착했다. 선조 6년인 1573년에 옥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사액됐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문묘에 종사됐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 오현 중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져 문묘에 배향됐다.




태그:#독락당, #계정, #옥산마을, #한국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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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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