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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돈 묘소
 서상돈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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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1905년 을사늑약 등으로 한반도에서의 정치적·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한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차관을 강요한다.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차관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모두 한국 정부에 부담시켰고, 차관은 그 수단이었다.

강제로 빚을 우리나라에 떠안긴 일본

1907년 2월 21일 대구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7.1.∼19 20.7.24.)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1850.10.17~1913.6.30) 등이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본격화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은 1300만 원이었다.

 김광제(왼쪽)와 서상돈
 김광제(왼쪽)와 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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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1910년에는 일본에 갚아야 할 국가 부채가 4400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1907년의 1300만 원은 당시 우리나라의 1년 예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국가의 1년 예산과 견줘보는 것은 1300만 원과 4400만 원이 어느 정도 규모의 부채인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시작된 나라빚 갚기 운동

금연을 해서 모은 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호응이 뜨거웠다. 일제는 언론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간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모금한 돈을 횡령했다고 누명을 씌워 1908년 7월 21일 구속했다. 양기탁은 9월 29일 무죄로 석방되지만 그 사이 국채보상운동은 활기를 잃고 시들어버렸다.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서상돈의 묘소는 수성구 범안로 120, 즉 범물동 산227-1의 천주교 모역 안에 있다. 본래 달성군에 있었는데 197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서상돈 가문이 대구에서 손가락에 꼽힌 부호 집안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곳의 서상돈 유택은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의 묘를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나라가 이 모양인데 무슨 낯으로 묘를 크게 쓴단 말이냐? 봉분도 하지 말라'는 뜻의 유언을 남겨 그의 묘소가 지금도 납작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봉분이 거의 없는 홍의장군 곽재우 묘소
 봉분이 거의 없는 홍의장군 곽재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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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본격적인 공부를 하려면 중구 공평로10길 25의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을 찾아야 한다. 그 외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품에 안고 있는 국채보상공원 내의 여러 조형물들, 국채보상운동 최초 논의 장소인 북성로 19-1의 광문사 터, 달구벌대로 2051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 첫 모금 장소인 태평로 141 북후정 터(대구시민회관)의 기념비, 부인들의 패물 모집 장소인 남원동 진골목 등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해서는 둘러볼 곳도 많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을 정도이니 당연한 일이다.

친일파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

일제 시대에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은 중추원 부의장(현재의 국회 부의장 정도)이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일제에 충성스러운 종으로 활동한 친일파들에게는 그곳의 참의(대략 현대의 국회의원 정도)로 임명되는 것이 최고의 명예였다. 중앙정부의 불허 방침에도 아랑곳없이 1906∼1907년 대구읍성을 일본인 상인들의 이익을 위해 마구 부숴버린 박중양은 중추원 부의장 자리를 차지했다.

 국채보상공원의 서상돈 김광제 흉상
 국채보상공원의 서상돈 김광제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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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가 간행한 <대구 경북 친일 행적>과 대구경북역사연구회가 펴낸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에 따르면, 대구 출신 중에는 서병조, 권중식, 김낙헌, 김재환, 서병주, 서상훈, 신현구, 이병학, 이창우, 장직상, 정교원, 정재학, 정해붕, 진희규 등 자산가와 고위 관료 출신들이 중추원 참의(국회의원 정도)에 임명되었다. 이들 중 서병조는 서상돈의 차남이다. 아버지 서상돈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 않았지만 아들 서병조는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한 아들

서병조는 아버지가 죽은 후 물려받은 재산으로 경상농공은행, 대동무역주식회사, 조양무진주식회사, 대구제사주식회사, 경북무진주식회사 등을 설립하거나 중역을 역임했던 대표적인 자본가'로서 일본인과 조선인 자본가로 구성된 대구상업회의소와 대구상공회의소의 특별회원이었으며, 일제의 지방행정기관의 자문기구였던 대구부 협의회 회원과 경북도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관변단체인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경북위원, 제국 재향군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왜 이렇게 다를까? 서상돈 묘소와 고택을 찾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물론 사람은 모두가 개체이니 부자간이든 형제자매간이든 서로 정체성이 다르다. 하지만 달라도 너무나 다를 때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신의 섭리인가?  

 중구 계산동 상화고택 맞은편의 서상돈 고택
 중구 계산동 상화고택 맞은편의 서상돈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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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구경북역사연구회 편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과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편 <대구 경북 친일 행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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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