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한 장의 사진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수십 장의 사진이 모여 있는 것인데도 그랬다. 사진들은 각각 개성도 뚜렷했다. 누군가는 파란색 옷을, 누군가는 쨍한 주황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십 장의 사진이, 마치 하나의 덩어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달라요. 피해 사례도 피해 기간도. 다만 딱 하나. 이들이 겪은 아픔 만큼은 다르지가 않아요."

사진가 안세홍씨의 그 한 마디로 알 수 있었다. 덩어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진들이 한 덩어리로 보인 이유. 모두 같지만 실은 모두 다른 위안부 피해의 실체도.

안씨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동티모르 등 세계 각지를 누볐다. 일본군으로부터 성노예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시민청에서 열린 안씨의 사진전, '겹겹 지울 수 없는 상처'도 그 기록의 일환이다. 사진전이 막을 내리기 하루 전날이었던 지난 12일 그를 만났다.

성노예 피해, 아픔의 깊이는 모두 같았다

사진가 안세홍 씨
 사진가 안세홍 씨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우리는 어제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조차 쉽게 기억하지 못한다. 10년 전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안씨는 이야기한다. 그가 만났던 할머니들은 70년 전의 아픔을 여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동티모르에서 만난 카민다 두(Carminda Dou) 할머니가 대표적이었단다. 안씨가 그곳에 방문했을 때, 할머니의 알츠하이머는 이미 상당 부분 진척돼 있었다. 위안부 피해 흔적을 되짚어보기는커녕 일상적인 대화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가까스로 할머니의 동생인 마티나(Martina)에게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이 일본군 만행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그때부터 할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어요."

말하는 내내 할머니는 여동생 곁에 앉아 웃고 있었는데, 대화가 깊어질수록 할머니의 얼굴은 일그러졌다고. 알츠하이머로 이미 많은 기억을 지웠지만, 지난했던 그날의 고통만큼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만 위안부, 그곳만 위안소가 아니다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삐걱거리는 판자 위에 대충 세워놓은 누런색 건물. 칸칸이 나뉘어 있는 방들과 길게 줄을 선 일본 군인. 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여인들. 위안소와 위안부라는 두 단어를 들으면 쉽게 떠올릴 만한 이미지다.

그러나 안씨는 당시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위안소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가 전시회에서 내보인 위안소 사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 위치한 '다이이치 살롱'은 흰 벽돌로 만들어진 2층 건물의 위안소다. 진한 주홍빛 창문이 달려 자칫 화려해 보이기까지 한다. 필리핀에선 병원이 곧 위안소였다. 일본군은 임마누엘 병원을 수비대와 포로수용소, 위안소로 동시에 사용했다.

안씨는 일본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위안부 역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일본 군인을 따라나섰다가 위안부에 강제 동원된, 소위 '취업 사기'를 당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본 장교가 숙소에 한 여성을 데려다 놓고 함께 살았던 '현지 처'와 같은 형태도 있었다고 했다.

"일본 측에선 '취업 사기'로 강제 동원됐다는 할머니들을 위안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돈을 받으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도대체 그런 게 중요하긴 한 건가요? 일본이 조직적으로 여성을 동원해 그들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다양한 형태의 위안소, 위안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각각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를 상상할수록 상황은 일본 측에 유리하게 흘러간다. 머릿속 이미지와 다른 여성 피해자들을, 우리조차도 위안부였다고 인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씨는 말한다. 일본이 전시 상황에서 여성을 성노예로 동원한 그 사실, 그 시스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성노예 피해, 그 '부끄러운 기억'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안 사진가의 이번 전시회 도록에는 그가 만났던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크게 3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어린 시절, 성노예로 동원된 시기 그리고 그 이후의 삶으로. 이 중 '그 이후의 삶'에서 피해 할머니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사용한 말이 있다. '부끄럽다'가 그것이다.

안씨에 따르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피해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여차해서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경우에는 갖은 핍박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그랬다. 고향에 위안부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결혼도 첩의 신분으로 겨우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의 경우 위안부 생활을 했던 중국에서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죄책감에, 아이가 셋 딸린 중국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엔 보다 더 심각했다. '명예살인'(가족이 명예롭지 않은 일을 당할 경우 죽일 수도 있는 풍습)이라는 관행 때문이다. 위안부였던 당시의 후유증으로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다는 디지 티자(Dg Tija)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웠던 탓이다.

"아버지가 알았으면 나는 벌써 죽었다."

왜 그들만 달랐을까

사진가 안세홍 씨의 사진을 다시 촬영한 사진
 사진가 안세홍 씨의 사진을 다시 촬영한 사진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유독 필리핀만 다르더라고요."


안씨는 필리핀에 방문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그날도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내내 뒤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남편이었다. 안씨는 깜짝 놀랐다. 다른 나라와 위안부 피해자를 대하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던 탓이다. 할머니는 결혼 전 남편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고도 덧붙였단다.

"우리나라 위안부 수요 집회에 피해자 할머니가족들 나온 거, 본 적 있나요?"

그뿐만이 아니다. 안씨는 필리핀의 위안부 집회를 보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일본 대사관 앞 집회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영정 사진을 들고 시위에 참석한 가족도 봤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저런 모습이었다면 참 좋았겠다 싶었어요. 아픔을 진정으로 나라가 끌어안는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요?"


우리나라 위안부를 너머 세계의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사진가 안세홍 씨의 전시회, ‘겹겹 지울 수 없는 흔적’ 내부
ⓒ 류승연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 정부는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고착 상태인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대해 안씨는 답했다. 한국 정부이기에 한국 위안부 피해자만을 위해 헌신하는 것. 언뜻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피해 사례들을 엮어 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진정한 해결'에 가까워질 거라고.

"나라,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외면하면 편협한 해결밖에 안 돼요. 세계 모든 사례를 묶어 비교, 대조하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 결국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해요."

서울 시민청에서 열린 이번 전시회는 아쉽게도 13일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오는 7월 17일부터 30일까지 경남 창원 창동 갤러리에서 같은 전시회가 다시 열린다는 소식이다. 


태그:#위안부, #안세홍, #위안부피해자, #수요집회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류승연기자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